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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지는 곡선

2026. 3. 6. · 9,044자 · 약 11분

갈라지는 곡선 썸네일
17

재윤이 번역 콘솔 앞에서 잠이 든 것은 새벽 3시쯤이었다. 화면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콘솔의 경고음에 깨어났다. 볼에 키보드 자국이 찍혀 있었다. 화면에 붉은 글자: 번역 불가, 의미 대응 실패. 루시드 계면에서 들어온 신호였다. 재윤은 눈을 비비고 원본 신호를 재생했다. 루시드의 언어는 소리가 아니라 주파수 곡선이었다. 2.7헤르츠에서 시작해 340헤르츠까지 솟구쳤다가 내려오는 산맥 같은 형태. 이 곡선의 굴곡이 의미를 담았다. 재윤은 곡선을 화면에 펼쳤다. 산맥의 중간에 골짜기가 하나 더 있었다. 하나의 곡선이 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형태. 23년치 번역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패턴이었다.

중계 정거장 세종. 지구에서 14.2광년. 루시드 영역 경계에서 0.3광년. 번역관 7명이 교대로 루시드의 주파수 패턴을 인간의 언어로 옮기고, 인간의 언어를 주파수 패턴으로 변환하는 곳이었다. 재윤은 세종에 온 지 8년째였다. 번역실은 정거장의 중앙부에 있었고, 사방이 콘솔과 화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창이 없었다. 번역관에게 필요한 것은 별빛이 아니라 주파수였다.

교대 시간에 민서가 들어왔다. 한 손에 커피, 다른 손에 수첩을 들고 있었다. 콘솔 옆에 커피를 놓으며 화면을 힐끗 봤다.

“또 깨진 거야?”

재윤이 화면을 가리켰다.

“자기 지시어 같은데 중간에 갈라져. 이런 거 본 적 있어?”

민서가 수첩을 옆에 놓고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분기점이 여기네.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동시에 가리킬 때 이런 형태가 나온다고 들은 적 있어. 강우진 선배 노트에.”

재윤이 봤다.

“강우진 선배?”

민서가 끄덕였다.

“초대 번역관. 10년 전에 귀환했어. 보관실에 노트가 있을 거야.”

재윤은 번역 기록 보관실로 내려갔다. 정거장 하층, 서버실 옆의 작은 방. 서버 랙의 파란 표시등이 어둠 속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냉각 팬의 바람이 재윤의 목덜미를 스쳤다.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 재윤은 28년치 기록 중에서 최초 자원 협정 파일을 찾았다. 강우진의 번역 노트가 첨부돼 있었다. 파란 표시등의 빛 아래서 노트를 읽었다.

노트의 글씨는 짧고 끊겼다. 피곤한 사람이 쓴 글이었다. '합의라는 단어를 루시드에게 전달하는 데 3개월. 문제는 주체. 루시드에게 지금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른 존재. 그래서 루시드의 합의는 특정 시점의 정체성이 동의하는 것. 영구적 동의가 아님. 이 차이를 번역에 반영하지 못했음. 합의를 영구적 동의로 번역함. 선택이었음. 후회함. ' 마지막 두 글자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후회함. 재윤은 그 밑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화면 위의 글자였지만, 28년 전 누군가의 손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재윤은 화면을 닫고 보관실을 나왔다. 서버 랙의 파란 빛이 등 뒤에서 사라지고, 복도의 흰 조명이 눈을 찔렀다. 재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복도를 걸었다. 세종의 복도는 직선이었다. 양쪽 끝이 보였다. 한쪽 끝에 관측 창이 있었다. 루시드 영역의 연보라빛 성운이 창 너머에서 빛나고 있었다. 재윤은 창 앞에 서서 유리에 이마를 댔다. 차가웠다. 우주의 온도가 유리를 통해 전해졌다. 강우진은 이 창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합의를 영구적 동의로 번역하겠다고 결정한 날, 이 창 앞에 섰을까. 재윤은 눈을 감았다. 유리의 차가움이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퍼졌다.

오후에 지구에서 통신이 도착했다. 14.2년 전에 출발한 것이었다. 유엔 성간관계위원회의 공식 서한: 루시드 영역 경계 자원 채굴 허가 갱신 요청. 재윤은 서한을 읽으며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갱신. 기존 계약을 연장한다는 뜻. 기존 계약은 28년 전 강우진이 번역한 합의에 기초해 있었다. 영구적 동의로 번역된 합의. 재윤은 이제 알고 있었다. 그 번역이 오역이었다는 것을. 루시드가 영구적으로 동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재윤은 갱신 요청을 들고 번역실로 돌아왔다. 갱신이라는 단어를 루시드의 패턴으로 변환하려고 시도했다. 갱신은 기존 계약의 연장. 연장은 시간이 지나도 같은 것이 유지된다는 뜻. 하지만 루시드의 언어에는 유지된다에 대응하는 패턴이 없었다. 루시드에게 모든 것은 경험의 농도에 따라 진해지거나 옅어졌다. 유지되는 것은 없었다. 재윤은 콘솔 앞에서 한 시간 동안 패턴을 조합하다가 멈췄다. 갱신을 번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번역할 수 없는 단어 앞에서 재윤은 다른 길을 택했다.

재윤은 갱신 요청을 번역하지 않았다. 대신 루시드에게 질문을 보냈다. 질문을 주파수 패턴으로 변환하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유효하다는 개념이 루시드의 언어에 없었다. 재윤은 여러 번 수정한 끝에 이렇게 번역했다: 28회전 전의 동의가 현재의 경험 농도에서 여전히 진한가? 루시드의 시간 단위인 회전은 루시드 항성의 자전 주기로, 약 1.2지구년이었다. 28회전. 약 33.6지구년. 재윤은 전송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3초간 멈췄다. 손끝이 차가웠다. 이 질문을 보내는 순간, 28년간의 관계가 흔들릴 수 있었다. 재윤은 숨을 내쉬고 버튼을 눌렀다.

답을 기다리는 3일은 길었다. 루시드 영역까지 0.3광년. 양자 중계를 써도 신호가 오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재윤은 기다리는 동안 다른 번역 업무를 처리했다. 루시드와의 일상적 통신. 기상 데이터 교환, 성운 활동 보고, 통항 경로 조정. 이런 통신은 번역이 수월했다. 숫자와 좌표는 오해의 여지가 적었다. 하지만 합의나 동의나 약속 같은 단어가 나오면 번역이 멈췄다. 시간 개념이 다른 존재에게 약속이란 무엇인가. 재윤은 그 질문을 안고 3일을 보냈다.

기다리는 동안 재윤은 강우진의 다른 노트들을 읽었다. 초기 접촉 기록. 루시드가 처음 주파수 패턴을 보내왔을 때, 세종에는 번역관이 강우진 혼자였다. 6개월 동안 혼자서 패턴을 해독했다. 노트의 어조가 날마다 달라졌다. 처음에는 흥분이 있었다. '오늘 새로운 패턴 3개 확인. 감정 범주로 추정. ' 한 달 뒤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수면 4시간. 패턴 해독이 안 됨. 루시드가 시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확인. 이것 때문에 모든 이전 번역을 재검토해야 함. ' 석 달 뒤에는 체념이었다. 글씨가 더 작아지고, 문장이 더 짧아졌다. '경험의 농도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2주. 완전히 이해했는지 확신 없음. 하지만 번역을 더 미룰 수 없음. 지구에서 합의안을 기다리고 있음. '

재윤은 노트를 읽으며 강우진이라는 사람의 윤곽을 더듬었다. 글씨가 짧아지는 패턴, 밤 시간대에 집중되는 기록, 가끔 섞이는 개인적인 메모. '어머니 생신. 축하 메시지를 보냈지만 도착하는 건 14.2년 뒤. 도착할 때 어머니가 살아 있을까. ' 재윤은 이 문장에서 멈췄다. 보관실의 파란 표시등이 깜빡였다. 서버 랙 사이의 좁은 통로에서 재윤은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사진을 꺼내 봤다. 종이 사진이었다. 세종에 올 때 가져온 것. 사진 속 아버지는 쉰셋이었다. 지금은 예순하나일 것이었다. 아니, 14.2년 전의 안부 신호로는 살아 있었다. 지금은 모른다. 사진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사진 속 아버지의 정체성과 현재의 아버지의 정체성은 같은가. 인간의 대답은 같다. 하지만 쉰셋의 아버지와 예순하나의 아버지가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재윤에게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재윤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2년 전 아버지에게 보낸 메시지. 도착하는 것은 12년 뒤. 아버지의 답이 오는 것은 24년 뒤. 재윤이 예순이 넘었을 때.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정체성이 완전히 달라져 있을 시간이었다.

3일째 되는 아침, 루시드의 답이 왔다. 재윤은 번역실에서 혼자 답을 열었다. 주파수 곡선을 화면에 펼쳤다. 곡선의 하강 구간이 유난히 완만했다. 루시드가 주저하고 있었다. 재윤은 곡선을 읽었다. 번역: '28회전 전의 동의는 28회전 전의 정체성이 가진 것이다. 현재의 정체성은 그 동의를 기억하지만, 그 동의의 주체가 아니다. 기억과 동의는 다르다. ' 재윤은 의자에 기댔다. 천장의 환기 덕트에서 차가운 바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28년간의 자원 채굴. 루시드가 동의하지 않은 채굴. 재윤의 손이 콘솔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화면만 봤다. 번역실의 천장이 낮았다. 금속 패널 사이로 환기 덕트의 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차가운 바람. 재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화면의 글자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기억과 동의는 다르다. 이 말이 재윤의 것인지 루시드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재윤은 민서를 불렀다. 번역실에 둘이 앉아 답을 다시 확인했다. 민서가 곡선을 보며 말했다.

“하강 구간이 느려. 이런 패턴은 루시드가 상대의 반응을 걱정할 때 나와.”

재윤이 봤다.

“걱정?”

민서가 끄덕였다.

“루시드도 이 답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거야. 28년간의 관계가 흔들린다는 걸.”

재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지구에 보내야 해.”

민서가 봤다.

“보내면 14.2년 뒤에 도착하고, 대응이 오려면 또 14.2년. 그 사이에 채굴은?”

재윤이 답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숨기면 강우진 선배가 한 것과 같은 일이야.”

민서가 커피를 마셨다.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강우진 선배도 숨긴 게 아니야. 선택한 거야. 너도 선택하는 거고.”

재윤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민서가 다시 말했다.

“강우진 선배가 정직하게 번역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봤어?”

재윤이 봤다.

“합의가 안 됐겠지. 루시드와의 관계가 시작도 안 됐을 거야.”

민서가 끄덕였다.

“우리도 여기 없고. 이 대화도 없고.”

재윤이 콘솔 화면을 봤다. 루시드의 답이 곡선으로 떠 있었다.

“그래도 보내야 해.”

민서가 잔을 들어 재윤에게 기울였다. 건배 비슷한 동작이었다.

“알아. 그래서 안 말리는 거야.”

'

재윤은 관리자에게 보고하러 갔다. 정거장 상층의 사무실. 관측 창 너머로 성운의 연보라빛이 사무실 바닥까지 깔려 있었다. 관리자가 의자에 앉아 루시드의 답 번역을 읽었다. 읽는 동안 표정이 굳어갔다. 다 읽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걸 지구에 보내면 세종이 끝나.”

재윤이 봤다.

“루시드의 답을 숨기면 세종이 거짓 위에 서게 됩니다.”

관리자가 고개를 돌려 재윤을 봤다.

“강우진 번역관이 그 선택을 한 건,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였어. 네가 여기 있는 것도 그 선택 덕분이야.”

재윤은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윤의 존재 자체가 28년 전의 오역 위에 서 있었다. 관리자가 창밖을 봤다. 성운의 보라빛이 관리자의 얼굴 절반을 물들이고 있었다.

“보내.”

관리자가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루시드에게 새로운 동의를 요청해. 기존 합의가 무효라면, 새로운 합의를 시작하자고.”

관리자의 사무실을 나오는 재윤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복도의 야간 조명이 푸른빛으로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세종에 근무하는 32명 중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은 번역관뿐이었다. 루시드는 잠을 자지 않았다. 주파수 패턴은 24시간 쉬지 않고 도착했다. 재윤은 복도 벽에 손을 댔다. 통신 장비가 루시드의 신호를 수신하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벽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두 종의 대화가 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재윤은 번역실로 돌아와 두 가지 통신을 준비했다. 하나는 지구행. 루시드의 답과 강우진의 노트를 함께 실었다. 28년 전의 오역을 밝히는 통신. 14.2년 뒤에 도착할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루시드행. 현재의 정체성으로 새로운 동의를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루시드의 언어로 옮기기 수월했다. 루시드에게 모든 동의는 매 순간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재윤은 두 통신을 동시에 전송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번역실의 콘솔 표시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신호가 두 방향으로 퍼져 나갔다. 지구 쪽으로는 14.2년을, 루시드 쪽으로는 며칠을 날아갈 것이었다. 재윤은 콘솔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기댔다. 번역실이 조용했다. 콘솔의 냉각 팬 소리와 환기 덕트의 바람 소리만 남았다. 재윤은 자기가 무엇을 한 것인지 가늠하려 했다. 28년간의 관계를 흔들었다. 세종 정거장의 존립 근거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새로운 합의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이 번역 한 건에 담겨 있었다. 재윤은 손바닥을 봤다. 콘솔을 치던 손가락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한쪽은 14.2광년을 날아 지구로, 다른 한쪽은 0.3광년을 날아 루시드 영역으로.

루시드의 답이 온 것은 5일 뒤였다. 이번 답에는 아침에 번역이 실패했던 그 패턴이 다시 포함돼 있었다. 분기하는 자기 지시어. 재윤은 민서와 함께 곡선을 펼쳤다. 민서가 곡선의 분기점을 짚으며 말했다.

“이거 자기 지시어가 아니야. 우리야.”

재윤이 봤다.

“우리?”

민서가 두 갈래의 선을 각각 가리켰다.

“하나는 루시드, 하나는 인간. 근데 합쳐져. 루시드가 인간과 자기를 하나로 묶고 있어.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정체성.”

재윤은 곡선을 다시 봤다. 갈라졌다가 합쳐지는 선. 두 종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고 있었다. 재윤은 곡선의 합류점을 확대했다. 합류점에서 주파수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루시드의 표준 패턴에서는 볼 수 없는 떨림. 민서가 봤다.

“이 떨림은 뭘까?”

재윤이 답했다.

“모르겠어. 불안정한 건지, 새로운 건지.”

민서가 말했다.

“둘 다일 수도 있잖아. 새로운 건 대체로 불안정해.”

'

답의 전체 번역: '현재의 정체성은 새로운 동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의는 우리의 정체성이 해야 한다. 나만의 것도, 너만의 것도 아닌, 우리가 만든 정체성이. 이것은 28회전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처음 존재한다. ' 재윤은 이 번역을 세 번 읽었다. 루시드가 인간과의 접촉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역 위에 쌓인 28년의 접촉이 낳은 것. 실수에서 시작됐지만, 실수만은 아닌 것. 재윤은 이 번역을 지구행 통신에 추가했다. 전송 표시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재윤은 의자에 기대 번역실 천장을 봤다. 금속 패널. 환기 덕트. 세종 정거장의 모든 표면이 금속이었다. 차갑고 단단한 세계. 하지만 그 금속 벽 안으로 두 종의 언어가 흐르고 있었다. 주파수 패턴과 문자가 서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만나는 지점에 재윤이 앉아 있었다.

재윤은 번역 노트를 적었다. 강우진이 28년 뒤의 누군가에게 노트를 남긴 것처럼, 재윤도 미래의 번역관에게 적었다. '분기하는 자기 지시어를 처음 확인했다. 루시드가 인간과의 관계에서 만든 새로운 정체성 범주로 보인다. 이 번역이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다. 강우진 선배는 확신 없는 번역을 확정으로 포장했고, 그 대가를 우리가 치르고 있다. 나는 불확실함을 숨기지 않기로 한다. 이 노트를 읽는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

노트를 저장하고 재윤은 민서를 봤다. 민서가 옆 콘솔에서 다른 통신을 처리하고 있었다. 재윤이 말했다.

“14년 뒤에 이 노트를 읽는 사람이 있겠지.”

민서가 봤다.

“너일 수도 있잖아.”

재윤이 고개를 저었다.

“14년 뒤의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니야.”

민서가 웃었다.

“루시드한테 물들었네.”

재윤이 웃지 않았다.

“강우진 선배의 노트를 읽을 때, 선배가 28년 전의 사람이라서 먼 느낌이 아니었어. 마치 어제 쓴 것 같았어. 피곤하고, 혼자이고, 확신이 없는 사람이.”

민서가 커피 잔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다른 선택을 한 거잖아.”

재윤이 잠시 멈추고 봤다.

“같은 선택을 할 뻔했어. 지구에 안 보내고 그냥 갱신을 번역할 뻔했어.”

민서가 봤다.

“왜 안 그랬는데?”

재윤이 답했다.

“후회함이라는 밑줄 때문에.”

번역실을 나와 재윤은 관측 창 앞에 섰다. 성운의 연보라빛이 유리를 통해 복도까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재윤은 창에 손을 댔다. 차가운 유리. 손바닥의 체온이 유리 위에 안개를 만들었다. 안개가 번지다가 사라졌다. 체온이 식으면 안개도 사라졌다. 재윤은 다시 손을 댔다. 안개가 다시 생겼다. 유리 너머로 성운의 보라빛이 안개 속을 통과해 재윤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루시드가 서식하는 가스 구름의 빛이 재윤의 피부 위에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재윤은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성운 위에 겹쳐진 얼굴. 지금의 재윤과 반사된 재윤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 어긋남 사이에 14.2광년의 거리와 28년의 시간이 접혀 있었다. 재윤은 손을 뗐다. 안개가 사라졌다. 유리가 다시 투명해졌고, 성운의 보라빛이 방해 없이 쏟아졌다. 수천 개의 루시드 개체가 저 가스 구름 안에서 주파수로 대화하고 있었다. 재윤이 보낸 질문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미 답을 보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시간 차이 속에서, 질문과 답이 동시에 우주를 날고 있었다.

재윤은 번역실로 돌아갔다. 콘솔 앞에 앉았다. 루시드 영역에서 새 신호가 도착해 있었다. 화면에 곡선이 펼쳐졌다. 또 분기하는 패턴이었다. 이번에는 분기점이 세 개였다. 세 갈래의 선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뻗었다가 하나로 합쳐졌다. 재윤은 곡선의 시작점에 커서를 놓았다. 2.7헤르츠. 며칠 전 새벽에 깨어났을 때의 그 주파수. 재윤은 헤드셋을 쓰고 곡선을 따라갔다. 첫 번째 갈래가 올라가는 지점에서 멈추고, 두 번째 갈래가 내려가는 지점을 확인하고, 세 번째 갈래가 처음 두 선과 만나는 지점을 찾았다. 세 갈래. 루시드와 인간과,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무언가. 재윤은 이 세 번째 갈래를 번역할 단어를 아직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곡선은 거기 있었다. 번역되기를 기다리며. 28년 전에는 두 갈래였던 곡선이 세 갈래가 됐다. 다음에는 네 갈래가 될 수도 있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곡선은 복잡해질 것이었다. 복잡한 곡선을 번역하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그 복잡함이 두 종이 서로를 바꾸고 있다는 증거였다. 재윤은 콘솔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이 키보드의 차가운 표면에 닿았다. 8년간 이 키보드를 쳤다. 8년 전의 재윤과 지금의 재윤은 같은 사람인가. 재윤은 그 질문을 접어두고 화면에 집중했다. 강우진의 노트가 28년을 건너 재윤에게 닿은 것처럼, 재윤의 번역이 14년을 건너 누군가에게 닿을 것이었다. 재윤은 첫 번째 갈래부터 읽기 시작했다. 곡선이 올라가는 구간에서 재윤의 심장도 빨라졌다. 곡선이 내려오는 구간에서 숨이 길어졌다. 8년간 번역을 하면서, 재윤의 몸이 루시드의 주파수에 반응하게 됐다. 루시드가 재윤을 바꾼 것인지, 재윤이 스스로 바뀐 것인지. 콘솔의 화면이 재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주파수 곡선의 빛이 재윤의 눈동자 위에서 산맥처럼 솟아올랐다 내려갔다. 그 산맥 어딘가에 답이 있었다.

정체성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존재와, 정체성을 고정된 것으로 여기는 존재 사이에서, 과거의 합의는 현재에도 유효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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