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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논둑

2026. 3. 22. · 8,972자 · 약 10분

빛의 논둑 썸네일
17

벼가 누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7월인데 논이 노랬다. 초록이어야 할 벼가 누렇게 말라 있었다. 성호는 논둑에 서서 논을 봤다. 3,200평. 할아버지가 일궜고, 아버지가 물려받았고, 성호가 이어받은 논. 올해 수확량 예측: 1,800킬로그램. 쌀값 킬로그램당 2,400원. 1,800킬로그램이면 432만 원. 대출 이자 380만 원을 내면 52만 원이 남았다. 12개월을 52만 원으로 살아야 했다. 작년의 절반. 재작년의 3분의 1. 성호는 손으로 벼 이삭을 만졌다. 알이 차지 않았다. 껍데기만 있었다. 광합성이 부족한 벼는 이렇게 됐다. 낟알이 비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침 6시 12분. 해가 떠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동쪽 절반이 어두웠다. 수평선 위로 태양이 보였지만 빛이 내려오지 않았다. 태양과 지상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궤도 태양광 패널. 저궤도 340킬로미터 상공에 떠 있는 패널 군집. 패널 하나의 크기가 축구장 4개. 무게 120톤. 궤도에서 펼쳐지면 태양빛을 받아 전기로 변환하고, 마이크로파로 지상 수신소에 전송한다. 수신소에서 전력망으로 분배. 그것이 수천 개. 아침 해가 지평선을 넘어도 패널이 빛을 가렸다. 6시 12분부터 7시 14분까지. 1시간 2분.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6시 38분부터 8시 16분까지. 1시간 38분. 하루에 2시간 40분의 햇빛이 사라졌다.

궤도 태양광은 2068년에 시작됐다. 화석연료 퇴출 이후 전 세계가 전력 부족에 시달렸다. 태양광 패널을 우주에 올리면 날씨에 상관없이 24시간 발전이 가능했다. 마이크로파로 지상에 전송. 깨끗하고 안정적인 전력. 6년 만에 지구 전체 전력의 40퍼센트를 궤도 태양광이 공급했다. 대가가 있었다.

3년 전에는 17분이었다. 하루 17분의 그림자. 그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구름이 지나간 것과 비슷했으므로. 패널이 늘었다. 매달 새 로켓이 올라갔다. 하루 120회. 패널이 궤도를 채웠다. 17분이 40분이 됐고, 40분이 1시간이 됐고, 지금은 2시간 40분이었다. 벼가 죽기 시작한 것은 그림자가 1시간을 넘기면서부터였다. 광합성에는 일출과 일몰의 빛이 중요했다. 약한 빛에서 천천히 시작되는 광합성. 벼는 일출의 붉은 빛을 가장 먼저 흡수했다. 엽록소가 깨어나는 시간. 그 시간을 패널이 빼앗고 있었다.

성호는 논둑에서 내려와 집으로 걸어갔다. 집은 논에서 200미터 거리에 있었다. 2층 농가 주택. 1층에 거실과 부엌, 2층에 방 2개. 성호 혼자 살았다. 아내 은지는 수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평일에는 수원 병원 기숙사에 있었다. 주말에만 왔다. 아이는 없었다. 농사로는 먹고살 수 없으니 아이는 나중에 하자고 은지가 말했다. 3년 전에. 3년이 지났다. 농사는 더 안 됐다. 나중은 오지 않았다. 은지가 주말에 올 때마다 논을 봤다. 처음에는 같이 걱정했다. 지금은 논을 보지 않았다. 거실 커튼을 닫았다. 논이 보이지 않게.

부엌 테이블 위에 서류가 있었다. 성호가 3개월 전에 보낸 민원의 답변서. 한국궤도에너지공사. '귀하의 민원에 대해 답변드립니다. 궤도 태양광 패널의 배치 및 운영은 국제궤도관리기구의 관할이며, 국내법 적용 대상이 아닙니다. 농작물 피해에 대한 보상은 현행법상 근거가 없습니다. 추가 문의는 국제궤도관리기구 민원 창구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성호는 이 답변서를 7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같은 문장이었다. 현행법상 근거가 없습니다. 법이 없으면 피해도 없는 것이었다. ' 성호는 농민 단체에도 연락했다. 같은 피해를 입은 농부가 전국에 12만 명이었다. 서명을 모았다. 4만 7,000명. 국회에 청원을 냈다. 소관 부서가 없다는 답변이 왔다. 성호는 국제궤도관리기구에도 민원을 넣었다. 영어로. 번역기를 돌려서. 답변이 오지 않았다. 3개월째.

전화가 울렸다. 은지였다.

“밥 먹었어?”

“아직.”

“논 봤어?”

“봤어.”

“어때?”

성호는 창밖을 봤다. 누런 논이 보였다.

“죽어가.”

은지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번 달 대출 이자 나왔어. 380만 원. 3개월 연체야.”

“알아.”

“수확 못 하면 어떻게 해?”

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논 팔자. 지금이라도.”

“못 팔아.”

“왜?”

“할아버지 논이야.”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잖아.”

“논은 안 죽었어.”

성호는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 후회했다. 다시 걸지 않았다. 은지도 다시 걸지 않았다. 둘 다 이 대화를 너무 많이 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에 지쳐 있었다. 은지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논을 팔면 대출을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호는 이 논에서 태어났다. 이 논의 흙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새벽 4시에 일어나 논에 물을 대던 모습을 봤다. 할아버지는 이 논에서 평생을 보냈다. 6·25 때도 논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포탄이 떨어져도 벼는 물이 필요하다고. 할아버지의 손은 거칠었다. 흙이 박혀 있는 손이었다. 아버지가 트랙터를 몰던 소리를 들었다. 이 논이 성호의 전부였다.

오후에 이웃집 만수가 찾아왔다. 만수는 성호 농장 옆에 살았다. 퇴역 군인. 15년 복무 후 전역. 지금은 고추농사를 짓고 있었다. 만수의 고추도 죽어가고 있었다. 광합성 부족. 만수는 작년에 고추 800킬로그램을 수확했다. 올해 예상치는 300킬로그램. 만수의 아내는 3년 전에 떠났다. 농사 안 된다고. 만수는 혼자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

“성호야.”

“형.”

만수가 성호의 부엌에 앉았다. 테이블 위의 답변서를 봤다.

“또 빠꾸당했네.”

“국제기구한테도 답이 없어.”

“당연하지. 패널 하나에 200억이야. 그걸 수천 개 올렸는데 농부한테 보상하겠어?”

성호가 물을 따랐다.

“농촌 어디나 마찬가지지?”

“전국이 다 그래. 충남도 전남도. 논이 노랗게 변하고 있어.”

“형은 어떡할 거야?”

만수가 물을 마셨다. 컵을 내려놓았다.

“하나 보여줄 게 있어.”

만수의 집 뒤에 창고가 있었다. 농기구 창고. 트랙터, 경운기, 비료 포대. 만수가 창고 안쪽의 방수포를 들어올렸다. 방수포 아래에 금속 장비가 있었다. 길이 2미터. 원통형.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조준 장치가 달려 있었다.

“이게 뭐야?”

“대공 레이저야. 군에서 쓰던 거. 2050년대 초기 모델. 저출력이야. 항공기 격추는 못 해. 하지만 저궤도 위성 정도는 돼.”

성호가 장비를 봤다.

“이걸 어디서 구했어?”

“전역할 때 부대에서 폐기 처분된 거야. 그냥 버리길래 가져왔어.”

성호는 장비의 렌즈를 봤다. 검은 원형 렌즈. 지름 30센티미터. 렌즈 표면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만수가 천으로 닦고 있었다.

“불법 아니야?”

“당연히 불법이지.”

만수가 장비 옆에 앉았다.

“나 혼자 결정 못 해서 너한테 말하는 거야. 같이 결정하자.”

성호는 만수를 봤다.

“패널 하나가 우리 농장 위를 지나가는 시간이 17분이야. 패널 하나만 격추하면 17분의 햇빛이 돌아와.”

“17분이면 뭘 해.”

“벼한테는 17분이 크다. 일출 직후 17분. 그게 광합성 시작 시점이야. 그 17분을 돌려받으면 수확량이 15퍼센트 회복돼. 내가 계산했어.”

성호는 장비를 만졌다. 금속이 차가웠다. 7월인데 차가웠다.

“격추하면 어떻게 돼?”

“패널이 떨어져. 대기권에서 대부분 타. 파편 일부가 바다에 떨어질 수 있어.”

“잡히면?”

“위성 파괴는 우주법 위반이야. 국내법으로는 국가기간시설 파손. 징역 5년에서 10년.”

성호는 창고 밖을 봤다. 만수의 고추밭이 보였다. 고추가 시들어 있었다. 잎이 노랬다.

“한 가지 더 있어.”

만수가 말했다.

“내가 조사해봤는데. 우리 농장 위를 지나가는 패널 4728호이 공급하는 전력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

“어디?”

“수원 중앙병원. 중환자실 병상 120개. 인공호흡기 48대.”

성호가 만수를 봤다.

“은지 일하는 병원이야.”

“알아.”

“그 병원 전력의 12퍼센트가 4728호에서 와. 비상 발전기가 있으니까 병원이 멈추지는 않아. 하지만 전력이 12퍼센트 줄면 비상 발전기가 돌아가고, 비상 발전기 연료가 8시간분이야. 8시간 안에 다른 전력원을 연결하지 못하면.”

“생명유지장치가 꺼지면 ―”

“그만해.”

만수가 입을 다물었다.

성호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에 앉았다. 창밖으로 논이 보였다. 누런 논. 해가 지고 있었다. 오후 6시 38분. 그림자가 내려왔다. 태양이 수평선 위에 있는데 논이 어두워졌다. 패널이 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림자의 경계가 논 위를 지나갔다. 빛과 어둠의 경계선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패널이 궤도를 따라 움직이면서 그림자도 움직였다. 성호는 어두워지는 논을 봤다. 벼가 빛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벼는 마지막 광합성을 해야 했다. 낮 동안 만든 양분을 알에 채우는 시간. 그 시간이 사라졌다.

성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은지에게 전화했다. 은지가 받았다.

“아까 미안해.”

“괜찮아.”

“은지야.”

“응.”

“수원 중앙병원 전력. 궤도 패널에서 얼마나 와?”

은지가 잠시 말이 없었다.

“왜?”

“그냥 궁금해서.”

“잘 모르겠는데. 작년에 정전 한 번 있었어. 30분. 비상 발전기 돌렸어. 중환자실 환자 2명 위험했어. 인공호흡기가 3초 멈췄거든.”

“3초?”

“비상 발전기 가동까지 3초 걸려. 그 3초 동안 인공호흡기가 멈춰. 건강한 사람은 3초 괜찮아. 폐가 안 좋은 환자는 3초가 위험해.”

성호는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왜 이런 거 물어?”

“아니야. 그냥.”

밤이었다. 성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3,200평의 논. 1,800킬로그램의 예상 수확량. 380만 원의 대출 이자. 할아버지의 논. 아버지의 논. 성호의 논. 누런 벼. 빈 낟알. 2시간 40분의 그림자. 17분의 햇빛. 4728호. 수원 중앙병원. 인공호흡기. 3초.

잠이 오지 않았다. 성호는 자정에 일어나 부엌에 앉았다. 물을 마셨다. 창밖이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논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었다. 성호는 3시까지 부엌에 앉아 있었다.

성호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논에 나갔다. 어두웠다. 해가 뜨려면 2시간이 남아 있었다. 성호는 논둑에 앉아 하늘을 봤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논물이 차 있었다. 어제 성호가 댄 물. 물은 충분했다. 문제는 물이 아니었다. 빛이었다. 별이 보였다. 별 사이로 빛나는 점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태양광 패널. 궤도를 도는 패널들이 태양빛을 반사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수천 개. 밤하늘의 별보다 많았다. 성호의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저 자리에 별만 있었다. 성호는 그 빛들을 봤다. 저 빛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전력이었다. 누군가의 에어컨이었고, 누군가의 냉장고였고, 누군가의 인공호흡기였다. 그리고 저 빛 하나하나가 성호의 햇빛을 빼앗고 있었다.

새벽 5시에 만수가 왔다. 손에 커피 캔 2개를 들고 있었다. 성호 옆에 앉았다. 캔을 건넸다.

“결정했어?”

“아직.”

“시간 없어. 벼 이삭이 패는 게 다음 주야. 이삭이 팰 때 광합성을 못 하면 올해 수확은 끝이야.”

성호가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입에 남았다. 캔이 차가웠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7월인데 새벽은 서늘했다.

“형은 왜 안 해?”

“내가 하면 내 고추밭 위를 지나가는 패널을 쏴야 해. 그 패널은 대전 전력망에 연결돼 있어. 대전에 내 딸이 살아.”

성호가 만수를 봤다.

“나도 마찬가지야.”

“알아. 근데 네 위의 패널은 수원이잖아. 수원 중앙병원은 비상 발전기가 있어. 비상 발전기 연료가 8시간분이고. 8시간이면 한전이 다른 전력원을 연결해.”

“3초.”

“뭐?”

“비상 발전기 가동까지 3초 걸려. 인공호흡기가 3초 멈춰.”

만수가 캔을 내려놓았다.

“그건 몰랐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6시 12분. 수평선 위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논을 향해 내려왔다. 잠깐. 아주 잠깐 빛이 논에 닿았다. 벼 잎에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림자가 왔다. 패널이 태양 앞을 지나갔다. 논이 어두워졌다. 6시 12분에 시작된 그림자. 7시 14분까지. 성호는 어두워지는 논을 봤다. 벼가 빛을 찾아 잎을 펼치고 있었다. 빛이 없었다. 잎이 펼쳐졌지만 빛이 닿지 않았다.

성호는 일어섰다. 만수를 봤다.

“내일 새벽에.”

성호의 목소리가 건조했다. 입술이 말라 있었다.

만수가 성호를 봤다.

“4728호이 농장 위를 지나가는 시간이 언제야?”

“새벽 5시 47분. 일출 전이야. 일출 전에 격추하면 일출부터 17분의 햇빛이 돌아와.”

“새벽 5시 47분이면 병원이 어때?”

“새벽이니까 전력 사용량이 낮아. 12퍼센트가 빠져도 비상 발전기 없이 버틸 수 있을 수도 있어.”

“수도 있다고?”

만수가 성호를 봤다.

“확실한 건 없어. 하지만 새벽이 가장 안전한 시간이야.”

성호는 집으로 돌아왔다. 은지에게 전화했다. 은지가 받지 않았다. 근무 중일 것이었다. 성호는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새벽에 논 작업 있어. 일찍 일어나야 해서 먼저 자. ' 거짓말이었다. 성호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꺼졌다. 어둠이 돌아왔다. 밖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논에서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개구리도 빛이 줄어든 것을 아는지 울음소리가 예전보다 작았다.

밤 11시. 성호는 만수의 창고에 있었다. 만수가 레이저 장비를 받침대에 고정하고 있었다. 조준 장치를 조정했다. 노트북으로 4728호의 궤도 데이터를 확인했다.

“궤도 주기가 91분이야. 4728호는 91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우리 농장 위를 지나가는 건 하루에 한 번. 내일 새벽 5시 47분 12초. 우리 농장 위 340킬로미터. 시야각 23도. 4초간 조사하면 패널 태양전지가 녹아. 전력 공급이 끊겨.”

성호는 장비 앞에 서 있었다.

“4초.”

“4초야.”

새벽 4시에 성호는 논둑에 앉아 있었다. 하늘에 별이 있었다. 패널들의 빛이 줄지어 지나갔다. 성호는 주머니에서 흙을 꺼냈다. 논의 흙. 어제 저녁에 주머니에 넣어둔 것이었다. 흙을 손에 쥐었다. 할아버지가 이 흙을 만졌다. 아버지가 이 흙을 갈았다. 성호가 이 흙에 벼를 심었다. 흙에서 나는 냄새. 습한 흙. 생명이 자라는 흙. 빛이 필요한 흙.

5시 30분.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일출까지 42분. 만수가 장비를 가동했다. 저주파 윙 소리가 났다. 충전 중이었다. 성호는 장비 앞에 섰다. 조준 장치 모니터에 하늘이 보였다. 별들 사이로 빛나는 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4728호. 340킬로미터 상공. 성호의 논 위를 지나갈 패널. 17분의 햇빛을 빼앗고 있는 패널.

5시 44분. 은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호가 받았다.

“왜 이 시간에?”

“야근 끝났어. 메시지 봤어. 무슨 논 작업?”

“그냥 물 대는 거야.”

“새벽 4시에?”

“할아버지도 새벽 4시에 했어.”

은지가 웃었다.

“오늘 중환자실에 환자가 하나 들어왔어. 78세 할머니. 폐렴. 인공호흡기 달았어.”

“그래.”

“남편이 옆에 있었어. 손을 잡고 있었어. 할머니 손이 부어서 반지가 안 빠진대.”

성호는 장비의 모니터를 봤다. 4728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은지야.”

“응.”

“사랑해.”

“갑자기 왜?”

“논 보면서 생각났어.”

“논 팔면 같이 수원에서 살 수 있어.”

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았어. 조심해.”

성호가 전화를 끊었다.

5시 46분. 4728호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니터에 빛나는 점. 성호는 발사 버튼에 손을 올렸다. 만수가 옆에 서 있었다.

“10초.”

성호의 손이 떨렸다. 손가락에 흙이 묻어 있었다. 아까 주머니에서 꺼낸 흙. 17분의 햇빛. 3,200평의 논. 할아버지의 논. 수원 중앙병원. 인공호흡기. 78세 할머니. 3초.

“5초.”

성호는 눈을 감았다. 논의 흙 냄새가 났다. 새벽 공기에 섞인 흙 냄새. 벼가 죽어가는 냄새. 빛이 필요한 냄새.

“지금.”

성호가 버튼을 눌렀다. 레이저가 발사됐다. 소리는 없었다. 빛만 있었다. 가느다란 빛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갔다. 4초. 빛이 멈췄다. 모니터에서 4728호의 신호가 사라졌다. 만수가 모니터를 봤다.

“맞았어.”

만수가 장비를 방수포로 덮었다. 성호는 손을 봤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버튼을 누른 손. 방아쇠를 당긴 손. 할아버지가 벼를 심던 손과 같은 손이었다. 증거를 없애는 동작이 빨랐다. 군인의 습관이 남아 있었다.

성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패널이 사라진 자리. 별이 보였다. 작은 빈 공간. 다른 패널들은 여전히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수천 개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가 성호의 하늘이었다. 성호의 논 위의 하늘. 할아버지의 하늘. 아버지의 하늘.

6시 12분. 해가 떠올랐다. 빛이 논을 향해 내려왔다. 그리고 ― 빛이 닿았다. 패널이 사라진 17분의 틈. 햇빛이 논에 쏟아졌다. 벼 잎이 빛을 받았다. 누런 잎 위로 햇빛이 번졌다. 논물이 반짝였다. 수면에 하늘이 비쳤다. 패널이 사라진 하늘. 맑은 하늘. 성호는 그 하늘을 논물 속에서 봤다. 성호는 무릎을 꿇었다. 논둑 위에. 흙 위에. 햇빛이 성호의 얼굴에 닿았다. 따뜻했다. 17분. 17분간의 햇빛. 벼가 빛을 받고 있었다.

6시 29분. 다른 패널이 태양 앞을 지나갔다. 그림자가 돌아왔다. 17분이 끝났다. 성호는 논둑에 무릎을 꿇은 채 어두워지는 논을 봤다.

휴대폰이 울렸다. 은지였다.

“성호야.”

“응.”

“병원에 정전 있었어.”

성호의 손이 멈췄다.

“비상 발전기 돌아갔어. 3초 걸렸어.”

“할머니는?”

“어떤 할머니?”

“인공호흡기 단 할머니.”

“괜찮아. 3초 버텼어. 남편이 손을 잡고 있었어. 할머니가 눈을 떴어. 3초 뒤에.”

성호는 전화를 끊었다. 논을 봤다. 17분 동안 빛을 받은 벼. 벼 잎이 아까보다 조금 더 펼쳐져 있었다. 물에 비친 벼 잎사귀의 윤곽이 햇빛을 받기 전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17분 동안, 벼는 분명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17분. 내일도 17분의 햇빛이 올 것이었다. 모레도. 벼 이삭이 패는 날까지.

성호는 주머니에서 흙을 꺼냈다. 손에 쥐었다. 흙이 따뜻했다. 손바닥에 17분의 빛이 남기고 간 온기였다. 성호는 흙을 논에 뿌렸다. 흙이 논으로 돌아갔다. 성호는 빈 손을 봤다. 그는 빈 손바닥에 남은 흙냄새를 맡았다. 성호는 논둑에 서서 해가 패널 뒤로 사라지는 것을 봤다. 어둠이 내렸다. 벼가 다시 그림자 속에 있었다. 그의 시선 끝, 방금 격추된 패널의 잔해가 첫 새벽의 유성처럼 길게 타오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17분의 햇빛과 3초의 암전 사이에서, 자기 논의 벼와 타인의 생명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선택은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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