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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눈으로 보다

2026. 3. 14. · 9,020자 · 약 11분

타인의 눈으로 보다 썸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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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15번째 리콜을 시작한 것은 수요일 오후 4시 23분이었다. 3년 동안 14건의 리콜을 수행했다. 14건 중 11건에서 용의자의 얼굴이 식별됐다. 11건 중 9건이 유죄 판결로 이어졌다. 리콜 프로토콜의 법정 증거 채택률은 82퍼센트. 재현은 그 82퍼센트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식실의 조명이 청색으로 바뀌었다. 머리 양쪽에 전극이 붙어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귀 뒤까지. 전극 아래 피부가 가려웠다. 재현은 긁지 않았다. 전극이 밀리면 좌표가 틀어진다. 좌표가 틀어지면 기억이 깨진다.

앞에 놓인 배양 접시 안에 뇌세포가 있었다. 사망자 윤정아, 34세, 사인 둔기에 의한 두부 외상. 사망 시각 추정 3월 8일 오전 1시에서 3시 사이. 측두엽 세포 채취 후 72시간 이내 이식 가능. 지금이 채취 후 61시간째. 남은 시간 11시간. 세포가 죽으면 기억도 죽는다.

“배양액 온도 36.4도. 세포 생존율, 안정적입니다.”

기술 보조 한소라가 모니터를 읽었다. 소라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15번째 리콜이었다. 소라에게도, 재현에게도. 둘 다 절차에 익숙했다.

재현은 눈을 감았다. 이식이 시작됐다. 미세 주사기가 재현의 두피를 뚫고 두개골의 미세 구멍을 통해 측두엽에 도달했다. 윤정아의 뇌세포가 재현의 뇌에 주입됐다. 12마이크로리터. 세포 수 약 4만 개. 4만 개의 세포가 재현의 신경망에 접촉하면, 세포에 저장된 시각 기억이 재현의 시각 피질을 통해 재생된다.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본 것을 재현이 보게 된다.

주입 후 대기 시간 8분. 세포가 시냅스를 형성하는 시간. 재현은 눈을 감은 채 기다렸다. 이식실의 공기가 차가웠다. 에어컨이 19도로 설정되어 있었다. 세포 생존에 필요한 온도. 재현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재현은 의자의 팔걸이를 잡았다. 스테인리스 표면이 차가웠다. 손가락이 금속 위에서 미끄러졌다.

기억이 시작됐다.

어둠이었다. 그다음 빛. 가로등 빛. 주황색. 위에서 내려오는 빛. 윤정아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었다. 시야가 좁았다. 밤이었다. 골목이었다. 재현은 윤정아의 시각을 통해 골목을 봤다. 벽에 낙서가 있었다. 파란색 스프레이. 바닥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비가 온 뒤인 것 같았다. 가로등 빛이 물웅덩이에 반사되고 있었다.

윤정아가 걷고 있었다. 시야의 아래쪽에 윤정아의 외투 자락이 보였다. 베이지색. 단추가 하나 풀려 있었다. 바람이 불었는지 자락이 흔들렸다. 재현은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감각에 익숙했다. 14번을 했으므로. 하지만 매번 처음 3초는 어지러웠다. 자기 몸이 아닌 시점에서 세상이 보이는 것. 시야의 높이가 다르고, 초점의 습관이 다르고, 고개를 돌리는 속도가 달랐다. 발소리가 들렸다. 윤정아의 발소리. 운동화가 젖은 아스팔트를 밟는 소리. 가방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윤정아가 끈을 다시 올렸다. 오른손으로. 왼손에는 휴대폰이 있었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시간이 보였다. 12시 47분. 사망 추정 시간대. 재현은 기억 안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기록할 필요가 있었다. 기억은 한 번만 재생된다. 세포가 시냅스를 형성하고 기억을 전달하면 소멸한다. 한 번.

윤정아가 골목 끝에 도달했다. 큰 도로가 보였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색이었다. 윤정아가 멈췄다. 고개를 돌렸다. 왼쪽을 봤다. 편의점이 있었다. 불이 켜져 있었다. 편의점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재현의 심장이 빨라졌다. 이식실의 의자 위에서. 기억 속에서는 윤정아의 심장이었다. 윤정아가 그 사람을 봤다. 편의점 불빛 아래에 서 있는 사람. 후드를 쓰고 있었다. 검은색 후드. 얼굴의 윗부분이 가려져 있었다. 턱과 입만 보였다. 윤정아의 시선이 그 사람의 턱에서 멈췄다. 3초.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후드 아래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가로등 빛이 얼굴을 비췄다.

재현은 그 얼굴을 봤다.

자기 얼굴이었다.

재현의 눈. 재현의 코. 재현의 입. 왼쪽 눈 아래의 점. 오른쪽 귀 위의 흉터. 재현이 매일 거울에서 보는 얼굴이 윤정아의 기억 속에서 재현을 보고 있었다. 재현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단음절. 자기도 모르게. 소라가 재현을 봤다. 재현은 소라를 보지 못했다. 기억이 계속 재생되고 있었으므로. 재현의 손이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스테인리스가 손바닥 아래에서 삐걱거렸다. 재현의 호흡이 빨라졌다. 이식실의 공기가 목구멍을 긁었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

기억이 계속됐다. 윤정아가 그 얼굴을 본 뒤 돌아섰다. 걸음이 빨라졌다. 운동화가 물웅덩이를 밟았다. 물이 튀었다. 윤정아가 뒤를 돌아봤다. 그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재현의 얼굴을 한 사람이.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15미터. 10미터. 윤정아가 뛰기 시작했다. 왼손의 휴대폰을 놓쳤다. 휴대폰이 아스팔트에 떨어졌다. 화면이 깨지는 소리가 시각에서 추정됐다. 윤정아가 뒤를 한 번 더 돌아봤다. 짧게. 0.5초. 그 사이에 얼굴이 다시 보였다. 가로등 빛 아래의 재현의 얼굴. 더 가까웠다. 7미터. 가방이 흔들렸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윤정아의 숨소리. 기억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시각에 연동된 추정 청각이었다. 실제 소리가 아니라 뇌가 시각 정보에서 재구성한 소리. 하지만 충분히 생생했다.

윤정아가 넘어졌다. 무릎이 아스팔트에 닿았다. 시야가 흔들렸다. 바닥이 보였다. 젖은 아스팔트. 가로등 빛이 비친 물. 그 물 위에 얼굴이 비쳤다. 재현의 얼굴. 위에서 내려다보는 재현의 얼굴. 손이 내려왔다.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어두워서 형태가 보이지 않았다. 윤정아의 시야가 좁아졌다. 어둠이 가장자리에서 밀려왔다. 시야가 흔들렸다. 충격. 시야가 사라졌다.

기억이 끝났다.

재현은 눈을 떴다. 이식실의 천장이 보였다. 청색 조명. 재현의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심장이 분당 110회 이상으로 뛰고 있었다.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리콜 종료. 총 재생 시간 4분 12초. 기록 시작합니다.”

소라가 말했다. 태블릿을 들고 재현을 봤다. 기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현이 본 것을 말로 보고하는 절차. 15번의 리콜 동안 14번 수행한 절차.

재현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입 안이 말라 있었다.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

“물 줄까요?”

소라가 물었다.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라가 종이컵에 물을 따라 건넸다. 재현이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재현은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컵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 이식실이 조용했다.

“기록 시작해요.”

소라가 다시 말했다. 태블릿의 녹음 표시등이 빨간색으로 켜져 있었다.

재현은 기억을 정리했다. 골목. 가로등. 편의점. 후드. 얼굴. 자기 얼굴. 재현은 입을 열었다.

“피해자는 12시 47분경 골목을 통해 이동 중이었습니다. 골목 끝 편의점 앞에서 용의자를 목격했습니다. 용의자는 검은색 후드를 착용하고 있었고, 피해자를 추적하여 폭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라가 적고 있었다.

“용의자의 인상착의 특이사항은요?”

재현은 2초 동안 침묵했다.

“후드로 인해 얼굴 식별이 어려웠습니다. 턱 부분만 일부 보였습니다. 남성으로 추정.”

재현은 거짓말을 했다. 3년 동안 처음이었다. 입에서 나온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재현의 혀가 알고 있었다. 혀 끝이 마른 것처럼 갈라진 느낌이었다. 얼굴을 봤다. 자기 얼굴을. 하지만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소라의 태블릿에 녹음되고 있었으므로. 이 녹음은 법정 증거가 된다. 재현이 자기 얼굴을 봤다고 보고하면 재현은 즉시 용의자가 된다. 리콜 기술자가 리콜 도중 자기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하는 것은 절차상 전례가 없었다.

소라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얼굴 식별 불가면 다음 단계는 2차 리콜 요청이네요. 다른 기술자가 남은 세포로 재이식하는 거.”

재현의 등이 차가워졌다. 2차 리콜. 다른 기술자가 같은 기억을 보게 된다. 재현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때는 재현이 통제할 수 없다.

“남은 세포 생존율은?”

재현이 물었다. 목소리를 평평하게 유지했다.

“현재 68퍼센트. 48시간 내에 2차가 가능합니다. 48시간 지나면 생존율이 급감해서 기억 재생이 불가능해요.”

48시간. 재현은 그 숫자를 봤다. 48시간. 윤정아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걸은 시간보다 길었다. 윤정아의 마지막 72시간 중 재현이 본 것은 마지막 4분 12초뿐이었다. 나머지 71시간 55분 48초는 세포와 함께 사라질 것이었다. 48시간 안에 결정해야 했다.

재현은 이식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복도. 형광등 불빛.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바닥에 재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재현은 복도를 걸었다. 화장실로 갔다. 문을 닫았다. 거울을 봤다. 자기 얼굴. 왼쪽 눈 아래의 점. 오른쪽 귀 위의 흉터. 윤정아의 기억 속에서 본 얼굴과 같았다. 같은 점. 같은 흉터. 재현은 세면대 가장자리를 잡았다.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봤다. 이 얼굴이 범인의 얼굴인가. 재현은 자기 얼굴을 3년 동안 14명의 피해자 기억 속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얼굴만 봤다. 낯선 사람들. 범인들. 15번째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봤다. 거울이 아닌 곳에서 자기 얼굴을 보는 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사진과 달랐다. 움직이는 자기 얼굴.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기 얼굴. 도자기가 차가웠다. 손가락이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 재현이 윤정아를 죽였다. 3월 8일 새벽. 재현은 그날 밤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했다. 집에 있었다. 혼자. 아무도 증명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재현의 휴대폰 위치 기록은 집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두고 나갈 수 있었다. 둘, 리콜 오염. 이식 과정에서 재현의 뇌가 기억에 간섭한 것이다. 재현의 자기 이미지가 피해자의 기억 속 용의자 얼굴 위에 덧씌워진 것. 리콜 오염은 이론적으로 가능했다. 학술 논문에 3건의 사례가 보고되어 있었다. 3건 모두 감정적 연루가 있는 경우였다. 기술자가 피해자와 개인적 관계가 있을 때 발생했다.

재현은 윤정아를 몰랐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사건 파일을 오늘 처음 봤다. 윤정아. 반포동 거주. 프리랜서 번역가. 3월 8일 새벽 골목에서 발견됐다. 목격자 없음. 주변 폐쇄회로 카메라 고장. 물증 불충분. 리콜이 유일한 증거 확보 수단이었다. 감정적 연루가 없었다. 오염이 발생할 조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얼굴은 진짜인가. 재현이 진짜 범인인가.

재현은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울 속 얼굴이 재현을 보고 있었다. 윤정아가 마지막으로 본 얼굴과 같은 얼굴이.

재현은 화장실을 나왔다. 사무실로 갔다. 책상에 앉았다. 모니터를 켰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3초. 재현은 손가락을 봤다. 이 손가락이 키보드를 치는 대신 사람을 때린 적이 있는가. 사건 파일을 열었다. 윤정아의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생전 사진. 단발머리. 웃고 있는 사진. 주민등록증 사진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잘라낸 것이었다. 어깨에 다른 사람의 손이 보였다. 잘려 나간 손. 재현은 사진을 봤다.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재현의 얼굴이었다. 재현은 모니터를 껐다.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이전 리콜 기록 파일이 있었다. 14건. 재현은 14건의 리콜에서 한 번도 오염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14번 모두 피해자의 기억이 깨끗하게 재생됐다. 오염 없이. 15번째에서 갑자기 오염이 발생할 확률은 낮았다. 낮았지만 0은 아니었다.

재현은 의자에 기대앉았다. 천장을 봤다. 사무실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48시간. 2차 리콜이 진행되면 다른 기술자가 재현의 얼굴을 본다. 재현은 용의자가 된다. 2차 리콜을 막을 수 있는 방법. 남은 세포를 폐기하는 것. 배양 접시의 온도를 올리면 세포가 죽는다. 기억이 사라진다. 증거가 사라진다.

재현은 이식실의 출입 기록을 확인했다. 야간에는 이식실에 사람이 없었다. 배양 접시는 항온기 안에 있었다. 항온기의 온도를 36도에서 42도로 올리면 6시간 안에 세포가 죽는다. 재현의 출입 카드로 이식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기록이 남지만, 장비 점검 명목으로 들어갔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재현은 시계를 봤다. 오후 6시 14분. 소라가 퇴근하는 시간은 7시. 야간 근무자는 10시에 교대. 7시에서 10시 사이에 이식실은 비어 있다. 3시간. 항온기 온도를 올리고 나오면 된다. 아침에 세포 사망을 확인하면 2차 리콜은 불가능해진다. 기억이 영구히 소멸한다.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1층으로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3월의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재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걸었다. 건물 주변을 돌았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번째 바퀴를 돌 때 재현의 발이 멈췄다. 담배를 피우는 경비원이 주차장 입구에 서 있었다. 경비원이 재현을 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도 끄덕였다. 경비원이 담배를 문 채 고개를 돌렸다. 재현은 경비원 옆을 지나갔다. 담배 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건물 뒤편의 주차장이었다. 가로등이 있었다. 주황색 빛. 바닥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어제 비가 왔으므로. 가로등 빛이 물웅덩이에 반사되고 있었다.

윤정아의 기억과 같았다. 가로등. 물웅덩이. 주황색 빛의 반사. 재현은 물웅덩이 앞에 섰다. 물 위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일그러진 얼굴. 가로등 빛에 주황색으로 물든 얼굴. 재현은 물웅덩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물 위에 가로등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윤정아도 이 빛 아래를 걸었다. 재현은 물웅덩이를 봤다. 윤정아도 이런 물웅덩이를 밟으며 걸었다. 윤정아도 이런 가로등 아래에서 재현의 얼굴을 봤다.

재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켰다. 시간이 보였다. 오후 7시 3분. 소라가 퇴근한 시간. 이식실이 비어 있을 시간. 재현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건물 뒤편 출입구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갔다. 3층. 이식실이 있는 층. 복도에 사람이 없었다. 재현은 출입 카드를 찍었다. 문이 열렸다. 이식실 안으로 들어갔다.

항온기가 벽 쪽에 있었다. 녹색 표시등이 켜져 있었다. 온도 표시: 36.4도. 배양 접시가 안에 있었다. 윤정아의 뇌세포. 재현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세포. 재현은 항온기 앞에 섰다. 온도 조절 다이얼이 왼쪽에 있었다. 돌리면 됐다. 36에서 42로. 손가락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건물에서 가장 간단한 동작. 재현은 자기 손을 봤다. 이 손이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손이 증거를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6시간 뒤 세포가 죽는다. 기억이 죽는다. 증거가 죽는다.

재현의 손이 다이얼 위에 올라갔다. 손가락이 금속 다이얼을 잡았다. 차가웠다. 재현은 다이얼을 잡은 채 멈춰 있었다. 2초. 5초. 10초. 항온기의 모터 소리가 낮게 울리고 있었다. 일정한 소리. 세포를 살리는 소리.

재현이 다이얼을 돌리면 윤정아의 기억이 사라진다. 진범을 특정할 증거가 사라진다. 재현이 범인이 아니라면, 재현은 증거를 인멸하고 진범을 풀어주는 것이 된다. 재현이 범인이라면, 재현은 자기 범죄를 은폐하는 것이 된다. 어느 쪽이든 윤정아의 마지막 기억은 영영 사라진다.

재현은 다이얼에서 손을 뗐다.

재현은 항온기 앞에 서서 배양 접시를 봤다. 유리 너머로 세포 배양액이 보였다. 투명한 액체. 그 안에 윤정아의 세포가 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세포. 4만 개 중 남은 것. 재현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들. 재현은 배양 접시를 봤다. 이 세포들이 진실을 가지고 있었다. 재현이 범인인지 아닌지. 오염인지 실제인지. 답이 이 세포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 답을 확인하려면 2차 리콜을 해야 했다. 다른 기술자의 뇌에 이 세포를 넣어야 했다. 그 기술자가 재현의 얼굴을 보면, 재현의 삶은 끝난다. 보지 못하면, 오염이 증명되고 재현은 자유롭다.

재현은 항온기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면서 밀폐음이 났다. 작은 공기 소리. 세포가 살아 있는 소리.

이식실을 나왔다. 복도. 형광등. 재현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재현은 사무실로 돌아갔다. 책상에 앉았다. 모니터를 켰다. 2차 리콜 요청서 양식을 열었다. 커서가 양식의 첫 번째 칸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리콜 사유'. 재현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타이핑하지 않았다.

재현은 서랍을 열었다. 14건의 리콜 기록. 14명의 피해자. 14명의 마지막 기억을 재현이 봤다. 14번 모두 재현은 진실을 보고했다. 본 것을 그대로 말했다. 15번째에서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얼굴을 봤는데 보지 못했다고 했다. 재현은 14건의 파일을 봤다. 종이 파일의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여러 번 넘긴 흔적.

재현은 파일을 닫았다. 서랍을 닫았다. 모니터를 봤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재현은 타이핑을 시작했다.

'1차 리콜 결과 용의자 얼굴 식별 불충분. 2차 리콜을 요청합니다. 사유: 기억 재생 중 시각 정보의 해상도가 낮아 인상착의 특정 불가. '

재현은 엔터를 눌렀다. 요청서가 제출됐다. 취소할 수 없었다. 시스템이 자동으로 다음 가용 기술자에게 배정한다. 재현은 누가 배정될지 몰랐다. 재현이 아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동료일 수도. 화면에 '접수 완료'가 떴다. 2차 리콜은 48시간 내에 진행된다. 다른 기술자가 윤정아의 세포를 이식받는다. 윤정아의 마지막 기억을 본다. 그 기술자가 재현의 얼굴을 보면 재현의 거짓말이 드러난다. 보지 못하면 1차 리콜이 오염이었음이 증명된다.

재현은 모니터를 껐다. 사무실이 어두워졌다. 창으로 가로등 빛이 들어왔다. 주황색. 윤정아의 기억 속 가로등과 같은 색. 재현은 의자에 앉아 그 빛을 봤다. 48시간 뒤에 답이 나온다. 재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재현은 떨리는 손을 봤다. 이 손이 윤정아를 때린 적이 있는지 없는지, 재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가로등 빛이 책상 위의 손을 비추고 있었다. 손등의 정맥이 빛 아래에서 파랗게 보였다. 재현은 손을 뒤집었다. 손바닥을 봤다. 손바닥 한가운데에 작은 굳은살이 있었다. 펜을 오래 잡아서 생긴 것이었다. 리콜 기록을 적을 때 생긴 것. 14명의 기억을 기록하면서 생긴 흔적. 재현은 그 굳은살을 엄지로 눌러 봤다. 단단했다. 손금이 주황색 빛에 물들어 있었다. 이 손이 무엇을 했는지, 48시간 뒤에 알게 된다.

기억 속 범인의 얼굴이 자기 자신일 때,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용의자 자리에 놓는 선택은 용기인가 자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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