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자라는 것들

2026. 3. 21. · 9,025자 · 약 11분

자라는 것들 썸네일
17

손녀의 머리카락은 17센티미터였다. 장례식장에서 관 속을 들여다봤을 때 정수가 처음 본 것은 얼굴이 아니라 머리카락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퍼져 있었다. 17센티미터. 손녀는 3살이었다. 교통사고였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아이였다. 유전자 편집 백신을 맞지 않은 아이. 백신 접종 연령은 5세부터였으므로. 3살 아이의 세포는 자유로웠다. 마음대로 분열하고, 자라고, 변했다. 머리카락이 자랐다. 손톱이 자랐다. 무릎에 생긴 상처가 3일 만에 아물었다. 정수는 손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딸이 정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버지, 그만.”

정수는 손을 거두었다. 조문객들이 줄 서 있었다. 모두 변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20년 전과 같은 얼굴들이 3살짜리 아이의 관 앞에 서 있었다. 아이만 달랐다. 아이만 자라고 변하는 중이었다. 자라다가 멈춘 것이었다. 부드러웠다. 살아 있는 것의 감촉이었다.

정수의 머리카락은 20년째 같은 길이였다. 4센티미터. 2071년에 유전자 편집 백신을 맞은 뒤로 한 번도 자라지 않았다. 접종은 동네 보건소에서 했다. 팔에 주사를 맞았다. 아프지 않았다. 간호사가 말했다. 내일부터 세포 분열이 통제됩니다. 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를 잃은 지 3년 뒤였다. 암이 사라진다는 말에 망설임이 없었다. 주사를 맞고 집에 왔다. 다음 날 아침, 면도를 하려다 멈췄다. 수염이 자라지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이 어제와 정확히 같았다. 그날이 멈춤의 시작이었다. 이발소에 간 적이 없었다. 20년간. 손톱도 자라지 않았다. 손톱깎이가 필요 없었다. 면도도 필요 없었다. 수염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정수의 몸은 67세였지만 47세의 몸과 같았다. 주름이 늘지 않았다. 피부가 변하지 않았다. 백신이 세포 분열을 통제한 뒤로 노화가 극도로 느려졌다. 암이 사라진 대신 변화가 사라졌다. 안전하되 정지된 몸.

장례식장을 나온 뒤 정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버스를 탔다. 서울에서 춘천까지. 1시간 40분. 버스 안에서 정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 있었다. 관 속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 17센티미터. 정수는 그것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가늘었다. 하지만 있었다. 자란 것이었다. 세포가 분열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2071년에 암이 사라졌다. 유전자 편집 백신. 이름은 셀가드였다. 모든 체세포에 분열 횟수 제한을 걸었다. 세포가 일정 횟수 이상 분열하면 자동으로 멈추게 했다. 암세포는 무한히 분열하는 세포였으므로, 분열 제한이 걸리면 암이 될 수 없었다. 암 사망률이 0퍼센트가 됐다. 폐암, 위암, 간암, 대장암, 췌장암. 모든 암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축하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의학적 성취.

하지만 부작용이 있었다. 세포 분열이 통제되면서 몸이 변하지 않게 됐다.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백신 접종 시점의 길이에서 멈췄다. 접종 전에 짧게 자른 사람은 평생 짧은 머리였다. 길게 기른 사람은 평생 긴 머리였다. 손톱도 멈췄다. 상처 회복이 3배 느려졌다. 베인 상처가 아무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뼈가 붙는 데 6개월. 피부 재생이 극도로 느렸다. 노화도 느려졌다. 20년이 지나도 10년 정도만 늙었다. 사람들의 외모가 비슷해졌다. 변하지 않으므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20년 전과 같은 얼굴이었다. 같은 머리 길이, 같은 피부, 같은 손톱. 이발소가 문을 닫았다. 미용실이 문을 닫았다. 손톱 가게가 사라졌다. 변하지 않는 몸에는 관리가 필요 없었다. 성형외과만 남았다. 변하지 않는 몸에서 변화를 원하면 수술밖에 없었다. 백신 접종 전에 짧은 머리를 고른 사람이 긴 머리를 원하면 가발을 썼다. 가발 시장이 커졌다. 인조 가발. 자라지 않는 머리카락 위에 씌우는 가짜 머리카락. 정수는 가발을 쓰지 않았다. 4센티미터가 싫지 않았다. 싫은 것은 4센티미터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정수가 춘천에서 내린 것은 오후 3시였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탔다. 목적지를 말했다. 기사가 정수를 봤다.

“거기는 산속인데. 아무것도 없어요.”

“알아요.”

택시가 시내를 벗어났다. 기사의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야생세포운동 단속 강화. 보건복지부, 올해 불법 해제 시술소 47곳 적발. ' 정수는 라디오를 들었다. 47곳. 적발되지 않은 곳은 더 많을 것이었다. 도로가 좁아졌다. 나무가 많아졌다. 15분 뒤 택시가 멈췄다. 산 입구. 정수가 내렸다. 택시가 떠났다. 정수는 산길을 걸었다. 비포장도로. 20분. 숨이 찼다. 67세의 폐. 백신이 노화를 늦췄지만 없앤 것은 아니었다. 발밑에서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봄인데 겨울의 낙엽이 남아 있었다. 낙엽은 나무가 버린 세포였다. 나무는 세포를 버리고 새 세포를 만들었다. 순환. 낙엽 사이로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죽은 것과 새로 자라는 것이 같은 땅에 있었다. 정수의 몸에는 버려지는 세포가 없었다. 새로 만들어지는 세포도 없었다.

산 중턱에 건물이 하나 있었다. 주변에 텃밭이 있었다. 상추, 배추, 무. 하은이 기르는 것일 터였다. 채소는 자라고 있었다. 흙 위로 잎이 솟아 있었다. 자라는 것들 사이에 컨테이너가 있었다. 컨테이너 3개를 이어 붙인 구조물. 간판은 없었다. 문 옆에 작은 종이 하나가 붙어 있었다. '야생'. 한 글자. 정수는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안에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것만으로 정수는 알았다. 이 여자는 백신을 해제한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었다. 뿌리 쪽이 검고 끝이 밝았다. 새로 자란 머리카락과 오래된 머리카락의 색이 달랐다. 살아 있는 머리카락. 정수는 그것을 보고 숨을 들이쉬었다.

“누구세요?”

“해제 받으러 왔습니다.”

여자가 정수를 봤다. 정수의 4센티미터짜리 머리카락. 20년간 변하지 않은 얼굴. 백신이 걸린 몸.

“소개는요?”

“없습니다.”

“소개 없이는 안 돼요.”

“손녀가 죽었어요.”

여자가 멈췄다.

“3살이었어요. 머리카락이 자라는 아이였어요.”

여자는 정수를 10초간 봤다. 문을 더 열었다.

“들어오세요.”

컨테이너 안은 좁았다. 의자 2개, 테이블 1개, 냉장고 1대, 노트북 1대. 벽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세포에게 자유를. ' 야생세포운동의 슬로건이었다. 테이블 위에 현미경이 하나 놓여 있었다. 슬라이드 위에 세포 샘플이 올려져 있었다. 분열 중인 세포. 하은이 매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자유롭게 분열하는 세포. 하은은 그것을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느꼈을 것이었다. 세포가 둘로 갈라지는 순간. 하나가 둘이 되는 순간. 셀가드가 막아놓은 그 순간. 여자가 의자를 가리켰다. 정수가 앉았다.

“해제가 뭔지 아세요?”

“셀가드 백신의 분열 제한을 푸는 거.”

“맞아요. 제가 유전자 편집으로 분열 제한 코드를 비활성화해요. 그러면 세포가 다시 자유롭게 분열해요. 머리카락이 자라요. 손톱이 자라요. 상처가 빨리 나아요.”

“암도 다시 생길 수 있죠.”

여자가 정수를 봤다.

“네. 암도 다시 생길 수 있어요. 분열 제한이 풀리면 세포가 무한히 증식할 가능성이 돌아와요. 확률은 원래 인류와 같아요. 백신 이전의 확률. 평생 동안 암에 걸릴 확률 약 40퍼센트.”

“알아요.”

“왜 해제를 원하세요?”

정수는 주머니에서 머리카락을 꺼냈다. 17센티미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갈색 머리카락 한 올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손녀 거예요.”

여자가 머리카락을 봤다.

“이게 자란 거예요. 세포가 분열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3살짜리 아이의 몸에서. 제 몸에서는 20년간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어요.”

정수는 자기 손을 봤다. 손톱이 20년 전과 같은 길이였다. 같은 모양. 한번은 칼에 손을 베었다. 2주 걸렸다. 피부가 아무는 데. 피가 나는 동안 정수는 자기 몸이 살아 있는지 의심했다.

“변하고 싶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이름은 하은이었다. 하은은 해제 시술을 3년간 해왔다. 불법이었다. 셀가드 백신 해제는 생명윤리법 위반. 벌금 5,000만 원 또는 징역 3년. 하은은 원래 유전공학 연구원이었다. 셀가드 백신 개발 팀에 있었다. 백신의 부작용을 처음 보고한 사람 중 하나였다. 보고서가 무시됐다. 암 사망률 0퍼센트라는 성과가 너무 컸다. 부작용은 감수할 만하다고 정부가 판단했다. 하은은 연구소를 나왔다. 나올 때 데이터를 가지고 나왔다. 셀가드의 설계도. 해제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개발 팀 12명뿐이었다. 하은은 그중 유일하게 해제를 실행한 사람이었다. 나머지 11명은 알면서도 하지 않았다. 암 사망률 0퍼센트를 깨는 것이 무서웠으므로. 3년 전부터 산속에서 해제 시술을 하고 있었다.

“비용은요?”

“없어요. 돈 안 받아요.”

“왜요?”

“제가 만든 백신이니까요. 제가 만든 감옥이니까.”

정수가 하은을 봤다. 하은의 눈가에 주름이 있었다. 잔주름. 해제를 받은 사람의 주름. 자라는 주름. 정수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후회해요?”

“후회라기보다. 암을 없앤 건 맞아요. 그건 좋은 일이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없앤 게 암만이 아니었어요. 변화를 없앴어요. 자라는 것, 늙는 것, 흰머리가 나는 것. 그게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거예요. 세포가 분열하는 거. 그걸 막으면 암도 막히지만 삶도 막혀요.”

하은이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 주사기가 있었다. 작은 바이알 3개. 투명한 액체. 하은이 주사기에 액체를 채웠다.

“팔 걷으세요.”

정수가 왼팔 소매를 걷었다. 하은이 알코올 솜으로 팔을 닦았다. 차가웠다.

“맞으면 48시간 뒤부터 변화가 시작돼요.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해요. 손톱도. 상처 회복 속도가 원래대로 돌아와요.”

“암은요?”

“세포가 자유로워지면 암이 생길 수 있어요. 즉시는 아니에요. 하지만 가능성이 돌아와요. 정기 검진을 받으셔야 해요.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할 수 있어요. 백신 이전 시대에도 암은 치료 가능한 경우가 많았어요.”

“알아요. 제 아내가 암으로 죽었어요. 2068년에. 백신 나오기 3년 전에.”

하은의 손이 멈췄다. 주사기를 든 손.

“유방암이었어요. 발견이 늦었어요.”

“그런데 해제를 원하세요? 암이 다시 올 수 있는데?”

정수가 하은을 봤다. 하은의 눈가에 주름이 있었다. 잔주름. 해제를 받은 사람의 주름. 자라는 주름. 정수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아내가 죽은 뒤에 백신이 나왔어요. 저는 맞았어요. 암이 무서웠으니까. 아내를 죽인 것과 같은 병이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맞았어요. 20년 동안 안전했어요. 20년 동안 변하지 않았어요.”

정수는 자기 손을 봤다.

“20년 동안 아내의 무덤에 갈 때마다 저는 똑같은 모습이었어요. 아내가 마지막으로 본 제 모습 그대로. 주름 하나 늘지 않은 채로. 머리카락 하나 길어지지 않은 채로. 아내는 변했어요. 병으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살이 빠지고, 피부가 변했어요. 아내의 몸은 끝까지 변했어요. 저는 변하지 않았어요.”

하은이 주사기를 내려놓았다.

“맞으시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볼게요.”

“네.”

“진짜 원하는 게 뭐예요? 머리카락이 자라는 거예요? 아니면 다른 거예요?”

정수가 잠시 말이 없었다. 컨테이너 벽에 붙은 포스터를 봤다. '세포에게 자유를. ' 정수가 말했다.

“늙고 싶어요.”

하은이 정수를 봤다.

“아내처럼 변하고 싶어요. 무덤에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이고 싶어요. 주름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등이 굽고. 살아 있으면 변해야 하잖아요. 변하지 않는 건 죽은 거예요. 돌멩이예요.”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사기를 다시 들었다. 정수의 팔에 바늘을 찔렀다. 정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팠다. 하은이 천천히 액체를 주입했다. 10초. 바늘을 빼고 솜을 대었다. 정수가 솜을 눌렀다.

“됐어요.”

“이게 끝이에요?”

“네. 48시간 뒤부터 몸이 변하기 시작해요.”

하은이 덧붙였다.

“한 가지 더요. 해제를 받은 분들 중에 처음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보고 우는 분이 많아요. 준비하세요.”

“울어본 지 오래됐어요.”

“그것도 변화예요.”

하은이 웃었다. 정수도 웃었다. 컨테이너 안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잠깐 머물렀다.

정수는 컨테이너를 나왔다. 산을 내려갔다. 걸으면서 왼팔을 봤다. 주사 자국. 솜에 피가 묻어 있었다. 정수는 솜을 떼고 주사 자국을 봤다. 빨간 점 하나. 피가 맺혀 있었다. 정수는 그 피를 봤다. 이 상처가 얼마나 걸려서 아물지 궁금했다. 지금은 2주. 48시간 뒤에는 3일이면 아물 것이었다. 세포가 다시 분열하면. 세포가 다시 자유로워지면.

산을 내려오는 길에 바람이 불었다. 3월이었다. 나무에 새 잎이 나오고 있었다. 연두색 잎. 세포가 분열해서 만들어낸 잎. 나무의 세포에는 셀가드가 없었다. 나무는 자유롭게 자랐다. 가지가 뻗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나무에도 혹이 생겼다.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부분. 하지만 나무는 혹이 있어도 살았다. 혹을 안고 자랐다.

정수는 혹이 있는 나무 하나를 봤다. 가지가 구부러져 있었다. 혹 때문에. 하지만 나무는 서 있었다. 잎이 나 있었다. 정수는 나무의 혹을 만졌다. 나무껍질이 거칠었다. 손바닥에 질감이 느껴졌다. 정수의 손바닥은 20년간 변하지 않은 손바닥이었다. 거친 나무와 매끄러운 손. 48시간 뒤면 이 손에도 굳은살이 박힐 수 있을 것이었다. 단단했다. 울퉁불퉁했다. 나무가 자라면서 생긴 것이었다. 자란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것. 울퉁불퉁한 것. 혹이 생길 수 있는 것.

터미널로 돌아왔다. 버스를 기다렸다. 30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옆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남자. 남자의 머리카락이 짧았다. 3센티미터쯤. 20년간 같은 길이일 머리카락. 남자가 정수를 봤다. 정수도 남자를 봤다. 둘 다 변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버스 아직 안 왔어요?”

“네. 10분 뒤에 온다고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손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작은 상처. 아마 2주는 걸릴 것이었다. 셀가드를 맞은 몸에서는. 정수는 자기 머리를 만졌다. 4센티미터. 48시간 뒤면 자라기 시작할 머리카락. 정수는 그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67세에 처음으로 이발소에 갈 이유가 생기는 것.

버스가 왔다. 정수가 탔다. 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춘천에서 서울까지 1시간 40분. 정수는 주머니에서 손녀의 머리카락을 꺼냈다. 17센티미터. 창밖의 빛에 비춰봤다. 갈색이 금색으로 보였다. 정수는 머리카락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버스 창밖으로 강이 보였다. 북한강. 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은 멈추지 않았다. 봄에는 녹은 눈이 흘러들고, 여름에는 비가 불리고, 가을에는 잔잔해지고, 겨울에는 얼었다. 강도 변했다. 정수도 이제 변할 것이었다.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였다. 혼자 사는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었다. 거울이 있었다. 현관 옆 벽에. 정수는 거울을 봤다. 20년간 변하지 않은 얼굴. 47세의 모습. 아내가 마지막으로 본 얼굴. 정수는 거울 속의 자기를 봤다. 다음 주에 아내의 무덤에 갈 것이었다. 기일이었다. 20번째 기일. 매년 같은 얼굴로 갔다. 올해는 다를 것이었다. 아주 조금. 0.1센티미터만큼. 아내는 알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수는 알 것이었다. 자기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48시간 뒤면 이 얼굴이 변하기 시작한다. 주름이 생긴다. 머리카락이 자란다. 어쩌면 하얗게 변한다. 정수는 그것이 기다려졌다. 오래간만이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20년간 기다릴 것이 없었다. 변하지 않는 몸에서는 내일이 오늘과 같았다. 20년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 얼굴. 이제 정수는 아내가 보지 못한 얼굴이 될 것이었다.

정수는 거실에 앉았다. 아내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2067년. 아내가 건강했을 때의 사진. 웃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길었다. 검은 머리카락. 아내의 머리카락은 항상 자라고 있었다. 셀가드 이전의 세상에서. 미용실에 다녔다. 파마를 했다. 염색을 했다. 머리카락이 자랐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미용실에 간 것은 항암 치료 시작 전이었다. 짧게 잘랐다. 어차피 빠질 머리카락. 미용사가 울었다고 아내가 말했다. 아내는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다시 자라잖아.”

다시 자라지 않았다. 정수는 사진을 봤다. 아내의 머리카락. 손녀의 머리카락. 둘 다 자라는 머리카락이었다. 정수의 머리카락만 20년째 4센티미터였다.

정수는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었다. 반찬이 있었다. 밥을 했다. 된장찌개를 끓였다. 아내가 좋아하던 레시피. 두부를 넣고 호박을 넣었다. 혼자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팔의 주사 자국을 봤다. 빨간 점. 피딱지가 생기고 있었다. 아물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수는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48시간 뒤. 2일 뒤. 세포가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언젠가, 그 자유로운 세포 중 하나가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암이 될 수도 있다. 아내처럼. 정수는 그 가능성을 생각했다. 무섭지 않았다. 아내가 암으로 죽었을 때는 무서웠다. 그래서 백신을 맞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달랐다. 두려운 것은 암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밤이었다. 정수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어둠 속에서 자기 손을 올려다봤다. 손톱. 20년간 같은 길이. 이틀 뒤면 자라기 시작한다. 정수는 손을 내렸다. 눈을 감았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병원 침대에서의 얼굴. 머리카락이 빠진 얼굴. 변한 얼굴. 살아 있었으므로 변한 얼굴. 정수는 눈을 떴다. 바지 주머니에서 머리카락을 꺼냈다. 손녀의 머리카락. 17센티미터. 정수는 머리카락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누웠다.

48시간이 지나면, 정수의 몸이 변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세포가 분열할 것이었다. 머리카락이 자랄 것이었다. 손톱이 길어질 것이었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었다. 그리고 정수는 늙을 것이었다. 주름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하얘지고, 등이 굽을 것이었다. 살아 있는 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암이 생길 수도 있었다.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확률 40퍼센트. 정수는 그 확률을 안고 눈을 감았다. 변하는 몸으로, 자라는 세포로, 살아 있는 채로. 정수는 자기 머리카락을 만졌다. 4센티미터. 이틀 뒤면 4.1센티미터가 될 것이었다. 0.1센티미터. 보이지 않는 변화. 하지만 변화였다. 20년 만의 변화.

탁자 위에 머리카락 한 올이 놓여 있었다. 17센티미터.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었다.

변하지 않는 안전과 변할 수 있는 자유 사이에서, 인간은 어느 쪽을 살아 있는 것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런 이야기는 어때요?

← 목록으로
자라는 것들 | fic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