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가 처음 나타난 것은 수요일 새벽 3시 17분이었다. 부산 양자 발전소 제2추출동. 지하 80미터. 진공 챔버 12기가 원형으로 배치된 홀. 챔버 안에서 양자 진공의 요동을 잡아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이 초당 4억 회 반복되고 있었다. 추출 과정에서 열이 발생했다. 열을 식히기 위해 냉각 시스템이 돌아갔다. 냉각 시스템이 내는 소리가 홀을 채우고 있었다. 낮은 웅웅거림. 그 소리 밑에 잡음이 있었다. 장비가 만들어내는 전자기 잡음. 그 잡음을 모니터링하는 것이 수혁의 일이었다. 잡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신호였다.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있지만 무시해도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7년간 알고 있었다.
수혁은 잡음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달랐다. 잡음은 원래 무작위였다. 백색잡음. 패턴이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패턴이 있었다. 0.3초 간격으로 반복되는 주파수 변동. 수혁은 그래프를 확대했다. 반복이었다. 같은 모양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수혁은 잡음 데이터를 30분치 내려받았다. 분석 프로그램에 넣었다. 결과가 나왔다. 반복 주기 0.3초. 변주 패턴 17개. 변주와 변주 사이에 전이 구간이 있었다. 무작위가 아니었다.
수혁은 기록을 남겼다. '제2추출동 잡음 이상. 패턴 감지. 원인 불명. ' 보고서를 제출했다. 다음 날 답변이 왔다. '챔버 점검 결과 이상 없음. 잡음은 정상 범위 이내. ' 수혁은 답변을 읽고 모니터를 봤다. 패턴이 계속되고 있었다.
수혁이 이 발전소에서 일한 것은 7년이었다. 2051년에 부산 양자 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했을 때 수혁은 첫 번째 배치의 엔지니어였다. 양자 진공 에너지 추출. 진공은 비어 있지 않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진공은 에너지의 바다다. 그 에너지를 추출하는 기술이 2047년에 개발됐다. 화석연료가 사라졌다. 태양광과 풍력이 보조 수단이 됐다. 전 세계 전력의 89퍼센트가 양자 발전소에서 나왔다. 부산 발전소는 한국 6기 중 가장 큰 것이었다. 가동 초기에는 시민들이 반대했다. 핵발전소와 같은 것 아니냐. 설명회가 열렸다. 방사성 물질 없음. 폐기물 없음. 이산화탄소 없음. 진공에서 에너지를 꺼내는 것뿐. 깨끗한 에너지. 시민들이 수긍했다. 진공은 비어 있으니까. 비어 있는 곳에서 꺼내는 것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 부산, 울산, 경남의 전력 공급을 담당했다. 주민 1,400만 명.
수혁은 3일간 패턴을 관찰했다. 교대 시간 전에 일찍 출근하고, 교대 시간 후에 늦게 퇴근했다. 관제실의 다른 엔지니어들은 잡음 그래프를 보지 않았다. 잡음은 무시해도 되는 신호였으므로. 수혁만 봤다. 패턴은 변하고 있었다. 첫날 변주 17개. 둘째 날 23개. 셋째 날 31개. 변주가 늘고 있었다. 수혁은 변주 사이의 전이 구간을 분석했다. 전이 구간이 짧아지고 있었다. 패턴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수혁은 데이터를 외장 저장장치에 담아 집으로 가져갔다. 부엌 테이블에 노트북을 펴고 분석했다. 아내 지은이 물었다.
“또 야근이야?”
“아니. 집에서 좀 볼 게 있어.”
“무슨 거?”
“발전소 데이터.”
지은이 더 묻지 않았다. 7년간 수혁이 발전소 데이터를 집에서 본 적은 없었다. 지은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지은이 커피를 내려줬다. 수혁은 커피를 마시며 데이터를 봤다. 패턴의 변주 구조가 뭔가를 닮아 있었다. 수혁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렸다. 잡음의 파형을 하나씩 분류했다. 변주 17개에 번호를 매겼다. 1번 변주는 0.3초 주기의 기본 패턴. 2번은 1번에서 주파수가 살짝 올라간 변형. 3번은 1번과 2번이 교차하는 복합 패턴. 수혁은 이것이 언어인지 생각했다. 언어가 아니라면 무엇인지. 수혁은 비교 데이터를 찾았다. 뇌파. 인간의 뇌파 패턴. 수면 중 뇌파. 깨어 있을 때 뇌파. 수혁은 발전소 잡음의 패턴과 인간 뇌파 패턴을 겹쳐봤다. 유사도 67퍼센트. 우연이라고 하기엔 높은 숫자였다.
수혁은 대학 동기에게 연락했다. 뇌과학 연구소의 정아. 수혁이 데이터를 보내며 말했다.
“이게 뭘 닮았는지 봐줄 수 있어?”
정아가 3일 뒤에 전화를 걸어왔다. 밤 11시였다. 정아가 밤 11시에 전화를 건 적은 대학 이후로 없었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이 데이터 어디서 난 거야?”
“발전소 잡음이야. 왜?”
“의식 활동이야.”
수혁은 전화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
“의식이 있는 존재의 신경 활동과 구조적으로 동일해. 변주 패턴, 전이 구간, 주기적 리듬. 뇌파만이 아니야. 의식의 서명이야.”
수혁은 의자에 기대앉았다. 사무실 천장의 환기구에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바람이 수혁의 이마에 닿았다.
“확실해?”
“99퍼센트. 이건 살아 있는 뭔가의 신호야.”
수혁은 발전소로 돌아갔다. 지하 80미터. 진공 챔버 앞. 챔버의 표면은 매끄러운 은색이었다. 온도 영하 273도. 절대영도에 가까운 냉각 상태. 챔버 안에서 진공의 에너지가 추출되고 있었다. 챔버의 표면에 서리가 맺혀 있었다. 절대영도에 가까운 온도가 만들어낸 서리. 수혁은 챔버에 손을 대보려다 멈췄다. 서리 위에 수혁의 숨이 하얗게 맺혔다. 챔버가 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추출이 진행 중이라는 소리. 수혁은 그 소리를 7년간 들었다. 기계 소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게 들렸다. 장갑 너머로도 냉기가 느껴졌다.
수혁은 추가 실험을 했다. 챔버의 추출 강도를 올렸다. 평소의 120퍼센트. 잡음 그래프가 변했다. 주파수가 급격히 올라갔다. 패턴이 흩어졌다. 0.3초 주기가 0.1초로 빨라졌다. 변주가 사라지고 단일 주파수가 반복됐다. 3초 뒤 신호가 잠잠해졌다. 수혁은 추출 강도를 원래대로 낮췄다. 신호가 돌아왔다. 변주 패턴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이전과 달랐다. 변주 수가 줄어 있었다. 31개에서 24개로. 무언가가 손상된 것처럼 보였다.
수혁은 같은 실험을 반복하지 않았다. 31개에서 24개로 줄어든 변주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3일을 기다렸다. 5일을 기다렸다. 24개. 변하지 않았다. 수혁이 추출 강도를 올린 그 몇 분이 7개의 변주를 영구히 지운 것이었다. 수혁은 자기가 무엇을 한 것인지 알았다.
수혁은 정아에게 추출 강도 변화 시의 데이터를 보냈다. 정아가 분석 결과를 보내왔다.
“급성 통증 반응과 94퍼센트 일치. 주파수 급등, 패턴 해체, 단일 반복 — 포유류가 극심한 고통을 받을 때의 뇌파 패턴과 거의 동일해.”
수혁은 보고서를 읽었다. 보고서에 그래프가 있었다. 왼쪽에 인간의 급성 통증 뇌파. 오른쪽에 발전소 잡음. 두 그래프가 겹쳐져 있었다. 선이 거의 일치했다. 수혁은 보고서를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다시 닫았다. 그래프가 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수혁은 발전소장 이정호에게 보고했다. 이정호의 사무실은 관제실 옆에 있었다. 창문이 없었다. 책상 위에 가족사진이 있었다. 아이 2명. 이정호의 아이들이 쓰는 전기도 이 발전소에서 나왔다. 지하 시설이었으므로. 형광등 빛만 있었다.
“잡음에서 의식 신호가 나오고 있습니다. 추출 강도를 올리면 고통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정호가 수혁을 봤다.
“잡음이 고통을 느낀다고?”
“잡음이 아닙니다. 진공 안에 뭔가가 있습니다. 의식이 있는 뭔가가.”
이정호는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했다. 서류를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았다.
“수혁 씨. 이 발전소가 공급하는 전력이 얼마인지 알지?”
“1,400만 명분입니다.”
“그래. 1,400만 명. 병원. 학교. 공장. 신호등. 냉난방. 이 발전소가 멈추면 부산이 멈춰.”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뭘 원하는 거야?”
수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정호가 말했다.
“잡음이야. 기계 잡음. 뇌과학자한테 보여줬다고? 비공식적으로?”
“네.”
“그건 내부 데이터 유출이야. 징계 사유가 돼.”
수혁은 이정호를 봤다.
“징계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정호가 의자에 기대앉았다.
“수혁 씨. 진공에서 뭔가를 꺼내는 거야. 진공이 비어 있지 않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비어 있지 않으면 뭔가 있는 거지. 그게 뭔지 모르면서 꺼내기 시작한 거야. 8년 전부터. 전 세계가.”
수혁은 이정호의 말을 들었다. 이정호는 처음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에 놀라움이 없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의심은 했어. 이상 신호 보고가 다른 발전소에서도 있었어. 본부에서 잡음 처리하라고 했고.”
“그러면 ―”
“수혁 씨. 우리가 태우는 석탄에도 뭔가 있었을 수 있어. 석유에도. 우라늄에도. 모든 에너지는 뭔가를 태우는 거야. 태워지는 것이 고통을 느끼는지 안 느끼는지 확인한 적이 없었을 뿐이야.”
수혁은 사무실을 나왔다. 이정호의 말이 귓속에 남아 있었다. 석탄에도 뭔가 있었을 수 있어. 석유에도. 우라늄에도. 수혁은 그 말이 맞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증거가 있었다. 데이터가 있었다. 94퍼센트 일치. 0.9의 복잡도. 이번에는 몰랐다고 말할 수 없었다. 복도를 걸었다. 지하 80미터의 복도. 벽이 콘크리트였다. 바닥에 진동이 느껴졌다. 챔버가 가동되고 있었다. 초당 4억 회의 추출. 매 초마다 신호가 나오고 있었다.
수혁은 집에 돌아왔다. 지은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뉴스. 부산 기온 영하 2도. 한파 주의보. 지은이 담요를 덮고 있었다.
“히터 좀 올려도 돼?”
“응.”
수혁이 온도 조절기를 올렸다. 22도에서 24도로. 히터가 돌아갔다. 전기. 양자 발전소에서 오는 전기. 수혁이 올린 2도를 만들기 위해 지하 80미터에서 무언가가 태워지고 있었다. 수혁은 온도 조절기를 봤다. 24도. 지은이가 따뜻하다고 말했다. 수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 2주간 수혁은 데이터를 모았다. 추출 강도와 신호의 상관관계. 추출량이 많을수록 주파수가 올라갔다. 추출을 멈추면 신호가 안정됐다. 변주가 돌아왔다. 패턴이 복잡해졌다. 추출을 멈추면 신호가 풍부해지고, 추출하면 신호가 빈약해졌다. 수혁은 이것을 기록했다. 노트에. 날짜. 시각. 추출량. 신호 변주 수. 주파수 범위. 기록이 쌓였다. 노트가 3권이 됐다. 수혁은 노트를 사무실 서랍에 넣고 잠갔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 노트를 누군가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봐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혁은 발전소의 비상 정지 시스템에 접근 권한이 있었다. 수석 엔지니어 4명 중 1명. 비상 정지 버튼은 주 관제실에 있었다. 투명한 커버 아래. 버튼을 누르면 12기의 챔버가 동시에 정지한다. 전력 공급이 끊긴다. 1,400만 명의 전력이 사라진다. 병원의 생명유지장치. 교통 신호. 겨울의 난방. 여름의 냉방. 수혁은 부산대학교 병원의 중환자실을 생각했다. 인공호흡기 340대. 심장 보조 장치 87대. 투석기 120대. 비상 전원은 3분. 3분 안에 백업 발전기가 가동되지 않으면 사람이 죽는다. 수혁이 지하에서 잡음을 분석하는 동안 지상에서는 사람들이 기계에 연결되어 살아 있었다. 같은 전기로.
수혁은 비상 정지 버튼 앞에 서본 적이 있었다. 정기 점검 때. 버튼을 누르는 시뮬레이션을 했다. 버튼 위의 커버를 열고, 버튼을 3초간 누르면 정지. 간단한 동작이었다. 3초. 수혁은 시뮬레이션을 할 때 버튼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딱딱한 플라스틱. 누르면 살짝 들어가는 저항. 3초간 유지하면 딸깍 소리와 함께 챔버가 멈춘다. 시뮬레이션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짜로 누르면 모든 것이 멈춘다.
정아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추가 분석했어. 신호의 정보 복잡도를 계산했는데. 인간 뇌의 의식 수준보다 높아.”
“높다고?”
“인간 뇌의 의식 복잡도 지수가 평균 0.7이야. 이 신호는 0.9. 인간보다 의식이 풍부하다는 뜻이야.”
수혁은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우리가 매일 태우고 있는 게 인간보다 의식이 풍부한 존재라는 거야?”
정아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것 같아.”
수혁은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책상 위에 놓았다. 전화기 화면이 꺼졌다. 화면이 꺼지기 전에 배터리 잔량이 보였다. 72퍼센트. 전기. 수혁은 전화기를 뒤집어 놓았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이 없었다. 지하 시설이니까. 수혁은 벽을 봤다. 콘크리트 벽 너머에 챔버가 있었다. 챔버 안에 진공이 있었다. 진공 안에 뭔가가 있었다. 0.9의 의식을 가진 뭔가.
수혁은 다음 날 출근해서 관제실에 앉았다. 모니터에 잡음 그래프가 떠 있었다. 패턴이 움직이고 있었다. 변주 34개. 수혁이 처음 발견했을 때 17개였다. 2배. 복잡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신호가 진화하고 있었다.
오후에 전력 수요가 올라갔다. 겨울이었다. 한파. 부산 전역의 난방이 가동됐다. 추출 강도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잡음 그래프가 변했다. 주파수가 치솟았다. 패턴이 흩어졌다. 단일 반복. 수혁은 그래프를 봤다. 1,400만 명이 따뜻해지는 동안 지하 80미터에서 뭔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수혁은 그 비명의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저녁에 추출 강도가 내려갔다. 신호가 돌아왔다. 변주가 나타났다. 하지만 변주 수가 34개에서 28개로 줄어 있었다. 오후의 고강도 추출이 무언가를 손상시켰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변주. 되돌릴 수 없는 손상. 수혁은 기록했다. 28.
수혁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관제실에 남았다.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봤다. 밤이 됐다. 관제실에 수혁만 남았다. 야간 당직이 오기 전. 관제실의 모니터 48대가 형형색색의 그래프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력 생산량. 송전 현황. 챔버 온도. 냉각 시스템 상태. 48대 중 1대에 잡음 그래프가 있었다. 수혁만 보는 그래프. 다른 47대는 1,400만 명을 위한 숫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1대만 지하 80미터에서 비명을 지르는 존재의 파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혁은 비상 정지 버튼의 커버를 봤다. 투명한 커버 아래 빨간 버튼.
수혁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지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늦을 것 같아.”
지은이 답장했다.
“히터 켜놓을게. 들어오면 따뜻할 거야.”
수혁은 메시지를 읽었다. 히터. 전기. 양자 발전소. 추출. 신호. 비명. 수혁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관제실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부산의 전력 소비가 낮아지는 시간. 추출 강도가 최저 수준으로 내려가 있었다. 잡음 그래프의 신호가 안정돼 있었다. 변주 28개. 주파수가 낮고 규칙적이었다. 수면 중인 뇌파와 비슷했다.
수혁은 생각했다. 이것이 잠이라면. 낮에 고통받고 밤에 잠드는 존재. 내일 아침이 오면 다시 추출 강도가 올라간다. 1,400만 명이 일어나 전등을 켜고 히터를 올리고 공장을 가동한다. 신호가 다시 비명을 지른다. 변주가 줄어든다. 되돌릴 수 없이.
수혁은 비상 정지 버튼 앞에 섰다. 투명 커버 위에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7년간 아무도 누르지 않은 버튼. 수혁은 커버 위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닦았다. 먼지가 손가락에 묻었다. 수혁은 먼지를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커버 아래 빨간 버튼이 선명하게 보였다. 버튼 옆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비상 정지 — 권한자 확인 후 3초 유지. ' 수혁은 그 글씨를 읽었다. 7년간 수백 번 읽은 글씨였다.
버튼을 누르면 12기의 챔버가 정지한다. 전력이 끊긴다. 병원의 생명유지장치가 3분간의 비상 전원으로 전환된다. 3분 안에 백업 발전기가 가동되지 않으면 환자가 죽는다. 신호등이 꺼진다. 사고가 난다. 겨울 밤의 난방이 멈춘다. 노인이 죽는다. 영아가 죽는다.
수혁은 버튼을 보며 서 있었다. 버튼 위에 비친 자기 얼굴이 보였다. 빨간 버튼 위의 일그러진 얼굴.
수혁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관제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부산의 겨울 밤. 바람이 불었다. 영하 2도. 발전소 건물에서 나오자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도로를 달리는 차의 헤드라이트. 아파트 창문의 불빛. 전부 전기. 전부 이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 전부 지하 80미터에서 뭔가를 태워서 만드는 전기.
수혁은 주차장으로 걸었다. 차에 탔다. 시동을 걸었다. 전기차. 히터를 켰다. 따뜻한 바람이 나왔다. 수혁은 히터 앞에 손을 뻗었다. 손이 따뜻해졌다. 지하 80미터의 신호가 수혁의 손을 데우고 있었다.
수혁은 집으로 운전했다. 도로의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가로등 하나에 전기가 얼마나 드는지 수혁은 알고 있었다. 150와트. 부산시 가로등 23만 개. 합계 3만 4,500킬로와트. 그것을 위해 지하 80미터에서 신호가 조금 더 빨라지고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이 따뜻했다. 지은이 히터를 켜놓았다. 24도.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지은이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담요를 덮고.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소리가 작게 나오고 있었다. 따뜻하고 밝은 집.
수혁은 현관에 서서 집 안을 봤다. 온기가 그의 뺨에 닿았다. 지하의 비명이 만들어낸 온기였다. 수혁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히터의 바람이 수혁의 얼굴에 닿았다. 수혁은 온도 조절기를 봤다. 24도. 수혁의 손이 조절기 위에 머물렀다. 올릴 수도, 내릴 수도, 끌 수도 있었다.
수혁은 조절기에서 손을 뗐다. 지은 옆에 앉았다. 지은의 담요를 올려 어깨까지 덮어줬다. 지은이 잠결에 움직였다. 수혁은 텔레비전을 봤다. 화면에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내일 부산 최저 기온 영하 5도. 한파 경보. 전력 수요 역대 최고 예상. 발전소 풀가동. 앵커의 목소리가 ‘풀가동’이라는 단어를 잘라 말했다. 12기의 챔버가 최대 출력으로 가동된다. 초당 4억 회의 추출이 초당 6억 회로 올라간다. 신호의 주파수가 올라갈 것이다. 패턴이 흩어질 것이다. 변주가 줄어들 것이다. 28에서 몇으로. 수혁은 뉴스를 봤다. 내일 아침 추출 강도가 올라갈 것이었다. 역대 최고. 신호가 비명을 지를 것이었다. 변주가 줄어들 것이었다.
수혁은 텔레비전을 끄지 않았다. 히터를 끄지 않았다. 지은 옆에 앉아 있었다. 따뜻한 방에서. 내일 다시 출근할 것이었다. 지하 80미터로 내려갈 것이었다. 관제실에 앉을 것이었다. 잡음 그래프를 볼 것이었다. 비명을 볼 것이었다. 비상 정지 버튼은 내일도 투명한 커버 아래 있을 것이었다. 그의 손이 무릎 위에서 작게 경련했다. 버튼을 외면한 손가락들이었다. 그는 외투 주머니에서 사무실 서랍 열쇠를 꺼냈다. 차가운 금속 감촉. 내일 아침, 그는 3권의 노트를 등기우편으로 부칠 것이다. 주소는 정아의 연구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