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이 터진 것은 화요일 오후 3시, 지하 7층 환기 통로였다. 정하는 사다리 위에서 교체 작업을 하고 있었다. 40와트 직관형. 제조일 2,041년. 14년 된 형광등이었다. 정하가 소켓에서 관을 빼는 순간 유리가 깨졌다. 파편이 바닥에 흩어졌다. 형광 물질 가루가 공기 중에 퍼졌다. 정하는 고개를 돌리고 숨을 참았다. 형광 가루가 피부에 닿으면 가렵다. 지하도시 기술자들 사이에서는 상식이었다. 정하는 장갑을 벗고 팔을 털었다. 가루가 작업복 소매에 묻어 있었다. 희끄무레한 분말. 인광 물질과 수은 증기의 잔해.
그때 환기 통로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하도시 사람이 아니었다. 걸음걸이가 달랐다. 지하도시 사람들은 천장이 낮은 통로에서 몸을 숙이고 걷는다. 이 발소리의 주인은 허리를 곧게 펴고 걸었다. 구두 소리였다. 지하에서 구두를 신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났다. 키가 컸다. 180센티미터는 넘어 보였다. 지하도시의 평균 키보다 10센티미터 이상 컸다. 지상의 영양 상태가 만든 차이였다. 피부가 연두색을 띠고 있었다. 엽록체가 피하층에 분포하면 나타나는 색이었다. 광인간. 지상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남자가 정하를 보고 멈췄다. 깨진 형광등 파편을 보고 눈을 좁혔다. 그리고 형광 가루가 떠다니는 공기를 보고 한 발 물러섰다.
남자의 팔뚝에 변화가 일어났다. 피부 아래 연두색 세포가 파르르 떨렸다. 미세한 경련이었다. 남자가 팔을 잡았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통로의 비상등이 깨진 형광등의 잔해를 비추고 있었다. 비상등 주파수와 형광 가루에서 재방출되는 빛이 섞여 보라색에 가까운 파장을 만들고 있었다. 417나노미터 부근. 정하는 그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남자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마의 연두색 피부 위로 땀방울이 흘렀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팔뚝의 피부가 물집처럼 부풀어 오르는 곳이 있었다. 엽록체가 과부하로 팽창하는 것이었다.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팔뚝의 연두색이 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세포가 괴사하는 색이었다. 정하는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연두빛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남자가 정하를 올려다봤다. 눈동자 주변에도 엽록체가 있었다. 홍채가 녹색이었다. 그 녹색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빛을. 밖으로. 나가야.”
정하는 남자를 부축해 통로 밖으로 나왔다. 지하 7층 복도의 일반 조명 아래로. 남자의 팔뚝 경련이 멈췄다. 갈변된 부위는 남아 있었다. 동전 크기의 괴사 반점 3개.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팔뚝을 봤다. 그리고 정하를 봤다.
“뭐였지? 저 안에… 대체 뭐가 있었던 거야?”
“깨진 형광등입니다. 40와트짜리. 그냥 낡은 거죠.”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형광등 때문이 아니야. 빛이. 빛의 색이 달랐어. 보라색에 가까운.”
정하는 통로 안을 돌아봤다. 비상등의 붉은빛과 형광 가루의 잔광이 섞여 통로 안이 희미하게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하는 그것을 기억해 뒀다.
남자는 지상 정부의 환경 감찰관이었다. 지하도시의 공기 순환 시스템을 점검하러 내려온 것이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남자가 정하를 돌아봤다. 팔뚝의 괴사 반점을 소매로 덮은 채. 눈빛에 경계가 있었다. 문이 닫혔다. 정하는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모터 소리가 위로 올라가며 작아졌다. 엘리베이터 옆 벽에 지상 기온이 표시되어 있었다. 28도. 맑음. 자외선 지수 8. 지하 7층의 온도는 17도였다. 11도 차이. 빛의 양만큼 온도도 달랐다.
정하는 환기 통로로 돌아갔다. 깨진 형광등의 파편을 수거했다. 형광 가루를 비닐에 담았다. 비상등의 주파수를 측정했다. 620나노미터. 적색 영역. 형광 가루의 재방출 스펙트럼을 분석하려면 장비가 필요했다.
정하는 지하 4층 작업실로 돌아갔다. 작업실은 3평짜리 방이었다. 벽에 공구가 걸려 있었다. 선반에 분광기가 놓여 있었다. 10년 전 폐기된 구형 모델이었다. 정하가 직접 수리해서 쓰고 있었다. 정하는 형광 가루 샘플을 유리 슬라이드에 올렸다. 슬라이드를 분광기의 시료대에 고정했다. 분광기의 전원을 넣었다. 기계가 윙 소리를 내며 가동됐다. 10년 된 기계의 진동이 탁자를 통해 정하의 손에 전해졌다. 정하는 적색 발광 다이오드를 시료에 비췄다. 비상등과 같은 파장을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적색 비상등 빛을 재현해 조사했다. 분광기의 작은 화면에 스펙트럼이 떴다. 형광 가루가 620나노미터의 적색광을 흡수하고 415에서 420나노미터 사이의 보라색광을 재방출하고 있었다. 피크는 417나노미터.
정하는 417나노미터를 검색했다. 지하도시의 데이터베이스는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오래된 생물학 교재 파일이 있었다. 엽록체의 흡수 스펙트럼. 엽록소 에이가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파장이 430나노미터 부근이었다. 417나노미터는 그보다 약간 짧은 고에너지 자외선 경계 영역. 엽록체가 처리할 수 있는 한계 부근의 에너지. 과부하. 정하는 교재를 닫았다. 분광기 화면의 417나노미터. 남자의 팔뚝에 피었던 갈색 반점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 빛이, 그걸 만든 거였다.
정하는 분광기 화면을 캡처해 저장했다. 마우스를 쥔 손이 떨렸다. 의자에 등을 기댔지만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광합성 세포. 지상 사회 전체가 의존하는 기술. 그 심장에 박힌 파편이었다. 광합성 세포를 가진 인간의 약점. 지상 사회 전체의 약점. 정하는 작업실 의자에 앉아 천장을 봤다. 지하도시의 천장은 콘크리트였다. 정하가 태어나서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는 천장. 정하의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도 이 천장 아래에서 태어나고 죽었다. 지상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광합성 유전자를 이식받은 사람뿐이었다. 이식 비용은 연봉의 12배. 지하도시 전기 기술자의 월급으로는 평생 모아도 부족했다.
정하는 지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지하도시의 정보망은 제한적이었다. 알려진 것은 이 정도였다. 지상의 광인간들은 빛을 먹고 살았다. 하루 6시간의 직사광선이면 충분했다. 음식이 필요 없었다. 농업이 필요 없었다. 식량 생산 비용이 0이 된 사회. 하지만 그것은 지상의 이야기였다. 지하도시 사람들은 여전히 음식을 먹었다. 합성 단백질과 수경 재배 채소. 비용이 들었다. 지상은 풍요로웠고, 지하는 가난했다. 빛이 계급이 된 세상이었다. 지하도시에는 창문이 없었다. 지하 1층부터 12층까지. 인구 14만 명. 모두 형광등 아래에서 태어나 형광등 아래에서 죽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있었지만, 거주 허가 없이 올라가면 불법 체류로 강제 하송됐다. 정하는 한 번 지상을 본 적이 있었다. 7살 때. 어머니가 병원 때문에 지상에 올라갔을 때 함께 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졌다. 눈을 뜰 수 없었다. 10분 뒤 눈이 적응했을 때, 정하는 하늘을 봤다. 파란색. 끝이 없는 파란색. 정하는 울었다. 왜 울었는지 몰랐다. 어머니가 정하의 손을 잡았다.
“눈이 부시지?”
어머니가 말했다. 정하는 고개를 저었다. 눈이 부신 것이 아니었다. 넓은 것이 무서웠다.
3일 뒤, 정하의 작업실에 여자가 찾아왔다. 지상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피부가 연두색이었다.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 안에 광원 팩이 보였다. 지하에서 48시간 이상 버티기 위한 휴대용 광원. 여자가 작업실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정하를 봤다.
“3일 전에 환기 통로에서 감찰관이 세포 손상을 입었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넣지 않기로 한 목소리였다.
“보고서에 당신 이름이 올라와 있더군요. 형광등 교체 작업 중이었다고.”
정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상 보건부 소속입니다. 본론부터 하죠. 417나노미터. 당신, 그게 광합성 세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미 알고 있잖아?”
정하는 여자의 얼굴을 봤다. 연두색 피부 아래로 핏줄이 보였다. 초록색 핏줄이 아니었다. 붉은색이었다. 엽록체는 피하층에 있었지만 혈액은 여전히 붉었다. 인간의 피였다.
정하의 심장이 빨라졌다. 이 사람이 어떻게 분광기 분석까지 알고 있는지. 정하는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사고였습니다.”
정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건조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사고는 알아요.”
여자의 시선이 정하의 작업대 위 분광기를 봤다.
“문제는 사고 이후에 뭘 했느냐예요. 분광기로 스펙트럼 분석을 하셨죠?”
정하의 입이 말랐다. 여자는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코트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밀었다.
“안에 지상 거주권과 광합성 이식 바우처가 있어요. 2인분. 당신과 가족 1명.”
여자가 정하의 눈을 봤다.
“조건은 하나예요. 417나노미터에 대한 모든 기록, 당신 머릿속에 든 것까지 전부 넘겨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이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겁니다.”
정하는 여자의 얼굴을 다시 봤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광인간은 세포 재생 속도가 빨라 노화가 느렸다. 30대일 수도, 50대일 수도 있었다. 여자의 눈이 차가웠다. 차가운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었다. 이런 거래를 처음 하는 눈이 아니었다.
“…이걸 찾은 게, 내가 처음은 아니겠죠?”
정하가 물었다.
여자가 잠깐 멈췄다.
“당신이 처음은 아니에요.”
그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정하는 봉투를 봤다. 지상 거주권. 하늘을 볼 수 있는 권리. 광합성 이식 바우처. 음식에서 해방되는 권리. 정하의 어머니는 올해 62세였다. 합성 단백질에 알레르기가 있었다. 수경 재배 채소만으로는 영양이 부족했다. 매달 영양제를 사야 했다. 영양제 비용이 월급의 3분의 1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죠.”
여자가 코트 안의 광원 팩을 확인했다. 팩의 잔량 표시등이 노란색이었다. 절반 이상 소진. 지하에서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내일 아침 8시까지.”
여자가 일어섰다.
“거절하시면 다른 사람이 올 거예요. 그 사람은 봉투 대신 다른 걸 들고 오겠죠.”
여자가 나간 뒤 정하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탁자 위에 놓인 채로 봤다. 하얀 봉투. 그 안에 하늘이 들어 있었다.
정하는 봉투 옆에 분광기를 놓고 번갈아 봤다. 봉투 안의 하늘. 분광기 안의 417나노미터. 둘 다 정하의 것이 아니었다. 정하는 손바닥을 봤다. 형광 가루가 손금 사이에 아직 남아 있었다. 지문 안에 박힌 흰 가루. 이 가루가 시작이었다. 사다리 위에서 형광등이 깨지고, 가루가 공기에 퍼지고, 그 순간 감찰관이 통로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정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일생을 형광등을 갈며 살았을 것이었다. 하늘은 지상의 것이었고, 417나노미터는 우연이 만든 것이었다. 정하가 가진 것은 이 3평짜리 작업실과 늙어가는 어머니와 22년간 살아온 콘크리트 천장뿐이었다.
정하는 작업실을 나와 지하 9층으로 내려갔다. 어머니의 방이었다. 어머니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영양제를 먹고 있었다. 캡슐 3개. 물 한 잔. 어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62세의 손. 지하도시에서 62년을 산 손이었다.
“엄마. 만약에… 지상에 갈 수 있다면, 갈 거야?”
어머니가 정하를 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물어보는 거야.”
어머니가 영양제를 삼키고 물을 마셨다.
“올라가서 뭘 한단 말이냐. 내 몸은 빛으로 사는 몸이 아니야.”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빈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컵 가장자리에 맺혔던 물방울이 탁자 위로 굴렀다. 퉁퉁 부은 손마디에 62년치의 지하 습기가 고여 있는 것 같았다.
“여기가 내 집이다.”
어머니가 말했다.
“천장이 머리에 닿을 것 같아도, 여기 사람들이 내 이웃이고.”
정하는 어머니의 방을 나왔다. 문을 닫을 때 어머니가 영양제 빈 병을 쓰레기통에 넣는 소리가 들렸다. 캡슐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한 달에 12만 원. 1년에 144만 원. 어머니가 남은 생을 살아가는 데 드는 비용. 정하는 복도를 걸었다. 지하 9층의 복도는 폭이 1.8미터였다. 양쪽 벽에 파이프가 노출되어 있었다. 형광등이 2미터 간격으로 달려 있었다. 40와트. 정하가 매달 교체하는 형광등들. 이 형광등의 빛이 지하도시의 전부였다.
정하는 작업실로 돌아왔다. 분광기 앞에 앉았다. 417나노미터. 이 숫자를 넘기면 어머니와 함께 지상에 올라갈 수 있다. 하늘을 볼 수 있다. 빛을 먹고 살 수 있다. 이 숫자를 넘기지 않으면. 정하는 여자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이 온다. 봉투 대신 다른 것을 들고.
정하는 분광기를 켰다. 화면에 417나노미터의 스펙트럼 피크가 떴다. 날카롭고 좁은 피크. 이 빛이 지상 사회의 약점이었다. 광합성에 의존하는 사회의 유일한 취약점. 이것을 넘기면 지상은 이 정보를 묻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지하도시 사람들은 계속 콘크리트 천장 아래에서 합성 단백질을 먹고 살 것이다.
정하는 분광기의 데이터를 메모리 칩에 저장했다. 칩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작았다. 손톱 크기. 이 안에 스펙트럼 데이터, 형광 물질 성분 분석, 괴사 반응 관찰 기록이 들어 있었다. 정하는 칩을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봉투를 집어 들었다. 열었다. 안에 카드 2장이 있었다. 지상 거주 허가증. 광합성 이식 시술 바우처. 정하는 카드를 봤다. 카드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무기명. 누구든 사용할 수 있었다. 카드 표면에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다. 태양 모양. 정하가 본 적 없는 것의 모양.
정하는 카드를 봉투에 다시 넣었다. 봉투를 탁자 위에 놓았다. 안주머니의 칩을 만졌다. 칩이 체온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정하는 봉투 안의 카드를 다시 꺼냈다. 홀로그램 태양이 형광등 빛을 받아 무지개색으로 번졌다. 어머니의 떨리는 손이 떠올랐다. 영양제를 삼키는 62세의 목. 관절이 부은 손가락. 정하는 카드를 봉투에 넣고, 잠시 눈을 감았다.
정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작업실 구석의 복사기로 갔다. 칩을 복사기에 넣었다. 복사본을 만들었다. 원본을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복사본을 작업실 바닥의 타일을 들어 올려 그 아래에 숨겼다. 타일을 다시 덮었다. 타일 사이의 틈이 다른 타일과 같았다. 눈에 띄지 않았다. 정하는 타일 위에 공구 상자를 올려놓았다. 무게를 느꼈다. 공구 상자의 무게가 아닌, 그 아래에 있는 것의 무게를.
다음 날 아침 7시 50분. 여자가 다시 왔다. 어제와 같은 검은 코트. 광원 팩의 잔량 표시등이 빨간색이었다. 거의 소진. 지하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여자의 이마에 미세한 땀이 맺혀 있었다. 광합성 세포가 빛 부족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하는 봉투를 돌려줬다. 안주머니에서 칩을 꺼내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가 칩을 받아 들었다.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여자가 칩을 검사기에 넣어 데이터를 확인했다. 화면에 스펙트럼 그래프가 떴다. 417나노미터의 피크.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처음으로 미세하게 풀려 있었다. 정하는 그게 진심에서 우러난 안도인지, 아니면 잘 끝낸 일에 대한 만족감인지 알 수 없었다.
“거주 허가증은 일주일 내에 발급됩니다. 이식 시술 일정도 잡힐 거예요.”
여자가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의 형광등 빛이 잠깐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며 사라졌다. 정하는 작업실에 혼자 남았다. 여자의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지하도시에는 없는 냄새. 꽃 냄새 같은 것. 정하는 그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바닥의 타일을 봤다. 타일 아래에 복사본이 있었다. 정하는 타일 위에 서서 발밑의 데이터를 느꼈다. 느낄 수 없었지만,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하는 창문 없는 작업실에서 천장의 형광등을 올려다봤다. 40와트. 주파수 혼합광. 이 빛 아래에서 태어나고 이 빛 아래에서 살았다. 22년. 정하가 전기 기술자가 된 것은 18살 때였다. 4년 동안 형광등을 갈았다. 매달 평균 47개. 4년이면 2,256개. 깨진 것, 깜빡이는 것, 수명이 다한 것. 모든 빛의 죽음을 봐 왔다. 그 죽어가는 빛 중 하나가 지상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무기였다는 것을 4년 동안 몰랐다. 곧 이 빛을 떠나 태양 아래로 갈 것이었다. 피부가 연두색으로 변할 것이었다. 빛을 먹고 살 것이었다. 그리고 417나노미터의 빛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었다.
정하는 형광등을 껐다. 작업실이 어두워졌다. 비상등의 붉은 빛만 남았다. 정하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었다. 22년 동안 정전을 수없이 겪었다. 지하 7층에서 형광등을 갈다가 스위치가 내려가면,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둠. 지하도시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편이었다. 광인간에게 그것은 죽음이었다. 아직은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광인간이 되면 이 어둠이 공포가 될 것이었다. 48시간의 어둠이 기아가 될 것이었다.
정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칩이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바닥 아래에 복사본이 있었다. 정하는 그것을 여자에게 말하지 않았다. 왜 복사본을 숨겼는지, 정하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지상에 대한 보험인가? 아니면 지하에 남겨질 14만 명에 대한 부채감인가. 그 사람들은 이 데이터의 존재를 모른다. 정하만 알고 있다. 그리고 곧 정하는 지상으로 올라간다. 연두색 피부가 될 것이다. 빛을 먹고 살 것이다. 그리고 417나노미터의 빛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제 위협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었다.
형광등을 다시 켰다. 40와트의 빛이 작업실을 채웠다. 정하는 그 빛 아래에서 공구를 정리했다. 오늘도 지하 7층 환기 통로의 형광등을 교체해야 했다. 14년 된 형광등들. 정하는 새 형광등 상자를 열었다. 40와트 직관형. 제조일 2,055년. 새 형광등의 유리가 매끄러웠다. 안에 형광 물질이 고르게 도포되어 있었다. 이 형광 물질이 어떤 파장으로 빛을 재방출하는지 정하는 이제 알고 있었다.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정하는 새 형광등을 들고 작업실을 나섰다. 복도의 형광등이 정하의 그림자를 바닥에 만들었다. 그림자가 정하보다 한 발 앞서 걸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면 그림자의 방향이 바뀔 것이었다. 태양은 위에서 비추니까. 정하는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복도 끝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3명. 공을 차고 있었다. 공이 벽에 맞아 튀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반사되어 울렸다. 형광등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들. 이 아이들의 피부는 연두색이 아니었다. 정하의 피부도 아직은 아니었다.
발밑에, 타일 아래에, 417나노미터가 잠들어 있었다. 정하는 새 형광등을 어깨에 메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의 벽에 누군가 스프레이로 글씨를 써 놓았다.
“우리는 빛이 필요 없다.”
오래된 낙서였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있었다. 정하는 그 글씨를 지나쳐 내려갔다. 지하 7층 환기 통로. 어제 형광등이 깨진 곳. 소켓이 비어 있었다. 정하는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갔다. 새 형광등을 소켓에 끼웠다. 돌렸다. 불이 켜졌다. 40와트의 빛이 통로를 채웠다. 정하는 사다리 위에서 그 빛을 봤다. 어제와 같은 빛이었다. 달라진 것은 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