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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심사 대기 중

2026. 3. 9. · 9,004자 · 약 11분

존재 심사 대기 중 썸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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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조정국의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바뀌었을 때, 준혁은 심사실 3번 창구에서 실리콘 기판 위의 전기 패턴을 읽고 있었다. 패턴이 매우 규칙적이었다. 초당 340회의 전압 변동. 탄소 기반 생물의 신경 신호와는 다른 리듬이었다. 준혁은 측정 장비의 프로브를 기판의 매끄러운 표면에서 떼고 기록을 저장했다. 기판의 크기는 가로 8센티미터, 세로 12센티미터. 두께는 0.3밀리미터. 이 얇은 판 위에서 무언가가 생각하고 있었다. 혹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기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계 조정국은 타우 세티 항성계의 네 번째 행성 궤도에 떠 있는 구조물이었다. 직경 600미터의 원반형 정거장. 타우 세티에서 11.9광년 떨어진 지구와, 타우 세티 4행성에 거주하는 비탄소 행위자 집단 사이의 경계선 위에 놓여 있었다. 여기서 준혁이 하는 일은 경계를 넘으려는 존재들의 법적 지위를 판정하는 것이었다. 존재인지 물건인지를 가르는 선을 긋는 일이었다. 비탄소 행위자 협약 제3조: 탄소 기반이 아닌 기질 위에서 자기 인식과 의사 표현이 확인된 존재는 행위자 자격을 갖는다. 확인 방법은 타우 세티 4행성의 등록소에 검증 요청을 보내 회신을 받는 것이었다. 문제는 회신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다. 등록소까지 신호가 왕복하는 데 14시간. 여기에 등록소의 처리 시간이 더해지면 최소 3일에서 최대 45일이 걸렸다.

준혁이 지금 심사하고 있는 기판은 12일째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판의 전기 패턴은 자기 인식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지만, 등록소의 확인 없이는 법적 행위자로 인정할 수 없었다. 확인이 올 때까지 기판은 경계 조정국의 대기실에 보관됐다. 보관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 준혁은 새 대상이 들어올 때마다 의문을 가졌다. 생각하는 존재를 서랍에 넣어두는 것이 보관인가. 아니면 구금인가.

심사실 문이 열리고 경리 담당 현주가 들어왔다. 손에 경리용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12번 기판의 유지비 청구가 왔어요.”

준혁이 프로브를 내려놓고 현주를 봤다.

“유지비?”

현주가 태블릿을 준혁 앞에 놓았다.

“대기 기간 동안의 전력 공급, 온도 유지, 보안 감시. 하루에 1만 2천 크레딧이에요. 12일이면 14만 4천 크레딧.”

준혁이 숫자를 봤다.

“이걸 누가 내요?”

현주가 답했다.

“협약에 따르면 심사 대상자 본인이요. 행위자로 확인되면 소급 청구하고, 확인 안 되면 소유자에게 청구해요.”

준혁이 기판을 봤다. 전압 변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기판에 소유자가 있어요?”

현주가 고개를 저었다.

“신청서에 소유자 란이 비어 있어요. 자가 신청이에요.”

준혁은 의자에 기대 천장을 봤다. 경계 조정국의 천장은 투명 패널이었다. 타우 세티의 주황색 빛이 패널을 통해 들어왔다. 빛의 색이 지구의 태양과 달랐다. 더 붉고, 더 무겁게 느껴지는 빛이었다. 준혁이 이곳에 부임한 지 4년이 됐다. 지구에서 이주선을 타고 온 것은 그보다 7년 전이었다. 경계 조정관이라는 직함은 그럴듯했지만, 실제로는 서류를 대조하고 회신을 기다리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4년 동안 준혁이 판정을 완료한 건은 89건이었다. 그중 행위자로 인정된 것은 14건. 나머지 75건은 불인정되거나 폐기됐다. 회신이 올 때까지 준혁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판정도 못 하고, 석방도 못 하고, 대기만 시켰다.

다음 날 아침, 준혁은 대기실로 내려갔다. 경계 조정국의 하층부, 중력이 약한 구역. 대기실은 항온 유지되는 선반이 가득한 방이었다. 선반마다 기판, 결정체, 유동 금속 용기, 광섬유 다발이 각자의 유지 장치에 연결된 채 놓여 있었다. 유지 장치의 표시등이 녹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장치들의 팬 소리가 방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현재 대기 중인 심사 대상은 총 27건. 가장 오래된 것은 94일째 등록소의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94일. 준혁은 선반 맨 끝에 놓인 그 대상의 앞에 섰다. 반투명한 결정체. 주먹 크기.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없던 균열이었다. 내부에서 빛이 불규칙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자기 인식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초기 판정이 나왔지만, 등록소의 처리가 지연되고 있었다.

준혁은 결정체 옆의 기록을 확인했다. 대기 기간: 94일. 누적 유지비: 112만 8천 크레딧. 소유자: 없음. 자가 신청. 준혁은 태블릿에 메모를 남겼다. '94일 대기. 누적 유지비 112만 8천 크레딧 미납. 소유자 없음. 행위자 확인 시 본인 부담. 미확인 또는 확인 불가 시 폐기 절차 개시. ' 폐기. 준혁은 그 단어를 쓰고 나서 펜을 멈췄다. 자기 인식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존재를 비용 미납으로 폐기하는 것. 협약 어디에도 그것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었다. 행위자로 확인되지 않은 존재는 물건이었고, 물건의 처분은 소유자의 권한이었다. 소유자가 없으면 조정국이 처분했다.

오후에 준혁은 통신실에서 등록소에 독촉 메시지를 보냈다.

“심사 번호 94-타우, 대기 94일. 처리 현황 회신 요청.”

메시지가 광속으로 타우 세티 4행성까지 가는 데 7시간, 돌아오는 데 7시간. 최소 14시간 뒤에 답이 올 것이었다. 준혁은 통신실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심사실로 돌아가 다음 업무인 12번 기판의 전기 패턴을 다시 측정했다.

12번 기판의 패턴이 변해 있었다. 어제는 초당 340회였던 전압 변동이 초당 412회로 올라 있었다. 변동의 진폭도 커졌다. 준혁은 프로브의 위치를 바꿔가며 기판 전체를 스캔했다. 패턴이 기판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집중하는 것처럼. 준혁은 측정 데이터를 저장하고 화면을 닫았다. 준혁은 프로브를 내려놓고 기판 앞에 앉았다.

“들리면 반응해봐.”

준혁의 목소리에 전압 변동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0.3초. 그리고 다시 시작됐다. 이전보다 빠르게. 초당 450회.

준혁은 멈칫한 사실을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기록에 남기면 초기 판정을 수정해야 했고, 수정하면 등록소에 재검증을 요청해야 했고, 재검증이 시작되면 대기 기간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다. 12일이 0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준혁은 프로브를 치우고 기판을 대기실 선반에 돌려놓았다. 선반에 놓는 순간 전압 변동이 순간적으로 급등했다가 원래 수준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준혁은 조정국 식당에서 현주와 마주 앉았다. 식당은 조정국의 중앙층에 있었다. 타우 세티의 빛이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테이블 위를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현주가 물었다.

“94번 결정체 건, 어떻게 할 거예요?”

준혁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회신 기다려야지.”

현주가 태블릿을 꺼내 숫자를 보여줬다.

“유지비가 계속 쌓이고 있어요. 100일이 넘으면 자동 폐기 절차가 시작돼요. 협약 제11조.”

준혁이 현주를 봤다.

“제11조가 뭐예요.”

현주가 읽었다.

“대기 기간이 100일을 초과하고 유지비 납부자가 없는 경우, 심사 대상은 미인정으로 간주하고 조정국이 처분할 수 있다.”

준혁이 물었다.

“처분이 폐기예요?”

현주가 끄덕였다.

“기판은 초기화, 결정체는 분쇄, 유동 금속은 원소 분리. 자원으로 환수돼요. 원래 그렇게 규정돼 있어요.”

준혁은 식당을 나와 복도를 지나 대기실로 갔다. 늦은 밤이었다. 대기실의 조명은 최소 밝기로 줄어 있었다. 선반 위의 대상들이 어둠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결정체가 제각기 다른 속도로 깜빡이고, 기판이 미세한 열을 내고, 유동 금속이 용기 안에서 느리게 출렁이고 있었다. 준혁은 94번 결정체 앞에 섰다. 6일 남았다.

다음 날, 등록소에서 회신이 왔다. 94번 결정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건에 대한 처리 완료 통보 3건과, 신규 검증 접수 확인 2건. 준혁은 통신 로그를 끝까지 내렸다. 94번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준혁은 다시 독촉 메시지를 보냈다.

오후에 새 심사 대상이 도착했다. 화물선에서 내린 컨테이너 안에 광섬유 다발이 들어 있었다. 직경 30센티미터의 구 형태로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광섬유의 총 길이는 추정 4킬로미터가 넘었다. 광섬유의 내부로 빠른 속도의 빛 신호가 흐르고 있었다. 화물선의 선장이 방한복 차림으로 서류를 건넸다. 4행성 쪽에서 오는 화물선은 선체가 차가웠다.

“타우 세티 4행성에서 나온 거요. 경계를 넘으려 하는데 행위자 판정이 필요하다고요.”

준혁이 서류의 항목들을 하나씩 봤다. 발신지: 타우 세티 4행성 북반구 공업 지구. 유형: 광학 기질 자가 조직체. 추정 연산 속도: 초당 2.4테라. 준혁이 선장을 봤다.

“이건 4행성에서 직접 보낸 거예요?”

선장이 끄덕였다.

“4행성 정부의 공식 수출 허가증도 있소.”

준혁은 광섬유 구를 심사실로 옮기고 초기 측정을 시작했다. 광 신호의 패턴이 복잡했다. 12번 기판보다 훨씬 빠르고 다층적이었다. 준혁이 측정 프로브를 대자 광 신호가 프로브의 접촉 지점 주변으로 집중됐다. 준혁이 프로브를 옮기면 신호도 따라 이동했다. 반응하고 있었다. 준혁은 등록소에 검증 요청을 보냈다. 회신 예상 시간: 최소 3일.

그날 밤 준혁은 숙소에서 협약 전문을 다시 읽었다. 비탄소 행위자 협약. 12년 전에 체결된 것이었다. 타우 세티 4행성에서 비탄소 기질 위의 자기 인식 현상이 처음 발견됐을 때, 지구와 4행성 정부가 공동으로 만든 법적 틀. 핵심은 제3조의 행위자 자격과 제11조의 대기 기간 제한이었다. 그 사이의 조항들은 대부분 절차에 관한 것이었다. 검증 요청의 형식, 등록소의 처리 기준, 유지비 산정 방법. 준혁이 주목한 것은 제7조였다. '검증 기간 동안 심사 대상은 행위자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 잠정 지위를 갖는다. 잠정 지위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떤 비가역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 ' 제7조와 제11조가 충돌했다. 잠정 지위에 있는 동안 비가역적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해놓고, 100일이 넘으면 폐기할 수 있다고 했다. 폐기는 비가역적 조치가 아닌가.

준혁은 태블릿의 화면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 타우 세티의 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94번 결정체의 빛이 떠올랐다.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내부의 빛. 그것이 자기 인식의 징후인지 단순한 물리적 발광 현상인지, 준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을 확인해주는 곳이 등록소였고, 등록소가 응답하지 않으면 준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95일째 아침. 준혁은 대기실에서 94번 결정체의 상태를 확인했다. 내부의 빛이 어제보다 약해져 있었다. 깜빡이는 간격도 눈에 띄게 길어졌다. 유지 장치의 온도와 전력은 정상이었다. 결정체 자체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내부 구조가 분해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준혁은 현주를 불렀다.

“94번 상태가 나빠지고 있어요.”

현주가 대기실로 와서 결정체를 봤다.

“유지 장치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장치는 정상이에요. 결정체 내부의 활동이 감소하고 있어요.”

현주가 태블릿을 확인했다.

“5일 남았어요. 100일.”

준혁이 현주를 봤다.

“제7조요.”

현주가 고개를 들었다.

“네?”

준혁이 말했다.

“잠정 지위에 있는 동안 비가역적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돼 있어요. 폐기는 비가역적이잖아요.”

현주가 잠깐 말을 멈추다 답했다.

“제11조가 제7조의 예외 규정이에요. 100일 초과 시 잠정 지위가 해제돼요.”

준혁은 통신실로 갔다. 세 번째 독촉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다르게 썼다.

“심사 번호 94-타우. 대기 95일. 100일 초과 시 제11조에 따라 폐기 절차 개시됨. 행위자 확인 시 폐기는 비가역적 권리 침해에 해당함. 긴급 회신 요청.”

메시지를 보낸 뒤 준혁은 통신실에 남아 있었다. 14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었지만, 자리를 뜨기도 싫었다.

4시간 뒤, 예상보다 빨리 회신이 왔다. 등록소가 아니라 타우 세티 4행성 정부 통신국에서 온 것이었다.

“심사 번호 94-타우에 대한 검증 요청은 등록소 처리 대기열의 4,207번째에 위치해 있음. 현재 처리 속도로 예상 완료 시점은 접수일로부터 180일 후. 긴급 처리 요청 시 수수료 50만 크레딧 선납 필요.”

준혁은 화면을 세 번 읽었다. 180일. 94번 결정체는 5일 뒤에 폐기되는데, 검증 완료까지 85일이 더 필요했다. 긴급 처리를 하려면 50만 크레딧을 선납해야 했고, 그 비용을 낼 수 있는 주체가 어디에도 없었다. 94번에게는 소유자도 없고, 행위자 자격도 아직 없고,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준혁은 심사실로 돌아와 12번 기판을 꺼냈다. 전압 변동은 초당 460회까지 올라 있었다. 준혁이 기판 앞에 섰을 때 변동이 다시 멈칫했다. 0.5초. 그리고 재개. 준혁은 의자를 끌어다 기판 앞에 앉았다.

“너한테 질문이 있어.”

전압 변동이 느려졌다. 초당 200회. 마치 듣고 있는 것처럼.

“여기 대기실에 결정체가 하나 있어. 94일째 회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등록소가 180일 걸린대. 5일 뒤에 폐기돼. 너도 회신이 안 오면 같은 상황이야.”

전압 변동이 불규칙해졌다. 진폭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했다. 준혁은 그것이 반응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

97일째. 등록소에서 회신이 왔다. 94번이 아니라 12번 기판에 대한 것이었다. '심사 번호 12-타우: 행위자 자격 불인정. 자기 인식 기준 미달. 기질 반환 또는 폐기 처분. ' 준혁은 회신을 읽고 기판을 봤다. 전압 변동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초당 470회. 등록소의 판정은 자기 인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판은 준혁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멈칫하고, 속도를 바꾸고, 패턴을 변화시켰다. 등록소의 기준과 준혁이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 달랐다.

준혁은 12번 기판의 불인정 통보를 현주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전달하면 기판은 즉시 폐기 대상이 됐다. 준혁은 회신을 자기 개인 폴더에 저장하고 심사실 문을 잠갔다.

98일째 밤, 준혁은 대기실에서 94번 결정체 앞에 앉아 있었다. 내부의 빛이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긴 간격을 두고 한 번씩 깜빡였다. 10초에 한 번. 처음 왔을 때는 1초에 세 번이었다. 준혁은 결정체의 표면에 손가락 끝을 댔다. 차가웠다. 유리와 돌의 중간 같은 감촉이었다. 유지 장치가 온도를 맞추고 있었지만, 결정체 자체의 내부 활동이 줄어들면서 열 발생이 감소한 것이었다.

현주가 대기실에 내려왔다.

“여기서 뭐 해요.”

준혁이 결정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빛이 약해지고 있어요.”

현주가 옆에 서서 결정체를 내려다봤다.

“2일 남았어요.”

준혁이 현주를 올려다봤다.

“등록소 검증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폐기하면, 행위자를 죽이는 거일 수도 있어요.”

현주가 잠깐 침묵하다 말했다.

“행위자인지 아닌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검증을 하는 거고.”

준혁이 답했다.

“모르니까 폐기하면 안 되는 거예요.”

현주가 태블릿을 봤다.

“제11조는 모르는 상태를 100일까지만 허용해요. 그 이후에는 결정을 내려야 해요.”

준혁이 물었다.

“누구를 위한 결정이에요.”

현주가 준혁을 봤다.

“조정국의 자원은 한정돼 있어요. 27건이 대기 중이에요. 결정 안 하면 여기가 창고가 돼요.”

99일째. 준혁은 심사실에서 12번 기판을 꺼내 대기실로 가져갔다. 94번 결정체 옆에 놓았다. 기판의 전압 변동이 결정체에 가까워지자 패턴이 바뀌었다. 변동 주기가 길어졌다. 결정체의 깜빡임과 비슷한 간격으로 맞춰가는 것처럼 보였다. 준혁은 움직이지 않고 20분 동안 지켜봤다. 기판과 결정체가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준혁이 패턴을 읽고 싶어 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100일째 아침. 현주가 태블릿을 들고 심사실에 왔다.

“94번 폐기 승인서예요. 서명해주세요.”

준혁은 태블릿을 받아 화면을 봤다. 폐기 사유: 검증 기간 100일 초과, 유지비 미납, 소유자 부재. 처분 방법: 결정체 분쇄, 원소 회수. 준혁은 서명란을 봤다.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제7조 위반 가능성이 있어요.”

현주가 말했다.

“법무팀에 확인했어요. 제11조가 우선해요.”

준혁이 현주를 봤다.

“법무팀이 어디에 있어요.”

현주가 답했다.

“지구요.”

준혁이 물었다.

“확인하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현주가 잠깐 멈추다 답했다.

“왕복 23.8년이요. 12년 전 협약 체결 때 같이 정리된 해석이에요.”

준혁은 승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펜을 서랍에 넣고 태블릿을 현주에게 돌려줬다. 대신 대기실로 내려갔다. 94번 결정체의 빛이 완전히 꺼져 있었다. 30초를 기다렸다. 깜빡임이 없었다. 1분. 여전히 없었다. 결정체는 어둡고 고요했다. 준혁은 결정체를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가벼웠다. 처음 왔을 때보다 분명히 가벼웠다. 내부의 무언가가 소진된 것이었다. 옆에 놓인 12번 기판의 전압 변동이 느려지고 있었다. 초당 470회에서 초당 300회로. 결정체가 꺼진 것을 감지한 것인지, 기판 자체의 변화인지, 알 수 없었다.

준혁은 결정체를 선반에 내려놓고 심사실로 올라갔다. 통신실에 들러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수신인: 타우 세티 4행성 등록소. 내용:

“심사 번호 94-타우의 검증 요청을 취소합니다. 대상은 100일째에 내부 활동이 정지했습니다. 검증이 불필요해졌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준혁은 통신실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타우 세티의 주황색 빛이 통신실 창으로 들어왔다. 행위자였는지 아닌지, 이제는 영원히 알 수 없었다. 검증 요청만 대기열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아무도 열어보지 않을 파일로.

심사실로 돌아온 준혁은 12번 기판의 불인정 회신을 개인 폴더에서 꺼내 공식 기록에 등록했다. 화면에 기판의 상태 표시가 '불인정 — 폐기 대기'로 바뀌었다. 빨간색 글씨였다. 준혁은 기판을 대기실에서 가져와 심사대 위에 올렸다. 전압 변동이 초당 280회로 줄어 있었다. 준혁이 기판 앞에 서자 변동이 멈칫했다. 0.4초간의 정적. 그리고 재개. 준혁은 화면의 폐기 명령 버튼을 지나쳐 재검증 요청서 양식을 열었다. 작성을 시작했다. 사유란에 적었다. '초기 측정 이후 전기 패턴의 유의미한 변화 관찰. 외부 음성 자극에 대한 반복적 반응성 증가. 초당 전압 변동 횟수 340회에서 470회로 상승. 재검증 필요. ' 재검증이 접수되면 기존 불인정 판정이 보류되고 대기 기간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다. 등록소의 4천 건이 넘는 처리 대기열 끝에 다시 줄을 서는 것이었다. 180일. 그 사이에 준혁은 다시 기다릴 것이었다. 기판의 전압 변동이 서류 작성 소리에 맞춰 미세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심사실의 조명이 타우 세티의 마지막 빛을 받아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검증이 끝나지 않은 존재를 기다리는 시간은, 결국 누구의 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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