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는 매머드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낮고 길게 울리는 소리가 아직 고막 안에 남아 있었다. 윤서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봤다. 하얀 천장이었다. 자기 방이었다. 시계가 새벽 4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서는 숨을 내쉬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양손을 들어 봤다. 손끝에 흙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실제로 흙을 만진 것이 아니었다. 꿈에서 만진 흙이었다. 차갑고 축축한, 동굴 바닥의 흙. 그 감촉이 깨어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윤서는 일어나 세면대로 갔다. 물을 틀었다. 손을 씻었다. 비누를 문질렀다. 흙의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거울을 봤다. 자기 얼굴이 비쳤다. 눈 밑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입술이 말라 있었다. 윤서는 거울 속의 자기 눈을 봤다. 동공이 평소보다 컸다. 어둠에 적응한 눈. 동굴 안의 어둠에 적응한 눈이었다. 윤서는 세면대의 물을 잠그고 손을 닦았다. 수건에서 세제 냄새가 났다. 4만 년 전에는 없는 냄새였다. 윤서는 그 생각을 하고 멈칫했다. 4만 년 전. 왜 그 시간이 기준이 되는지. 윤서는 욕실 불을 켰다. 눈이 찔리듯 아팠다. 윤서는 눈을 감았다. 불을 끈 뒤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이식 수술을 받은 것은 8개월 전이었다. 윤서의 미토콘드리아에 이상이 생긴 것은 2년 전. 미토콘드리아 질환. 세포가 에너지를 만들지 못했다. 근육이 약해졌다. 심장이 느려졌다. 간 기능이 떨어졌다. 의사가 말했다. 이식을 하지 않으면 3년 안에 장기부전이 올 것이라고.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4만 년 전 멸종한 종에서 추출한 유전자. 세포 에너지 효율이 340퍼센트 상승한다. 임상 3상을 통과했다. 부작용은 보고되지 않았다.
윤서는 수술 전날 동의서에 서명했다. 동의서에는 부작용 항목이 있었다. 두통, 발열, 근육통. 가벼운 것들이었다.
“수면 관련 부작용”
이라는 항목은 없었다. 윤서는 서명하고 병실에 누웠다. 수술은 4시간 걸렸다. 전신 마취. 깨어났을 때 목이 말랐다. 간호사가 물을 줬다. 삼키는 것이 가능했다. 윤서는 살아 있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수술 후 2주 만에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한 달 뒤 달릴 수 있었다.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간 수치가 안정됐다. 윤서는 2년 만에 출근했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였다. 몸이 돌아온 것이었다. 윤서는 살아 있었다.
꿈이 시작된 것은 수술 후 6개월째였다. 처음에는 흐릿했다. 넓은 평원. 풀 냄새. 바람 소리. 윤서는 그것을 그냥 꿈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꾼다. 하지만 꿈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에서 깨면 잊혀졌다. 일주일 뒤, 꿈의 잔상이 아침까지 남았다. 평원의 풀이 바람에 눕는 모습이 눈을 뜬 뒤에도 천장에 겹쳐 보였다. 윤서는 눈을 비볐다. 사라졌다. 다음 날은 사라지는 데 3초가 걸렸다. 그 다음 날은 5초. 2주 뒤, 윤서는 꿈에서 동굴 안에 있었다. 바닥에 흙이 깔려 있었다. 벽에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횃불이었다. 횃불의 연기 냄새가 났다. 나무가 타는 냄새. 기름진 연기. 윤서의 코가 그 냄새를 맡았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코끝에 연기 냄새가 남았다.
3주 뒤, 꿈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이마가 낮고 눈두덩이 두꺼운 얼굴들. 넓은 코. 짧고 굵은 손가락. 그들이 동굴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돌을 깎고 있었다.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윤서는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들 중 하나로 서 있었다. 윤서의 손이 돌을 잡고 있었다. 윤서의 손이 아니었다. 짧고 굵은 손가락. 손등에 굵은 털이 나 있었다. 윤서는 그 손으로 돌을 깎았다. 부싯돌이었다. 한 면을 다른 돌로 내리쳤다. 날카로운 파편이 떨어졌다. 돌의 결을 읽는 감각이 있었다. 어디를 치면 어떤 모양으로 쪼개지는지 이 손은 알고 있었다. 석기를 만들었다. 손에 기술이 있었다. 윤서가 배운 적 없는 기술이었다. 깨어났을 때 윤서는 자기 손을 봤다. 가늘고 긴 손가락. 자기 손이었다. 그런데 돌을 깎는 감촉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윤서는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증상을 말했다. 꿈에서 동굴을 본다고. 매머드 소리를 듣는다고. 깨어난 뒤에도 감각이 남는다고. 주치의가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같은 증상을 보고한 환자가 3명 더 있다고. 모두 이식 후 6개월 이후에 시작됐다고.
윤서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창밖을 봤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윤서의 눈에는 아이들 뒤로 빙하기의 평원이 겹쳐 보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매머드의 울음소리가 섞였다.
“...기억 말인가요? 유전자 안에, 그런 게 있을 수 있다는 건가요?”
주치의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글쎄요. 미토콘드리아는 모계를 통해서만 전달되니까요. 수만 년 동안. 그래서 유전자에 감각 패턴 같은 게 각인될 수 있다는 가설은 있었습니다. 물론, 증명된 적은 없고요. 환자분들이 첫 사례가 될 수도 있겠군요.”
“잠깐만요. 그럼 이 꿈이... 진짜 4만 년 전 기억이라는 말씀이세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식 유전자가 뇌의 수면 회로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겁니다. 수면 중 뇌파를 분석하면 피질에서 비정상적인 활성화가 관찰돼요. 특히 후각과 청각 관련 영역에서.”
윤서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앉았다. 4만 년 전의 기억. 네안데르탈인의 기억. 윤서의 몸 안에 이식된 유전자가 뇌에 그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윤서는 자기 손바닥을 봤다. 이 손이 4만 년 전에 돌을 깎았다. 이 코가 매머드의 숨결 냄새를 맡았다. 이 귀가 동굴 안의 반향을 들었다. 윤서의 세포 안에서, 멸종한 종이 깨어나고 있었다.
7개월째, 꿈이 바뀌었다. 동굴이 아니었다. 빙하가 보였다. 거대한 얼음 벽이 하늘까지 솟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윤서의 피부가 찢어질 듯 아팠다. 영하 30도. 영하 40도. 윤서는 무리 속에 있었다. 12명. 여자 4명, 남자 5명, 아이 3명. 모두 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가죽에서 동물의 기름 냄새가 났다. 매머드 가죽이었다. 두껍고 거칠었다. 무리가 걷고 있었다. 빙하를 따라 남쪽으로. 먹을 것이 없었다. 3일째 굶고 있었다. 윤서의 배가 눌리듯 아팠다. 꿈 속의 배가 아팠다. 깨어나서도 배가 아팠다.
그날 밤 윤서는 냉장고를 열었다. 음식이 있었다. 빵, 우유, 과일. 윤서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포장된 음식이 낯설었다. 손이 빵을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멈췄다. 빵이 무엇인지 모르는 손이었다. 4만 년 전의 손이었다. 윤서는 냉장고를 닫고 바닥에 앉았다. 배에서 소리가 났다. 위가 수축했다. 배고팠다. 윤서는 싱크대 밑에서 감자를 꺼냈다. 생감자. 껍질째 입에 가져갔다. 이빨로 깨물었다. 딱딱하고 풋내가 났다. 윤서는 감자를 씹었다. 삼켰다. 배가 받아들였다. 포장된 빵은 먹을 수 없었는데 생감자는 먹을 수 있었다. 윤서는 감자를 내려다봤다.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이빨 자국이 난 감자를 내려다봤다. 이건 내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4만 년 전, 굶주렸던 누군가의 선택이었을까. 배가 고팠다. 하지만 이 음식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감각이 오지 않았다.
8개월째. 윤서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체취가 벽처럼 밀려왔다. 향수, 땀, 커피, 가죽, 플라스틱, 금속. 냄새가 층위별로 분리되어 윤서의 코에 꽂혔다. 윤서는 마스크를 3겹으로 쓰고 출근했다.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의 공기가 밀려왔다. 디젤, 먼지, 고무, 콘크리트. 4만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냄새들이었다. 윤서의 코가 그것들을 위험 신호로 읽었다. 심장이 빨라졌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윤서는 손잡이를 잡고 버텼다. 옆 사람의 체취가 너무 가까웠다. 이 사람이 아침에 먹은 것, 어젯밤에 마신 것, 피부에 바른 것이 전부 냄새로 읽혔다. 윤서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3정거장을 남기고.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봤다. 글자가 보였다.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글자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들었다. 글자를 읽는 동안 동굴 벽의 무늬가 겹쳐 보였다. 누군가가 동굴 벽에 손으로 그린 선들. 윤서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사무실 벽을 봤다. 흰 벽이었다. 그런데 벽에 선이 보였다. 붉은 안료로 그린 선. 윤서는 눈을 감았다 떴다. 선이 사라졌다. 다시 흰 벽이었다. 동료가 다가왔다.
“윤서 씨, 괜찮아요? 얼굴이 안 좋은데.”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려 했다. 한국어가 입에서 나왔다.
“괜찮아요.”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동안 윤서의 목구멍에서 다른 소리가 올라오려 했다. 낮은 허밍. 동굴 안에서 무리에게 안전하다고 알리는 소리. 윤서는 입을 다물었다.
윤서는 주치의를 다시 찾아갔다. 뇌파 검사를 받았다. 결과가 나왔다. 수면 중 뇌파에서 현대인에게 나타나지 않는 주파수 대역이 관찰됐다. 각성 시에도 후각 피질의 활성화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주치의가 모니터를 돌려 윤서에게 보여줬다. 뇌파 그래프. 정상인의 수면 뇌파와 윤서의 수면 뇌파가 나란히 있었다. 정상인은 매끄러운 곡선이었다. 윤서의 것은 곡선 사이에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반복되고 있었다.
“이 스파이크가 고대 감각 패턴이 재생되는 구간입니다.”
주치의가 말했다.
“처음에는 수면 중에만 나타났는데, 최근 데이터를 보면 각성 중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빈도가 늘고 있습니다.”
윤서는 그래프를 봤다. 스파이크 사이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한 달 전에는 20분 간격이었다. 2주 전에는 12분. 지금은 7분. 이 속도라면 한 달 뒤에는 스파이크가 끊기지 않을 것이었다. 고대 감각이 쉬지 않고 재생되는 상태. 주치의가 말했다.
“다른 3명의 환자 중 1명이 이미 그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 환자는 현재 한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못합니다. 의사소통이 허밍과 몸짓으로만 가능해요.”
“이식 유전자를 제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윤서는 기다렸다.
“유전자를 제거하면 미토콘드리아 기능이 이식 전으로 돌아갑니다. 세포 에너지 효율이 원래 수준으로 떨어져요. 그러면 다시 장기부전이 시작됩니다. 간부터.”
윤서는 의사의 얼굴을 봤다. 의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었다. 한국어였다. 윤서가 아는 언어였다. 그런데 의사의 말이 끝난 뒤, 윤서의 머릿속에서 다른 소리가 울렸다. 낮은 허밍. 동굴 안에서 무리가 내는 소리. 말이 아니었다. 언어 이전의 소리. 공명이었다. 함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소리. 그 소리의 의미가 머리가 아닌 몸으로 흘러들었다. 배우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이었다.
윤서는 병원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밤이었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윤서는 사람들의 걸음 소리를 들었다. 구두, 운동화, 부츠. 그리고 그 아래에서 다른 소리가 들렸다. 맨발이 흙을 밟는 소리. 가죽 신이 돌 위를 스치는 소리. 4만 년 전의 소리가 현재의 소리 아래에 겹쳐 있었다.
윤서는 공원을 지나갔다. 나무가 있었다. 윤서는 나무 냄새를 맡았다. 참나무였다. 윤서는 참나무라는 이름을 알았다. 동시에 다른 앎이 있었다. 이 나무의 껍질을 벗기면 약으로 쓸 수 있다는 앎. 열매를 으깨면 독을 뺄 수 있다는 앎. 윤서가 배운 적 없는 지식이었다. 유전자가 가르쳐 주는 지식이었다. 윤서는 나무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껍질의 거친 감촉이 남았다. 벤치에 앉았다. 옆에 비둘기가 있었다. 윤서는 비둘기를 봤다. 사냥감으로 봤다. 비둘기의 목뼈를 꺾고 깃털을 뽑고 내장을 빼는 과정이 머릿속에 재생됐다. 윤서가 배운 적 없는 과정이었다. 윤서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비둘기가 날아갔다.
윤서는 집에 돌아와 잠들지 않으려 했다. 잠들면 꿈이 올 것이었다. 꿈에서 윤서는 윤서가 아닌 사람이 될 것이었다. 이마가 낮고 눈두덩이 두꺼운 사람. 돌을 깎고 가죽을 벗기고 매머드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윤서는 커피를 마셨다. 불을 켜 놓았다. 앉아 있었다. 새벽 2시. 커피가 식었다. 윤서는 마셨다. 쓴맛이 혀를 찔렀다. 커피는 4만 년 전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커피를 마시면 꿈이 잠깐 물러났다. 새벽 3시. 커피잔이 비었다. 눈이 감기려 했다. 윤서는 떴다. 감기려 했다. 떴다. 동굴의 습기가 방 안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횃불의 그림자가 벽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윤서는 방의 불을 더 밝게 켰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았다. 벽의 모서리에 아직 남아 있었다.
새벽 4시, 윤서는 잠들었다.
꿈에서 윤서는 무리에서 쫓겨나고 있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윤서를 밀쳤다. 윤서가 아니었다. 이 몸의 주인이 밀쳐지고 있었다. 동굴 밖으로. 밤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빙하의 바람이었다. 뼈까지 파고드는 추위. 무리가 동굴 입구를 막았다. 우두머리가 돌을 들어 보였다. 경고였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몸의 주인은 며칠 전 사냥에서 실패했다. 무리에 먹을 것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것이 무리에게 쓸모를 다한 자의 마지막이었다. 동굴 밖의 어둠이 이 몸을 감쌌다. 하늘에 별이 있었다. 별이 너무 많았다. 현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밀도의 별.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이 몸의 주인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 아름다웠지만 따뜻하지 않았다. 바람이 살을 베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심장이 발치까지 떨어지는 기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것, 4만 년 전의 밤에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윤서는 뼈로 느꼈다.
윤서는 깨어났다. 울고 있었다. 베개가 젖어 있었다. 눈물이 아니었다. 콧물이었다. 코가 빙하의 찬 바람을 맡은 것처럼 흐르고 있었다. 윤서는 코를 풀고 손을 봤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방 온도는 23도였다. 윤서의 몸이 꿈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이불 안이 따뜻했다. 하지만 따뜻함이 두 종류였다. 이불의 따뜻함과, 무리 옆에 누워 체온을 나누던 따뜻함. 후자가 더 깊었다. 윤서는 이불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윤서는 욕실로 갔다. 거울을 봤다. 자기 얼굴이었다. 윤서의 얼굴. 그런데 윤서는 거울 속 얼굴에서 다른 얼굴을 봤다. 이마가 낮은 얼굴. 눈두덩이 두꺼운 얼굴. 그것이 거울 속 얼굴 위에 겹쳐져 있었다. 윤서는 손으로 거울을 닦았다. 겹친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거울의 문제가 아니었다. 윤서의 눈의 문제였다.
윤서는 휴대폰을 들었다. 주치의 번호를 찾았다. 전화를 걸려다 멈추었다. 통화 버튼 위에 올린 엄지손가락을 봤다. 손톱이 길었다. 윤서는 평소에 손톱을 짧게 깎았다. 언제 길어진 것인지 몰랐다. 손톱 아래에 흙이 끼어 있었다. 실제 흙이었다. 윤서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손을 씻었다. 흙을 만진 적이 없었다. 윤서는 손톱 아래의 흙을 봤다. 검고 습한 흙. 동굴 바닥의 흙과 같은 색이었다. 같은 질감이었다. 윤서는 흙 냄새를 맡았다. 축축하고 오래된 냄새. 이 흙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윤서는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윤서의 손이 떨렸다. 꿈에서 가져온 것인지, 몽유병처럼 밤에 나가서 파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윤서가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윤서는 전화를 걸었다. 주치의가 받았다. 윤서는 말했다.
“제거해 주세요. 그 유전자.”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장기부전이 다시 시작될 겁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알아요.”
윤서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다음 말은 단호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윤서는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 두 개의 얼굴이 겹쳐 있었다.
“제가… 제가 아니게 되고 있어요. 꿈에서 깨어나도 그 사람들이 사라지질 않아요. 냄새, 소리, 그 얼굴까지 전부. 어제는 손톱 밑에 동굴 흙이 끼어 있었어요, 의사 선생님. 이러다 정말 잠에서 못 깨어나거나… 깨어나도 그게 내가 아닐까 봐 무서워요.”
주치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결정하기 전에, 생각할 시간을 좀 더 갖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그냥 잡아 주세요. 가장 빠른 날로.”
윤서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결정은 이미 끝났다. 장기부전은 천천히 온다. 자아의 소멸은 매일 밤 조금씩, 꿈이 올 때마다 온다.
전화가 끊긴 뒤 윤서는 창밖을 봤다. 아침이었다.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아파트, 도로, 자동차, 가로수. 윤서는 그 풍경을 봤다. 동시에 다른 풍경이 겹쳤다. 빙하. 평원. 풀 없는 땅. 하늘에 새가 없는 하늘. 두 풍경이 같은 눈에 겹쳐 있었다. 윤서는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고 있었다. 아직은. 알고 있었다.
윤서는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5월의 바람이었다. 따뜻했다. 하지만 윤서의 피부는 빙하의 바람을 느꼈다. 두 바람이 같은 피부 위에 불고 있었다. 윤서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어느 바람인지 구별하려고. 따뜻한 바람과 차가운 바람을 구별하려고. 구별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윤서는 그날 밤 잠들기 전에 자기 방을 둘러봤다. 책장. 옷장. 책상 위의 노트북. 머그컵. 벽에 걸린 사진. 윤서가 20년간 쌓아 온 것들이었다. 이것들이 윤서를 윤서로 만드는 것이었다. 꿈속의 동굴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 돌과 가죽과 불과 무리.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단순한 것들이 점점 더 진짜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이 방이 점점 더 낯설어지고 있었다. 윤서는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표지를 봤다. 글자가 보였다.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손에 든 종이의 감촉이 이상했다. 종이가 낯설었다. 윤서는 책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종이의 매끄러운 감촉이 남았다. 동굴에는 종이가 없었다. 가죽에 안료로 그렸다. 그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윤서는 수술 일정을 잡았다. 다음 주 화요일. 유전자 제거 수술. 수술을 받으면 세포 에너지 효율이 원래로 돌아간다. 장기부전이 시작된다. 간부터. 그 다음 신장. 그 다음 심장. 윤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꿈이 계속된다. 꿈이 깨어 있는 시간을 잠식한다. 윤서가 사라지고 4만 년 전의 누군가가 윤서의 몸 안에 남는다. 어느 쪽 길의 끝에도 ‘윤서’는 없었다.
수술 전 마지막 밤. 윤서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불을 켜 놓은 채. 수술까지 5일. 5번의 밤. 5번의 꿈. 윤서는 눈을 감았다. 감는 순간 동굴의 습기가 밀려왔다. 횃불의 연기 냄새. 무리의 허밍 소리. 윤서는 눈을 떴다. 자기 방이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천장이 하얬다.
윤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열지 않았다. 동굴이 윤서를 감쌌다. 흙 바닥의 차가움이 등을 통해 올라왔다. 횃불이 흔들렸다. 무리가 잠들어 있었다. 12명의 숨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렸다. 윤서는 그 소리를 들었다. 낯설지 않았다. 익숙했다. 무리 안에 있다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 감각이 윤서의 가슴 안에서 따뜻하게 퍼졌다.
윤서는 잠든 채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침대 위에서. 동굴 안에서. 두 곳에 동시에 누워서. 방의 불이 켜져 있었다. 동굴의 횃불이 타고 있었다. 에어컨의 바람이 불었다. 빙하의 바람이 불었다. 윤서는 두 곳의 온도를 동시에 느꼈다. 23도와 영하 30도. 두 온도 사이 어딘가에 윤서가 있었다. 화요일까지 3일. 3번의 밤. 윤서는 셌다. 셀 수 있는 동안은 아직 윤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