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서는 38페이지였다. 도윤은 37페이지까지 채웠다. 1페이지: 신청자 성명, 주민등록번호, 현재 생물학적 나이, 텔로미어 복원 치료 이력. 2페이지: 희망 종결 일시(1순위, 2순위, 3순위). 3페이지: 희망 종결 장소. 4페이지: 종결 방식(약물, 가스, 감각 차단, 기타). 5페이지부터 12페이지: 참석자 명단 및 연락처. 13페이지: 마지막 식사 메뉴. 14페이지: 배경 음악. 15페이지: 유언 녹화 여부. 16페이지부터 30페이지: 재산 처분 계획. 31페이지부터 37페이지: 심리 상담 이력, 종결 동기 자가 진단 체크리스트, 담당 의사 소견서. 체크리스트에는 항목이 47개 있었다. '최근 6개월 이내 즐거운 경험이 있었습니까? ' 도윤은 '예'에 체크했다. 세진이 국밥에 고추를 너무 많이 넣어 기침한 날이 즐거웠다. '죽음 이외의 대안을 고려해 보셨습니까? ' 도윤은 '예'에 체크했다. 퇴직. 여행. 이직. 고려는 했다. 고려만 했다.
38페이지는 '사유'란이었다. 빈칸 하나.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의 빈칸. 도윤은 그 빈칸 앞에서 펜을 들고 있었다.
2071년에 텔로미어 복원 치료가 보편화됐다. 6개월에 한 번 주사를 맞으면 세포의 노화가 멈췄다. 암이 사라졌다. 치매가 사라졌다. 심장 질환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죽지 않게 됐다. 사고사와 자살만 남았다. 인구가 늘었다. 2071년에 82억이었던 세계 인구가 2073년에 97억이 됐다. 죽지 않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차지하고, 집을 차지하고, 도로를 채웠다. 은퇴가 사라졌다. 은퇴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몸은 30대였으므로. 그런데 정신은 달랐다. 몸이 30대여도 70년, 80년, 90년을 산 정신은 피로했다. 살기 싫은 사람이 늘었다. 자살률이 올라갔다. 정부가 대응했다. 2072년. 존엄종결법 제정. 존엄종결부 신설. 살기 싫은 사람이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수 있게 했다. 행정 절차를 거쳐서.
도윤은 존엄종결부 설계과 7년차 공무원이었다. 직급은 6급. 설계과는 신청자의 희망 사항을 듣고 죽음을 설계하는 부서였다. 장소, 시간, 방식, 참석자, 음악, 조명, 온도, 마지막 식사, 관 디자인까지. 죽음에도 기획서가 필요했다. 도윤은 7년간 847건의 죽음을 설계했다. 월 평균 10건에서 12건. 847명이 도윤이 만든 기획서대로 죽었다.
341번 신청자는 63세 남자였다. 생물학적 나이 28세. 텔로미어 복원 치료를 6번 받았다. 몸은 28세였지만 기억은 63년치였다. 남자가 도윤에게 말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죽고 싶어요.”
“산소가 부족한 환경이라 약물 주입 타이밍이 달라집니다. 고도 8,849미터에서는 의식 소실까지 12초 더 걸립니다.”
“괜찮아요. 12초 더 볼 수 있잖아요. 하늘을.”
도윤은 기획서를 작성했다. 에베레스트 정상. 새벽 5시 40분. 일출 직전. 약물: 펜토바르비탈 나트륨 15그램, 고도 보정 농도. 참석자: 없음. 음악: 없음. 바람 소리만. 마지막 식사: 초콜릿 바 1개. 남자는 기획서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3주 뒤 죽었다. 보고서에 도윤이 적었다. '정상 종결. 일출 시각 오차 2분. 바람 풍속 초당 14미터. 신청자 의식 소실 시각 5시 41분 23초. ' 도윤은 그 보고서를 쓸 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남자가 에베레스트에서 죽는 동안 도윤은 서울의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512번 신청자는 40대 여자였다. 생물학적 나이 25세. 초등학교 교실에서 죽고 싶다고 했다. 자기가 다니던 초등학교. 3학년 2반 교실. 창가 세 번째 자리. 도윤이 물었다.
“왜 그 자리인가요?”
“거기 앉아서 밖을 보면 은행나무가 보여요. 가을에 노랗게 물드는 거. 그때가 제일 좋았어요.”
기획서. 서울 마포구 도화초등학교 3학년 2반 교실. 10월 셋째 주 금요일 오후 3시. 은행잎이 가장 노란 시기. 약물: 프로포폴 2밀리그램 킬로그램당, 이후 염화칼륨. 참석자: 없음. 음악: 없음. 방과 후 빈 교실. 마지막 식사: 급식 카레라이스. 여자가 기획서를 읽으며 웃었다. 급식 카레라이스. 여자가 말했다.
“이것까지 해주는 거예요?”
“신청서에 적으신 대로입니다.”
여자는 10월에 죽었다. 도윤은 그날 교실에 함께 있었다. 설계사가 집행에 참관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하지만 도윤은 512번의 집행에 참관했다. 은행나무가 보였다. 창가 세 번째 자리에 앉은 여자의 머리 너머로. 노란 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가 눈을 감았다. 은행잎이 하나 떨어졌다. 도윤은 그 장면을 보고서에 적지 않았다. 보고서에는 숫자만 적었다. 보고서. '정상 종결. 은행나무 낙엽 비율 약 60퍼센트. 교실 온도 22도. 카레라이스 잔량 없음. '
도윤은 847건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의 형식은 같았다. 종결 유형. 시각. 장소 상태. 신청자 의식 소실 시각. 특이 사항. 847번 반복했다. 도윤의 보고서는 정확했다. 오차가 적었다. 설계과에서 오차율이 가장 낮은 설계사였다. 0.7퍼센트. 2등이 2.3퍼센트였으므로 압도적이었다.
도윤은 오늘 아침 출근해서 자기 이름으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온라인 접수. 대기 번호 41,307번. 대기 기간 예상: 14개월. 도윤은 대기 번호를 봤다. 14개월. 14개월 뒤에 자기 신청서가 누군가의 모니터에 뜰 것이었다. 설계과의 다른 설계사가 도윤의 죽음을 설계할 것이었다. 도윤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847건을 설계한 사람의 죽음을 다른 사람이 설계하는 것.
점심시간이었다. 도윤은 구내식당에서 국밥을 먹었다. 옆에 같은 과의 후배 세진이 앉았다. 세진은 3년차였다. 담당 건수 194건.
“선배, 오늘 오후에 상담 하나 있지 않아요? 848번.”
“있어.”
“저도 오후에 하나 있어요. 197번. 우주에서 죽고 싶대요.”
“궤도?”
“아뇨, 달이요. 달 표면.”
“달은 승인까지 6개월 걸려. 우주청 협조 공문 보내야 하고.”
“그래서요. 공문 양식이 어디 있어요?”
“공유 폴더에 있어. 2071년 개정판 써.”
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의 국밥이 식고 있었다. 세진이 국밥을 먹으며 말했다.
“선배는 어디서 죽고 싶어요?”
도윤은 국밥을 떠먹고 있었다. 숟가락이 멈췄다.
“왜?”
“그냥요. 847건 설계하면서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어요?”
도윤은 생각했다. 에베레스트. 초등학교 교실. 제주도 바닷가. 아이슬란드 오로라 아래. 도쿄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한가운데. 847가지 죽음의 장소를 알고 있었다. 도윤이 가고 싶은 장소는 신청서 3페이지에 적혀 있었다. 적혀 있었지만 도윤은 세진에게 말하지 않았다.
“몰라.”
“거짓말.”
세진이 국밥의 파를 건져내며 말했다.
“저는 바다요. 깊은 바다 말고, 발이 닿는 얕은 바다. 파도 소리 들으면서.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거 느끼면서.”
“그건 죽음이 아니라 휴가야.”
“죽음이 휴가면 안 돼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먹어. 식는다.”
오후 2시. 848번 신청자가 상담실에 들어왔다. 70대 여자. 생물학적 나이 30세. 텔로미어 복원 치료 8회. 여자가 의자에 앉았다. 도윤이 맞은편에 앉았다. 책상 위에 여자의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38페이지. 전부 채워져 있었다. 사유란까지.
“신청서 확인했습니다. 몇 가지 여쭤볼게요.”
“네.”
“종결 장소를 '아무 데나'로 적으셨는데, 구체적인 희망이 없으신 건가요?”
여자가 웃었다.
“70년 살았어요. 장소는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빨리 되는 거예요.”
“대기 기간이 있어서 ―”
“14개월이라며요.”
“네.”
“14개월이면 짧은 거예요. 70년 기다렸으니까.”
여자가 창밖을 봤다. 사무실 창밖에 건물들이 보였다. 여자가 말했다.
“저 건물들 중에 제가 지은 것도 있어요. 40년 전에. 건축가였거든요. 그런데 건물보다 제가 더 오래 살게 됐어요. 이상하죠?”
도윤은 여자의 사유란을 봤다. '충분히 살았음. ' 네 글자. 도윤은 그 네 글자를 읽었다. 충분히 살았음. 도윤이 만난 신청자 중 사유란에 가장 짧게 쓴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사유란을 꽉 채웠다.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를 빼곡하게. 외로워서. 지루해서. 같은 아침이 반복돼서.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종결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아서. 바뀌는 세상을 따라갈 수 없어서. 이유는 다양했다. 하지만 도윤이 847건의 사유를 읽으며 느낀 것은 이유의 다양함이 아니라 비슷함이었다. 847개의 사유가 결국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이유는 장식이었다.
도윤은 여자의 기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장소: 미지정, 설계사 재량. 시간: 가능한 빠른 일정. 방식: 약물. 참석자: 없음. 음악: 없음. 마지막 식사: 없음. 관 디자인: 기본형. 기획서가 간단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의 죽음은 설계할 것이 없었다. 도윤은 기획서를 저장했다.
퇴근 시간. 오후 6시. 도윤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다른 직원들이 퇴근했다. 세진이 가방을 메고 나가며 말했다.
“선배, 안 가요?”
“좀 있다가.”
세진이 나갔다. 사무실에 도윤만 남았다. 책상 6개. 의자 6개. 모니터 6대. 설계과 직원이 6명이었다. 도윤이 가장 오래된 직원이었다. 나머지 5명은 모두 3년 이하. 이 직업에서 7년을 버티는 사람은 드물었다. 평균 재직 기간 2.4년. 도윤은 평균의 3배. 도윤은 모니터를 켰다. 자기 신청서를 열었다. 38페이지. 37페이지까지 채워져 있었다. 38페이지. 사유란. 빈칸.
도윤은 1페이지부터 다시 읽었다. 신청자 성명: 강도윤. 생물학적 나이: 31세. 실제 나이: 39세. 텔로미어 복원 치료 2회. 희망 종결 일시: 2073년 봄. 희망 종결 장소: 이 사무실. 존엄종결부 설계과 사무실. 자기 책상. 종결 방식: 약물. 참석자: 없음. 음악: 없음. 마지막 식사: 구내식당 국밥.
도윤은 자기가 쓴 신청서를 읽으며 웃었다. 847건을 설계한 사람의 죽음이 구내식당 국밥이었다. 에베레스트도 아니고, 초등학교 교실도 아니고, 달 표면도 아니고. 사무실 책상 앞에서 국밥 먹고 죽는 것. 도윤은 그것이 웃겼다.
하지만 사유란이 비어 있었다. 도윤은 펜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다시 들었다. 847명의 사유를 알고 있었다. 외로워서. 지루해서. 충분히 살았음. 도윤은 자기 사유를 몰랐다. 외롭지 않았다. 친구가 있었다. 세진이 매일 옆에서 국밥을 먹었다. 지루하지도 않았다. 847개의 죽음은 매번 달랐다. 충분히 살지도 않았다. 39세. 텔로미어 복원 때문에 몸은 31세. 70년을 산 여자가 충분히 살았다고 하는데, 39세는 충분하지 않았다. 도윤은 자기 삶을 돌아봤다.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공무원 시험을 봤다. 존엄종결부에 배치됐다. 처음에는 일반 행정을 할 줄 알았다. 설계과에 배정된 것은 인사팀의 결정이었다. 적성 검사에서 '감정 분리 능력' 점수가 높았다. 상위 3퍼센트.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되 자기 감정과 분리할 수 있는 능력. 설계사에게 필요한 능력이었다. 도윤은 그 능력 덕분에 847건을 설계했다. 그 능력 때문에 자기 사유를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왜.
도윤은 모니터를 봤다. 사유란의 빈칸이 커서와 함께 깜빡이고 있었다. 도윤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847건의 사유를 타이핑한 손이었다. 타인의 사유를 옮겨 적는 것은 쉬웠다. 자기 사유를 적는 것은 달랐다.
도윤은 847건의 기획서를 떠올렸다. 에베레스트의 바람. 초등학교의 은행나무. 제주도 바다의 파도 소리.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847명이 원한 것은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도윤이 설계한 것은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도윤은 847번의 아름다운 죽음을 만들었다. 847번의 아름다운 죽음을 보고서로 기록했다. 정상 종결. 847번.
도윤은 한 번도 아름다운 삶을 설계한 적이 없었다. 죽음만. 사무실에 출근하고, 신청서를 읽고, 기획서를 쓰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국밥을 먹고, 퇴근하고, 다음 날 같은 일을 반복했다. 7년간. 도윤의 하루는 누구의 죽음을 설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누구의 죽음을 보고하는 것으로 끝났다. 매일. 2,555일. 도윤의 집은 사무실에서 지하철로 40분 거리에 있었다. 원룸. 침대, 책상, 냉장고. 냉장고에는 물과 삼각김밥이 있었다. 도윤은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았다. 점심은 구내식당. 저녁은 편의점. 도윤의 삶에는 설계가 없었다. 타인의 죽음에는 기획서를 쓰면서 자기 삶에는 기획서가 없었다. 도윤은 숫자를 좋아했다. 숫자는 빈칸이 없었다.
도윤은 사유란에 타이핑을 시작했다. '847건의 죽음을 설계했습니다. ' 멈췄다. 지웠다. 다시 시작했다. '더 이상 타인의 죽음을 설계하고 싶지 않습니다. ' 멈췄다. 그것은 퇴직 사유지 종결 사유가 아니었다. 지웠다.
전화가 울렸다. 사무실 전화. 도윤이 받았다.
“존엄종결부 설계과입니다.”
“848번 신청자 보호자인데요. 어머니 상담 오늘 하셨죠?”
“네.”
“어머니가 취소하고 싶대요.”
도윤은 수화기를 잡고 있었다.
“취소 사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손주가 태어났대요. 오늘. 어머니가 손주 얼굴을 보고 싶다고. 14개월 뒤에 죽으면 손주가 걸어다닐 때니까. 그때까지는 보고 싶대요.”
도윤은 전화를 끊었다. 848번 파일을 열었다. '신청 취소. 사유: 손주 출생. ' 도윤은 취소 처리를 했다. 847건 중 취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취소율 11퍼센트. 847건의 설계 중 93건이 취소됐다. 취소 사유도 다양했다. 연인이 생겨서. 새로운 취미를 찾아서. 그냥 무서워서. 손주가 태어나서. 도윤은 취소 사유를 읽을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죽으려던 사람이 죽지 않기로 하는 순간. 그 순간에 무엇이 바뀌는 것일까. 848번의 경우 손주가 태어났다. 새로운 생명 하나가 70년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의 결심을 뒤집었다.
도윤은 모니터를 봤다. 자기 신청서의 사유란. 빈칸. 도윤은 848번의 취소 사유를 생각했다. 손주. 도윤에게는 손주가 없었다. 자녀도 없었다. 배우자도 없었다. 도윤에게 새로 태어난 것은 없었다.
밤 9시. 사무실의 형광등이 자동으로 꺼졌다. 센서가 도윤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도윤이 손을 흔들었다. 형광등이 다시 켜졌다. 도윤은 그 동작이 우스웠다.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들어 빛을 되찾는 동작. 살아 있다는 신호. 센서에게 보내는 신호. 도윤은 사무실에서 야근할 때마다 이 동작을 했다. 7년간. 센서의 감지 범위가 좁았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10분마다 꺼졌다. 도윤은 10분마다 손을 흔들었다. 시설 관리팀에 센서 교체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3년 전. 요청이 반려됐다. '현행 센서 정상 작동 중. 교체 사유 불충분. ' 도윤은 항의하지 않았다. 10분마다 손을 흔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나 여기 있어. 아직.
도윤은 의자에 기대앉았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도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 사무실에서 죽겠다고 썼다. 이 책상 앞에서. 이 형광등 아래에서. 847명에게 아름다운 장소를 설계해준 사람이 선택한 장소가 사무실이었다. 도윤은 그것이 솔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에베레스트에 가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는 재개발로 사라졌다. 도윤이 가장 오래 있었던 장소가 이 사무실이었다. 7년간. 2,555일. 매일 8시간. 2만 440시간. 도윤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도윤은 신청서의 13페이지를 다시 열었다. 마지막 식사: 구내식당 국밥. 도윤은 그 줄을 읽으며 배가 고파졌다. 점심에 먹은 국밥이 소화된 시간이었다. 도윤은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밤 9시의 서울.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죽지 않는 사람들. 30대의 얼굴에 70년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 20대의 몸에 90년의 피로를 담은 사람들. 거리에서 스쳐가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 도윤의 모니터에 뜰 수 있었다. 신청서 38페이지와 함께.
도윤은 편의점에 들어갔다. 삼각김밥을 샀다. 참치마요. 도윤이 7년간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이었다. 구내식당 국밥 다음으로.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었다. 밤 공기가 차가웠다. 3월이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도윤이 희망 종결 일시에 '2073년 봄'이라고 적은 이유가 있었다. 봄에 죽고 싶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봄이 좋았다. 847건 중 봄을 선택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31퍼센트. 여름 22퍼센트. 가을 29퍼센트. 겨울 18퍼센트. 죽는 것도 봄이 인기였다.
삼각김밥을 다 먹었다. 손에 밥풀이 묻어 있었다. 도윤은 밥풀을 손가락으로 떼어 먹었다. 일어섰다.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집으로 갈 수도 있었다.
도윤은 사무실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형광등이 도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켜졌다. 모니터가 대기 화면이었다. 마우스를 움직였다. 신청서가 떠 있었다. 38페이지. 사유란.
도윤은 의자에 앉았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타이핑했다. '사유: 사유를 모르겠음. ' 도윤은 그 문장을 읽었다. 읽으며 웃었다. 존엄종결부 설계과 7년차 공무원이 제출한 사유가 '사유를 모르겠음'이었다. 838건의 사유를 읽은 사람이 자기 사유를 모르겠다고 적었다.
도윤은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저장 버튼을 눌렀다. 신청서가 접수됐다. 대기 번호 41,307번. 14개월 뒤에 누군가가 이 사유를 읽을 것이었다. '사유를 모르겠음. ' 그 설계사가 도윤에게 전화를 걸어 물을 것이었다. 사유가 뭔가요. 도윤은 대답할 것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래서 적은 거예요.
형광등이 또 꺼졌다. 도윤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도윤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의 불빛만 도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도윤은 손을 들어 흔들었다. 형광등이 켜졌다. 도윤은 그 동작을 하며 생각했다. 14개월. 14개월 동안 형광등이 꺼질 때마다 손을 흔들 것이었다. 나 여기 있어. 아직. 14개월 뒤에도 손을 흔들고 싶을지는 몰랐다. 848번 신청자의 딸이 전화를 걸어온 것처럼, 14개월 안에 도윤에게도 전화가 올 수 있었다.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도윤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모니터를 끄지 않았다. 신청서가 화면에 떠 있었다. 38페이지. 사유: 사유를 모르겠음. 도윤은 사무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층. 건물 밖. 3월의 밤바람이 도윤의 볼에 닿았다. 차가웠다. 봄은 아직 멀었다. 도윤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삼각김밥 포장지가 남아 있었다. 구겨진 비닐. 도윤은 쓰레기통을 찾았다. 편의점 앞에 있었다. 포장지를 버렸다. 손이 비었다. 도윤은 빈 손을 봤다. 14개월. 14개월간의 밤이 도윤 앞에 놓여 있었다. 매일 밤 형광등이 꺼질 것이고, 도윤은 손을 흔들 것이었다. 그 손이 14개월 뒤에도 흔들리기를 원하는지, 도윤은 아직 몰랐다. 사유란에 적은 대로였다. 모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