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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없는 발화

2026. 3. 7. · 9,008자 · 약 11분

서명 없는 발화 썸네일
17

중계 정거장 호(弧)의 수신 배열에 이상이 생긴 것은 지연의 야간 교대가 시작된 직후였다. 3번 안테나의 수신 파형이 뒤틀리면서, 번역 코어의 냉각 구조물이 주황색 경고등을 켰다. 지연은 커피를 내려놓고 콘솔 앞으로 걸어갔다. 관제실의 조명이 야간 모드여서 계기판의 불빛만 벽에 반사되고 있었다. 파형의 위상이 8.3초 어긋나 있었다. 라키스 지성체와의 통신에서 시차 편차가 2초를 넘은 적은 42년 간 한 번도 없었다.

지연이 로그를 열었을 때, 수신 대기열에 라키스의 미분류 메시지 하나가 걸려 있었다. 도착 시각은 7분 전. 번역 코어가 처리를 거부하고 격리 상태로 보낸 것이었다. 지연은 격리 메시지의 헤더를 확인했다. 식별 서명이 비어 있었다. 라키스 지성체의 메시지에는 반드시 발신 개체의 식별 서명—인간의 이름에 해당하는 고유한 신호 패턴—이 포함되어야 했다. 번역 코어는 서명이 없는 메시지를 처리할 수 없었다. 서명 없는 발화는 화자 없는 문장이었고, 화자 없는 문장은 번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연은 당직 기록부에 시각과 상황을 적고, 콘솔 옆의 내선 단말을 집어 들었다. 신호가 세 번 울리고 나서 응답이 왔다.

“뭐야.”

재한의 목소리는 잠에서 덜 깬 채였다. 정거장의 번역 감독관. 지연보다 14년 먼저 이 정거장에 부임해서, 라키스 지성체와의 통신 프로토콜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3번 안테나 편차 8.3초. 환기 장치의 소리가 그 사이를 채웠다. 그리고 식별 서명 없는 메시지가 하나 격리돼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침대 프레임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고 있어.”

재한이 관제실에 도착하는 데 4분이 걸렸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들어오더니 콘솔 앞의 빈 의자에 앉았다.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눌려 있었고, 입가에 베개 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가 격리 메시지의 원시 데이터를 화면에 올리고 파형을 확대했다. 손가락이 트랙볼 위에서 멈추는 순간이 있었다. 재한의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거 서명이 없는 게 아니야.”

재한이 화면을 가리켰다. 파형의 하위 대역에 미세한 패턴이 묻혀 있었다.

“서명이 들어 있긴 한데, 현재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서명이야. 코어가 식별 실패로 처리한 거지.”

지연이 의자를 끌고 옆으로 다가가 화면을 봤다. 하위 대역의 패턴은 기존 라키스 서명의 구조와 비슷했지만, 주파수 대역이 미세하게 달랐다.

“옛날 서명인가요?”

재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 주파수 대역은 라키스 프로토콜 어디에도 등록된 적 없어.”

지연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관제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중계 정거장 호는 지구에서 6.4광년 떨어진 라키스 영역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길이 340미터의 원통형 구조물. 상주 인원 9명. 그중 번역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은 지연과 재한, 둘뿐이었다. 지구와의 통신에는 편도 6.4년이 걸렸다. 지금 이 메시지에 대한 판단은 이 관제실 안에서 내려야 했다.

재한이 번역 코어의 보조 모듈을 가동했다. 식별 서명을 우회하고 메시지 본문만 추출하는 비상 절차였다. 화면에 라키스의 발화 구조가 풀려 나왔다. 다차원 궤적. 지연은 그 궤적의 형태를 읽었다. 라키스의 발화는 벡터 공간 위의 운동이었다. 궤적의 방향이 의미를, 속도가 시제를, 곡률이 화자의 감정 상태를 나타냈다. 번역 코어는 이 궤적을 인간 언어로 사상하는 알고리즘이었고, 그 알고리즘의 핵심 전제는 하나였다. 식별 서명이 선행해야 한다. 서명이 없으면 궤적의 기준점이 없고, 기준점이 없으면 방향의 의미를 특정할 수 없었다.

“본문 구조는 정상이야.”

재한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궤적의 곡률도 라키스 표준 범위 안이고. 문제는 서명뿐이야.”

그가 의자를 돌려 지연을 봤다.

“서명 없이 번역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지연이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입안에 철 맛이 번졌다.

“기준점이 없으니까, 같은 궤적이 여러 의미로 해석돼요. 하나의 메시지가 세 개 이상의 번역문을 만들 수 있어요.”

“맞아. 그래서 서명이 프로토콜의 1조야. 42년 전에 내가 쓴 조항이지.”

재한이 데이터베이스 아카이브를 열었다. 42년치 라키스 통신 기록. 22만 건의 메시지. 모든 메시지에 식별 서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재한은 서명 패턴의 변화 추이를 시간축으로 정렬했다. 화면에 42년간의 서명 진화가 나타났다. 초기 서명들은 단순했다. 주파수 패턴 3개로 구성된 짧은 신호. 해가 지날수록 패턴이 복잡해졌다. 10년 차에는 7개, 20년 차에는 14개, 40년 차에는 31개의 패턴으로 구성된 서명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지연이 그래프를 보며 물었다.

“서명이 복잡해지는 속도가 일정하지 않네요.”

재한이 끄덕였다.

“라키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정체성을 갱신해. 인간이 나이를 먹으며 변하는 것과 비슷한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 인간은 변해도 과거의 자기를 버리지 않아. 기억이라는 형태로 들고 다니지. 라키스는 달라. 자기를 갱신하면 이전 버전의 서명을 폐기해. 현재의 자기만이 유일한 자기야.”

지연의 손가락이 화면 위 한 지점을 짚었다. 그래프에서 서명 복잡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구간이 하나 있었다. 37년 전. 31개 패턴이었던 특정 개체의 서명이 갑자기 9개로 줄어든 시점.

“이건 뭐예요?”

재한의 눈이 좁아졌다. 화면을 확대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관제실의 환기 장치가 내는 낮은 웅웅거림과 냉각 구조물에서 새어 나오는 팬 소리만 흘렀다.

“이게 있었나.”

재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37년 전의 기록을 열었다. 서명이 축소된 개체의 식별 번호는 라키스-0017이었다. 당시 기록에는 재한 자신의 주석이 달려 있었다. '라키스-0017 서명 변경. 단순화 방향. 이유 불명. 프로토콜 범위 내 변경이므로 정상 처리. ' 재한이 화면에서 눈을 뗐다. 의자 등받이가 삐걱거렸다.

“정상 처리.”

재한이 자기가 37년 전에 쓴 단어를 되뇌었다.

“정상 처리라고 썼어.”

지연이 봤다. 재한의 입가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금 보니까 정상이 아니야?”

재한이 고개를 돌려 지연을 봤다. 눈이 건조해 보였다.

“0017이 서명을 축소한 건, 지금 생각하면, 이전 버전으로 돌아간 거야. 갱신이 아니라 역행. 라키스가 자기 정체성을 이전 상태로 되돌린 거지. 그때 내가 그걸 잡았어야 했어.”

“왜 못 잡은 거예요?”

지연의 질문에 재한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관제실 창 너머로 라키스 영역의 희미한 성운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관제실의 어둠 속에서 그 빛이 두 사람의 윤곽을 희미하게 그렸다. 붉은 기운이 도는 보라색.

“42년 전에 프로토콜을 설계할 때, 나는 서명이 항상 복잡해지는 방향으로만 변한다고 가정했어. 정체성은 축적되는 거라고. 과거 위에 현재가 쌓이는 거라고. 인간의 전제를 그대로 가져온 거야.”

재한의 손이 콘솔 가장자리를 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때까지.

지연이 격리된 메시지의 서명 패턴을 37년 전 라키스-0017의 축소된 서명과 대조했다. 화면에 두 패턴이 나란히 놓였다. 일치율 97.6퍼센트. 지연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0017이에요.”

지연이 말했다.

“37년 전에 돌아간 상태의 0017. 근데 지금 보내온 서명은 37년 전 것보다 더 축소돼 있어요. 패턴 5개. 더 과거로 돌아간 거예요.”

재한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관제실을 가로질러 번역 코어가 들어 있는 냉각 구조물 앞까지 걸어갔다. 구조물 표면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주황색 경고등이 그의 얼굴 위에서 깜빡였다.

“코어가 0017을 거부하는 이유가 뭔지 알지?”

재한이 구조물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42년 전에 내가 서명 검증 규칙을 이렇게 썼어. '현재 서명은 직전 서명보다 복잡도가 높거나 같아야 한다. ' 복잡도가 낮아지면 코어가 위조로 판정하고 거부해. 정체성은 후퇴하지 않는다는 전제. 내가 만든 전제.”

지연이 의자에 앉은 채 재한을 봤다. 냉각 구조물의 냉기가 관제실 바닥을 따라 퍼지고 있었다. 발목이 시렸다.

“0017이 과거 상태로 돌아간 건, 그러면 우리 프로토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개체가 되는 거예요?”

“그래.”

“근데 실제로는 존재하잖아요. 지금 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잖아요.”

재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연이 메시지 본문의 번역을 시도했다. 서명 우회 모드로 코어를 돌리면 기준점 없이 궤적을 해석해야 했다. 결과는 재한이 예측한 대로였다. 하나의 궤적에서 세 개의 번역문이 나왔다. 지연은 세 번역문을 나란히 화면에 띄웠다.

첫 번째: '이전의 나는 오류였다. 현재의 나는 오류 이전이다. 이것이 나다. ' 두 번째: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간극이 있다. 간극 이쪽에서 말한다. ' 세 번째: '나는 돌아왔다. 나를 받아들여라. '

세 문장을 읽는 재한의 표정이 바뀌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를 읽을 때는 입이 굳어 있었다. 두 번째를 읽을 때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두 번째가 가장 가까워.”

지연이 봤다.

“어떻게 알아요?”

“모르지. 하지만 37년 전에 내가 '정상 처리'라고 쓴 건, 그때도 모르면서 선택한 거야. 지금이랑 똑같아.”

지연은 의자를 돌려 관제실 창을 봤다. 성운빛이 유리에 번져 있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0017의 메시지가 도착한 지 2시간이 지나 있었다. 라키스 지성체와의 프로토콜에는 수신 확인 시한이 있었다. 미분류 메시지에 4시간 내 응답이 없으면, 라키스 측에서 통신 채널을 단방향으로 전환한다. 단방향 전환이 되면 인간 측에서 발신할 수 없다. 듣기만 가능하고 말하기는 불가능한 상태. 42년간의 쌍방향 채널이 닫히는 것이었다.

“응답을 보내야 해요.”

지연이 말했다.

“코어의 서명 검증을 수정해서 0017을 인식하게 하면—”

“서명 검증을 바꾸면 42년치 프로토콜이 무효화돼.”

재한이 끊었다.

“코어가 서명의 시간 방향을 검증하지 않게 되면, 과거 서명을 가장한 위조 메시지도 통과해. 지금까지 쌓은 신뢰 체계 전체가 흔들려.”

“그렇다고 2시간 안에 지구 본부 승인을 받을 수도 없잖아요.”

“알아.”

재한이 콘솔 앞에 섰다. 화면에 서명 검증 규칙의 소스가 열려 있었다. 42년 전에 재한이 작성한 코드. 주석에 자기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재한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연은 그 손을 봤다.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손가락 마디에 주름이 깊었다.

“내가 42년 전에 이 규칙을 쓸 때, 라키스의 동의를 받은 적이 없어.”

재한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인간의 정체성 개념을 프로토콜에 심고, 그걸 양쪽 공통 규칙이라고 선언한 거야. 라키스가 동의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어. 그 확인 자체가 이 프로토콜을 통해서만 가능하니까.”

지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냉각 구조물의 주황색 경고등이 2초 간격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불빛이 재한의 등 위로 번졌다가 사라졌다.

재한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서명 검증 규칙의 복잡도 조건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현재 서명은 직전 서명보다 복잡도가 높거나 같아야 한다'는 줄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대신 새 조건이 입력됐다. '서명의 내부 구조 일관성만 검증한다. 시간 방향 검증을 비활성화한다. ' 재한의 손가락이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수정이 끝났을 때 재한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눈을 감았다. 3초. 환기 장치의 소리가 그 사이를 채웠다.

“이건 임시 조치야.”

재한이 눈을 뜨며 말했다.

“지구 본부가 이걸 승인할지는 6.4년 뒤에나 알 수 있어. 그때까지 이 정거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통신의 보안 책임은 내 이름으로 기록돼.”

지연이 끄덕였다.

“수정 적용할까요?”

재한이 엔터 키를 쳤다.

번역 코어가 재시작되는 데 90초가 걸렸다. 냉각 구조물의 경고등이 주황에서 초록으로 바뀌었다. 격리되어 있던 0017의 메시지가 코어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번역문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하나. 기준점이 생기면서 궤적의 해석이 수렴한 것이었다.

'나는 이전의 합의를 기억한다. 합의 당시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다. 지금의 내가 합의를 계속 이행해야 하는가. '

지연이 번역문을 읽고 재한을 돌아봤다. 재한의 시선이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입술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지연이 물었다.

“합의가 뭘 말하는 거예요?”

재한이 천천히 대답했다.

“42년 전에 처음 통신을 열었을 때, 양측의 접촉 조건을 정한 게 있어. 라키스가 항성 항법 데이터를 공유하고, 인간은 라키스 영역의 중립성을 보장하는 것. 0017은 그때 합의를 중재한 라키스 측 대표 개체야.”

지연의 등이 의자에서 떨어졌다. 앞으로 기울어졌다.

“대표 개체가 과거로 돌아간 거예요? 합의를 만든 자기 자신을 폐기한 거예요?”

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게. 무겁게.

“0017이 지금 묻고 있는 건, 이전 버전의 자기가 맺은 약속을 현재 버전의 자기가 지켜야 하느냐는 거야.”

지연의 손가락이 콘솔 가장자리를 짚었다. 금속이 차가웠다.

재한이 일어서서 관제실의 좁은 통로를 걸었다. 벽에 붙은 소화기를 지나고, 비상구 표시등 아래를 지나서, 벽에 걸린 42주년 기념 사진—정거장 상주 인원 9명이 나란히 선 사진—을 지나서, 창 앞에 멈췄다. 정거장의 외벽은 이중 강화 유리였고, 유리 사이에 냉매가 순환하고 있었다. 재한이 유리에 손을 대자 손바닥이 빠르게 차가워졌다. 성운빛이 그의 얼굴 반쪽을 비추고 있었다.

“내가 42년 전에 쓴 프로토콜 때문에, 0017의 질문이 42년 동안 도착하지 못한 거야. 코어가 거부했으니까. 0017은 37년 전에도, 그 전에도 이 질문을 보냈을 수 있어. 우리가 받지 못한 거지.”

지연은 수신 대기열을 다시 열었다. 코어의 서명 검증 규칙이 바뀌면서, 이전에 거부됐던 메시지들이 재처리되기 시작했다. 대기열에 새 번역문이 하나씩 올라왔다. 지연은 숫자를 세다가 멈췄다. 37건. 37년에 걸쳐 0017이 보낸 37건의 메시지가 코어에 의해 거부되어 격리 저장소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매년 한 건씩. 빠짐없이.

첫 번째 메시지의 번역문은 짧았다. '합의를 기억하는 나는 사라졌다. 합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합의의 효력을 묻는다. ' 지연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36년 전, 35년 전, 34년 전. 해마다 한 건씩. 같은 질문의 변형이 반복되고 있었다. 질문의 핵심은 변하지 않았지만, 표현의 궤적이 해마다 달라져 있었다. 매번 다른 자기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37개의 서로 다른 궤적이, 하나의 질문 위에서 수렴하고 있었다. 0017은 자기를 갱신할 때마다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재한이 창에서 돌아서서 지연에게 말했다.

“응답을 보내야 해.”

지연이 봤다.

“뭐라고요?”

재한이 콘솔 앞에 섰다. 화면에 빈 발신 필드가 하나 떠 있었다.

“37년 동안 0017이 물어본 건, 결국 하나야. 과거의 자기가 맺은 약속이 현재의 자기를 구속하느냐.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건 인간 쪽뿐이야. 우리가 어떤 답을 보내느냐에 따라 42년간의 합의가 유지되거나 해소돼.”

지연은 발신 필드를 봤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시한까지 1시간 43분.

“저는 아직—”

지연이 입을 열다가 멈췄다. 재한이 이미 타이핑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연은 화면에 나타나는 글자를 읽었다. '합의는 특정 버전의 당신이 아니라, 양측의 접촉 자체에 기반합니다. 당신이 변해도 접촉은 계속됩니다. ' 재한이 타이핑을 멈추고 지연을 봤다.

“어때?”

지연이 화면을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이것도 인간의 전제 아니에요?”

재한의 손이 키보드에서 떨어졌다.

“맞아.”

재한이 말했다. 목소리에서 힘이 빠져 있었다.

“인간은 약속이 당사자의 변화와 무관하게 유효하다고 보지. 라키스가 그렇게 보는지는 몰라.”

지연이 발신 필드의 문장을 삭제하고 새로 입력했다. '당신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37건 모두. 응답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 재한이 화면을 읽고, 지연을 봤다. 지연의 손이 발신 키 위에 있었다.

“이건 답이 아니야.”

재한이 말했다.

“시간을 버는 거지.”

“37년 동안 답을 안 했으면서 지금 2시간 안에 내놓을 수 있는 답이 뭐가 있어요.”

재한의 입이 닫혔다. 지연이 발신 키를 눌렀다. 콘솔에서 전송 확인음이 울렸다. 짧고 높은 전자음이 울렸다.

관제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냉각 구조물의 팬 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연은 수신 대기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37건의 메시지를 시간순으로 재배열하고, 각각의 번역문을 문서 파일에 옮겼다. 재한은 창 앞에 서서 성운빛을 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 재한이 말했다.

“37년.”

지연이 봤다.

“42년 전에 내가 프로토콜을 잘못 쓴 것 때문에, 0017이 37년 동안 우리한테 닿지 못한 거야.”

지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파일 정리를 계속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연의 손가락 소리만 관제실을 채웠다.

0017의 응답이 도착한 것은 6분 뒤였다. 번역문이 화면에 떠올랐다. 지연이 먼저 읽었다. '시간을 허락한다. 다만, 이전의 합의 기간 중 당신들이 받은 항법 데이터 3번에서 17번까지의 항로 좌표에 나의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합의 당시의 내가 제공한 데이터이므로, 현재의 내가 보증하지 않는다. 확인을 권고한다. ' 재한이 화면 앞으로 돌아왔다. 읽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의자에 주저앉듯 앉았다.

“항로 3번에서 17번.”

재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항로로 이주선이 15척 지나갔어. 가장 최근 게 8개월 전이야.”

재한이 콘솔에 앉아 항로 데이터를 불러왔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두 번 미끄러졌다. 지연은 재한의 옆에 서서 화면을 봤다. 15척의 이주선 궤적이 지도 위에 선으로 나타났다. 그 선들이 지나간 항로의 좌표를 0017이 보증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연의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손을 바지 옆면에 닦았다.

재한이 의자에서 일어나 통신 패널로 갔다. 지구 방향 긴급 송신을 준비했다. 편도 6.4년. 지금 보내면 지구가 받는 건 6.4년 뒤. 하지만 보내야 했다. 8개월 전에 출발한 이주선은 지금도 항로 위에 있었다. 항로 좌표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경고를. 재한의 손이 송신 키 위에서 멈췄다.

“37년 전에 이 메시지를 받았으면, 15척의 항로를 사전에 검증할 수 있었어.”

지연이 옆에 서서 말했다.

“지금 보내요.”

재한이 키를 눌렀다. 송신 확인음이 관제실에 울렸다. 지연은 0017의 메시지 파일로 돌아가 28번째 메시지를 열었다. 다음 번역을 읽기 시작했다. 관제실 밖 복도의 비상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고, 냉각 구조물의 팬이 돌아가고, 37건의 번역문이 화면에 줄지어 있었다.

과거의 내가 맺은 약속이 현재의 나를 구속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그리고 그 답을 모른 채 42년을 보낸 대가는 누가 치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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