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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피

2026. 3. 11. · 9,371자 · 약 11분

멈추지 않는 피 썸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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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가 시작된 것은 새벽 3시, 경부고속도로 천안 구간이었다. 택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왼쪽 콧구멍에서 뭔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손등으로 닦았다. 검붉은 피가 묻었다. 택호는 티슈를 뽑아 코에 대고 계속 운전했다. 화물 트럭 25톤. 적재함에 냉동 수산물 18톤. 부산 자갈치시장까지 새벽 6시 도착 예정이었다. 코피 정도로 멈출 수 없었다.

5분이 지나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티슈가 3장째 젖었다. 택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코를 눌렀다. 콧속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뜨거운 것이 콧구멍 안쪽 벽을 타고 흘렀다. 핏덩이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삼켰다. 비릿한 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택호는 다시 고개를 세우고 전방을 봤다. 어둠 속에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 반사판이 점선처럼 이어져 있었다.

10분째. 피가 멈추지 않았다. 택호는 갓길로 트럭을 세웠다. 비상등을 켰다. 주황색 불빛이 깜빡거렸다. 택호는 운전석에서 티슈 한 뭉치를 코에 대고 앉아 있었다. 피가 티슈를 적시고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손등이 빨갰다. 택호는 자기 코피를 본 적이 있었다. 어릴 때. 여름에 더워서. 그때는 5분이면 멈췄다. 지금은 10분이 넘었다. 멈추지 않았다.

택호는 휴대폰을 꺼내 주치의 번호를 찾았다. 새벽 3시에 전화를 거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신호가 갔다. 4번 만에 받았다. 잠에서 깬 목소리였다.

“선생님, 저예요, 박택호. 나노큐어 맞았던. 지금 코피가 안 멈춰요. 15분 넘었어요.”

전화기 너머로 잠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의 목소리에서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어디십니까? 위치부터 말씀하세요.”

“경부고속도로요. 천안 지나서.”

“마지막 나노큐어 투여가 언제였죠?”

“4개월 전이요. 3차 투여.”

다시 흐른 침묵은 아까보다 무거웠다. 전화기 너머에서 의사가 뭔가를 빠르게 타이핑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택호 씨, 잘 들으세요.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응급실로 가셔야 합니다. 이건… 나노큐어 오작동일 가능성이 큽니다. 3개월이 지나면 입자가 정상 세포를 공격 대상으로 재분류하는 희귀 사례가 보고된 게 있거든요.”

택호는 코에 댄 티슈를 움켜쥐었다. 축축하고 뜨뜻미지근한 감촉. 이게 그냥 코피가 아니었다.

“정상 세포를… 공격한다고요? 그럼 이 피가…”

“나노큐어는 양자 얽힘으로 암세포의 비정상 분열 패턴을 감지해서 파괴합니다. 그런데 3개월 이상 체내에 있으면, 정상 세포의 자연 분열까지 비정상으로 학습하기 시작해요. 지금 코피가 나는 건, 입자가 코 점막의 정상 세포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택호는 코에 대고 있던 티슈를 봤다. 빨간색이 아니었다. 검붉은색.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다. 정상 출혈의 색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신 자기장 소거 시술을 받으셔야 해요. 강한 자기장으로 나노 입자의 양자 상태를 초기화하는 겁니다. 문제는 시술 장비가 있는 병원이 전국에 3곳뿐이에요. 서울, 대전, 부산.”

의사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입자의 오분류가 시작되면 48시간 안에 시술을 받아야 합니다. 48시간이 지나면 입자가 주요 장기 세포까지 공격하기 시작해요. 그때는.”

의사가 말을 멈췄다. 택호는 숨을 죽였다. 전화기 너머로 의사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는 손상된 장기를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택호는 시계를 봤다. 새벽 3시 17분. 48시간. 모레 새벽 3시 17분까지. 택호는 트럭 키를 돌렸다.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돌렸다. 엔진이 걸걸거리다 꺼졌다. 택호는 세 번째로 키를 돌렸다. 엔진이 헛돌았다.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대시보드의 경고등이 일제히 켜졌다. 빨간 불빛들이 어둠 속에서 택호의 얼굴을 비추었다.

택호는 트럭에서 내렸다. 갓길의 아스팔트가 새벽 냉기로 차가웠다. 비상등의 주황빛이 택호의 얼굴을 깜빡이며 비췄다. 트럭의 앞부분을 열었다. 엔진에서 냉각수 냄새가 났다. 라디에이터 호스가 터져 있었다. 녹색 냉각수가 엔진 아래로 흘러 아스팔트에 고여 있었다. 수리 없이는 움직일 수 없었다.

택호는 고속도로를 봤다. 새벽 3시의 경부고속도로. 차가 거의 없었다. 간간이 화물 트럭이 지나갈 뿐이었다. 택호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긴급 견인 서비스에 전화를 걸었다. 대기 시간 2시간. 택호는 전화를 끊고 갓길에 서서 코피를 닦았다.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티슈가 떨어졌다. 택호는 트럭 캐빈에서 수건을 꺼내 코에 대고 눌렀다.

대전까지 60킬로미터. 택호는 도로 표지판을 봤다. 걸어갈 수 없는 거리였다. 택호는 고속도로에 서서 지나가는 차를 봤다. 손을 들었다. 화물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택호는 계속 손을 들었다. 새벽 3시 반. 고속도로 갓길에서 피 묻은 수건을 코에 대고 서 있는 남자.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택호는 갓길에 서서 15분을 기다렸다. 7대의 차가 지나갔다.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고속도로의 어둠이 택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갓길 너머로 논이 펼쳐져 있었다. 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3월의 빈 논. 바람이 불었다. 택호의 작업복 지퍼를 올렸다. 목까지. 코에서 피가 턱으로 흘러 작업복 깃에 묻었다. 택호는 트럭 캐빈으로 돌아갔다. 히터가 꺼져 있어서 안이 차가웠다. 택호는 코에서 수건을 뗐다. 수건이 검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택호는 거울을 봤다. 콧구멍 아래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입술 위까지 피가 흘러내려 있었다. 택호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자기 몸을 살폈다. 왼쪽 팔뚝 안쪽에 작은 멍이 있었다. 어제는 없었다. 손등에도 하나. 피부 아래에서 모세혈관이 터지고 있었다.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정상 세포를 공격 대상으로 재분류. 혈관벽도 정상 세포였다. 지금 내 몸 안에서, 나를 살렸던 그것들이 모세혈관을 터뜨리고 있었다.

택호는 7개월 전을 떠올렸다. 폐암 3기 진단. 왼쪽 폐 상엽에 4.7센티미터 종양. 림프절 전이 2곳. 의사가 나노큐어를 권했다. 양자 얽힘 기반 나노 입자 치료제. 입자가 혈류를 타고 암세포를 찾아가 파괴한다. 항암제와 달리 정상 세포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부작용이 거의 없다고 했다. 택호는 3차에 걸쳐 나노큐어를 투여받았다. 종양이 줄었다. 2차 투여 후 3.1센티미터. 3차 투여 후 0.8센티미터. 의사가 말했다. 경과가 좋다고. 완치에 가깝다고. 3차 투여가 끝난 날, 택호는 병원 주차장에서 트럭 시동을 걸었다. 팔에 주사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프지 않았다. 항암제를 맞은 동료 운전사를 본 적이 있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구역질로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그 동료는 6개월 쉬었다. 돌아왔을 때 노선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있었다. 택호는 쉬지 않았다. 나노큐어 투여 다음 날부터 운전했다. 몸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식욕도 정상이었다. 체력도. 나노큐어가 몸 안에서 조용히 암을 지우고 있는 동안 택호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서울에서 부산, 부산에서 서울. 매주 3번. 택호는 다시 트럭에 올라 운전을 시작했다. 나노큐어 덕분에 일을 쉬지 않아도 됐다. 항암제를 맞았다면 구토와 탈모로 운전을 못 했을 것이었다.

택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치의였다.

“박택호 씨, 대전 충남대학교병원에 연락했습니다. 자기장 소거 시술 가능 상태입니다. 얼마나 빨리 올 수 있습니까?”

“트럭이 고장 났습니다. 견인차 대기 2시간.”

전화기 너머로 키보드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위치가 천안이면 대전까지 60킬로미터 정도. 견인차가 오면 바로 대전으로 가세요. 트럭은 나중에 처리하고요.”

“화물이 있습니다. 냉동 수산물 18톤. 새벽 6시까지 부산에.”

의사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박택호 씨! 화물 얘기가 지금 나옵니까? 이건 목숨이 달린 문제예요. 입자가 혈관벽을 계속 공격하면 전신에서 출혈이 터질 겁니다. 내장 출혈, 뇌출혈, 뭐든 올 수 있어요!”

택호는 적재함 쪽을 봤다. 냉동 수산물 18톤. 위탁 운송이었다. 배송 실패하면 위약금 340만 원. 택호의 월 수입이 380만 원이었다. 거의 한 달치. 택호는 트럭 대출금을 아직 갚고 있었다. 잔금 2,400만 원. 나노큐어 치료비 본인 부담금 1,800만 원도 12개월 할부로 내고 있었다. 월 150만 원.

택호는 수건을 코에 다시 대고 눌렀다. 피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른쪽 콧구멍에서도 피가 나기 시작했다. 양쪽. 택호는 수건을 코 전체에 눌렀다. 입으로 숨을 쉬었다. 입안이 말랐다. 비릿한 맛이 혀 위에 남아 있었다.

새벽 4시. 택호는 트럭 캐빈에 앉아 있었다. 히터가 없어서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보였다. 팔뚝의 멍이 커지고 있었다. 아까 2센티미터였던 것이 3센티미터. 새로운 멍이 손목 안쪽에 생겼다.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노 입자가 모세혈관 내피세포를 암세포로 오분류하고 파괴하고 있었다. 택호는 셔츠를 올려 배를 봤다. 왼쪽 옆구리에 넓은 멍이 지고 있었다. 손바닥 크기. 누르면 둔한 통증이 있었다. 비장 쪽이었다. 택호는 셔츠를 내렸다. 자기 몸이 전쟁터가 된 느낌이었다. 적군은 없었다. 아군이 오발하고 있었다. 7개월 전 택호를 구한 아군이.

택호는 휴대폰으로 검색했다. '나노큐어 오분류 사례. ' 결과가 떴다. 뉴스는 없었다. 학술지 초록이 하나 있었다. 영문이라 읽을 수 없었다. 커뮤니티 게시글이 있었다. '나노큐어 투여 후 4개월째, 원인 불명의 출혈이 계속됩니다. ' 댓글 12개. '저도 같은 증상입니다. ' '제조사에 연락했지만 임상에서 보고된 바 없다고 합니다. ' 택호는 게시글의 날짜를 봤다. 2주 전. 그 사이에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나노큐어 제조사 바이오넥스의 시가총액은 87조 원이었다. 지난달 나노큐어의 분기 매출이 4조 원을 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택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택호는 캐빈 천장을 봤다. 천장에 딸의 사진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은지. 올해 14살. 이혼 후 전처가 키우고 있었다. 택호가 나노큐어를 맞기로 한 이유 중 하나가 은지였다. 양육비를 보내려면 일을 계속해야 했다. 항암제를 맞으면 6개월을 쉬어야 했다. 6개월 동안 양육비를 보내지 못하면. 택호는 사진 속 은지의 얼굴을 봤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웃고 있었다. 택호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수건을 다시 코에 눌렀다.

새벽 4시 20분. 택호의 코피가 멈추지 않은 채 1시간이 넘었다. 수건이 피로 묵직해졌다. 택호는 두 번째 수건을 꺼냈다. 캐빈에 수건이 3장 있었다. 택호는 자기 체온을 느꼈다. 오한이 왔다. 이가 부딪쳤다. 출혈로 체온이 내려가고 있었다.

택호는 전화를 걸었다. 운송 업체 사무실. 자동응답기였다. 택호는 메시지를 남겼다.

“부산 행 냉동 수산물 배송 불가합니다. 트럭 고장이고 운전자 응급 상황입니다. 대체 차량 보내 주십시오.”

메시지를 남기고 택호는 전화를 끊었다. 위약금 340만 원. 위약금 340만 원. 택호는 눈을 세게 감았다. 숫자를 지우려 했지만, 숫자는 눈꺼풀 안쪽에서 더 선명하게 빛났다. 은지의 이번 달 양육비 80만 원. 트럭 할부금 120만 원. 나노큐어 할부금 150만 원. 숫자들이 줄을 서서 택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지울 수 없었지만 코에서 흐르는 피가 숫자보다 무거웠다.

새벽 4시 40분. 갓길에 불빛이 다가왔다. 견인차가 아니었다. 고속도로 순찰차였다. 순찰차가 택호의 트럭 뒤에 멈췄다. 순찰 요원이 내려 택호의 캐빈 창문을 두드렸다. 택호가 창문을 내렸다. 순찰 요원이 택호의 얼굴을 보고 한 발 물러섰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피가 너무 심한데.”

“안 괜찮습니다.”

쉰 목소리가 나왔다.

“대전 충남대병원… 가야 합니다. 차가 퍼졌어요. 제발 좀 태워주실 수 있습니까?”

순찰 요원이 택호의 얼굴을 다시 봤다. 피 묻은 수건. 피가 손목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팔뚝의 보라색 멍. 순찰 요원이 무전기를 들었다.

“응급 환자 이송 지원 요청합니다. 경부고속도로 천안 구간 갓길, 출혈 환자 1명. 대전 충남대병원으로 이송 필요합니다.”

무전기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고 응답이 왔다.

“확인. 이송 진행하십시오.”

순찰 요원이 택호를 봤다.

“타세요.”

15분 뒤, 택호는 순찰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순찰차가 추월 차선을 달렸다.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경광등만 돌고 있었다. 택호는 뒷좌석에서 코에 수건을 대고 앉아 있었다. 세 번째 수건이었다. 앞좌석의 순찰 요원이 백미러로 택호를 봤다.

“무슨 병이 있으신 겁니까?”

“폐암이었습니다. 나노큐어 맞았는데. 그게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순찰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노큐어. . 제 어머니도 맞으셨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효과가 좋다고 하셨는데.”

택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찰 요원이 더 묻지 않았다. 속도를 올렸다. 계기판의 숫자가 140을 넘었다.

택호는 창밖을 봤다. 고속도로의 가로등이 빠르게 뒤로 흘러갔다. 택호는 자기 몸 안을 상상했다. 나노 입자들. 수십억 개. 혈류를 타고 온몸을 돌며 세포를 스캔하는 것들. 7개월 전에는 암세포를 찾아서 파괴했다. 종양을 4.7센티미터에서 0.8센티미터로 줄여 놓았다. 택호의 생명을 살린 것들이었다. 지금은 같은 것들이 택호의 코 점막 세포를 파괴하고 있었다. 혈관벽 세포를 파괴하고 있었다. 곧 장기 세포를 파괴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나를 살린 약이, 이제는 나를 죽이고 있었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순찰차가 대전 나들목으로 빠졌다. 시내 도로를 달렸다. 새벽 5시. 도로가 비어 있었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순찰 요원이 경광등을 켠 채 정지선을 넘었다. 택호는 뒷좌석에서 몸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지러웠다.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택호는 수건을 코에서 뗐다. 수건이 피로 무거웠다. 코피는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지러움은 커지고 있었다. 택호는 왼쪽 옆구리를 눌러 봤다. 둔한 통증이 있었다. 내장 출혈이 시작된 것일 수도 있었다.

택호는 뒷좌석에서 기침을 했다. 손바닥에 피가 묻었다. 코피가 아니었다. 기침에서 나온 피였다. 택호는 손바닥을 봤다. 선홍색. 폐에서 온 피. 이건 코피가 아니었다. 폐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 피였다. 의사의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주요 장기 세포까지 공격하기 시작해요.' 폐. 이제 폐가 시작된 건가. 택호는 손바닥을 바지에 닦고 창밖을 봤다. 병원이 보였다. 충남대학교병원 응급실 간판. 순찰차가 응급실 입구에 멈췄다. 택호는 문을 열고 내렸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순찰 요원이 택호의 팔을 잡았다. 택호는 순찰 요원에게 기대어 응급실로 걸어갔다.

응급실 접수대에서 택호는 말했다.

“나노큐어 오분류 환자입니다. 자기장 소거 시술이 필요합니다. 주치의가 연락했을 겁니다.”

접수 간호사가 컴퓨터를 확인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락 받았습니다. 시술실 준비 중입니다.”

간호사가 택호의 팔뚝을 봤다. 멍이 팔뚝 전체로 퍼져 있었다. 간호사가 눈을 좁혔다.

“지금 바로 들어가시죠.”

휠체어가 왔다. 택호는 앉았다. 간호사가 복도를 따라 택호를 밀었다. 복도의 형광등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하나, 둘, 셋. 택호는 세면서 갔다. 열네 개째 형광등을 지나 시술실 앞에 도착했다.

시술실 안에 자기장 소거 장치가 있었다. 큰 터널 형태. 택호는 시술대에 누웠다. 시술대가 차가웠다. 등이 닿자 오한이 왔다. 의사가 들어왔다. 택호의 팔에 정맥 주사를 연결했다. 모니터에 택호의 심박수가 떴다. 분당 96회. 빨랐다.

“지금부터 자기장 소거 시술을 시작하겠습니다.”

의사가 택호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한 40분 정도 걸릴 겁니다. 기계가 몸 안의 나노 입자들을 전부 재부팅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다 꺼지고 나면 몸 밖으로 빠져나갈 거고요. 걱정 마세요.”

택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술대가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위잉, 하는 소리가 택호를 감쌌다. 기계의 진동이 가슴뼈를 통해 전해졌다. 택호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자기 심장 소리가 들렸다. 분당 96회. 빠르게 뛰고 있었다. 택호는 자기 몸 안의 나노 입자들을 생각했다. 수십억 개의 입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택호의 세포를 스캔하고 있었다. 정상 세포를 암세포로 분류하고 파괴하고 있었다. 자기장이 그것을 멈출 것이었다.

택호는 터널 안에서 20분을 누워 있었다. 기계의 저음이 뼛속까지 울렸다. 택호는 자기 몸 안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심장 소리. 폐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소리. 피가 혈관을 흐르는 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노 입자가 꺼지고 있었다. 소리가 없었다. 수십억 개가 꺼지는데 소리가 없었다.

기계의 소리가 바뀌었다. 저음에서 고음으로. 택호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자기장이 세포 사이를 통과하고 있었다. 택호는 몸 안에서 무언가가 멈추는 느낌을 상상했다. 수십억 개의 입자가 하나씩 꺼지는 것. 암세포를 찾던 눈이 닫히는 것. 택호를 살렸던 것들이 꺼지고 있었다. 택호를 죽이려 했던 것들이 꺼지고 있었다. 같은 것이었다.

40분이 지났다. 시술대가 터널 밖으로 나왔다. 택호는 눈을 떴다. 천장의 형광등이 보였다. 의사가 모니터를 확인했다.

“나노 입자 활성도가 0.3퍼센트까지 떨어졌습니다. 비활성화 성공입니다.”

택호는 코를 만져 봤다. 피가 멈춰 있었다. 수건을 대지 않아도 흐르지 않았다. 택호는 팔뚝을 봤다. 멍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멍은 생기지 않고 있었다.

택호는 시술대에 누운 채 숨을 골랐다. 코 안쪽에서 피가 멎은 것이 느껴졌다. 옆구리의 둔통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더 번지지는 않았다. 마비된 듯 감각이 없던 손끝으로 시술대의 차가운 금속 질감이 느껴졌다. 택호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움직였다. 택호는 시술대에 누운 채 천장을 봤다. 새벽 5시 47분. 코피가 시작된 지 2시간 47분 만이었다. 택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운송 업체에서 부재중 전화가 3건. 메시지 1건. '대체 차량 배정 불가. 위약금 청구 예정. ' 택호는 메시지를 읽고 휴대폰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340만 원. 택호는 천장을 보며 숫자를 생각했다. 트럭 대출 잔금 2,400만 원. 나노큐어 할부 잔금 1,050만 원. 자기장 소거 시술비는 얼마일까. 택호는 묻지 않았다. 나중에 청구서가 올 것이었다.

택호는 시술대 위에 누워서 자기 호흡을 느꼈다. 숨을 들이쉬었다. 폐가 팽창했다. 왼쪽 폐 상엽에 0.8센티미터짜리 종양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노 입자가 비활성화된 지금, 그 종양은 다시 자라기 시작할 수도 있었다. 택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의사도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택호는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보이지 않았다. 시술실 안이 따뜻했다. 택호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올 것 같았다. 은지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이 되면. 목소리를 들으면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아빠 괜찮다고 할 것 같았다. 택호는 눈을 감은 채 숨을 쉬었다. 왼쪽 폐 상엽에 0.8센티미터짜리 종양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노 입자가 꺼진 지금, 7개월 전의 그 적만이 오롯이 몸 안에 남았다. 시술실의 기계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어디선가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의 아침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살린 것과 죽이려 한 것이 같은 존재일 때, 치료를 다시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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