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나동의 조명이 꺼졌다. 연희는 콘솔에서 손을 떼고 천장을 봤다. 비상등이 켜졌다. 3초 뒤였다. 붉은 불빛이 벽을 물들였다. 연희는 콘솔의 전원 표시등을 확인했다. 꺼져 있었다. 옆 콘솔도 꺼져 있었다. 실험실의 모든 전자 장비가 동시에 죽은 것이었다. 연희는 주머니에서 개인 단말기를 꺼냈다. 화면이 들어오지 않았다. 단말기를 흔들었다. 반응이 없었다. 연희는 단말기를 내려놓고 실험실 중앙의 격리 챔버를 봤다. 챔버의 관측창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3시간 전에는 없던 빛이었다. 빛의 색이 형광등과 달랐다. 깊고 차가운 푸른색이었다.
입자가속기 에우로파-3은 목성 궤도에 떠 있었다. 목성의 자기장을 차폐 에너지로 활용하는 구조였다. 길이 4.7킬로미터의 원형 가속 링. 그 중심에 실험동이 있었다. 상주 인원 7명. 가장 가까운 유인 시설은 유로파 기지였다. 왕복 46시간 거리. 연희는 14개월째 이 가속기에서 자기홀극 합성 실험을 하고 있었다. 자기홀극. 자석을 쪼개도 항상 양극이 생기는데, 그 법칙을 깨고 한쪽 극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입자. 이론적으로 예측된 지 120년이 넘었지만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3시간 전, 연희의 287번째 충돌 실험에서 검출기의 신호가 바뀌었다. 단극 자기장 신호. 연희는 신호를 세 번 확인했다. 오류가 아니었다. 연희는 의자에 앉아 화면을 2분간 봤다. 손이 떨렸다.
연희는 격리 챔버 앞으로 걸어갔다. 관측창의 푸른빛이 얼굴을 비췄다. 챔버 안에 시료가 있었다. 충돌 실험에서 생성된 잔해물을 담은 티타늄 용기. 용기의 표면이 변해 있었다. 3시간 전에는 은회색이었다. 지금은 검은 무늬가 용기 표면을 따라 퍼져 있었다. 무늬가 규칙적이었다. 동심원 형태로 용기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번져 있었다. 동심원의 간격이 일정했다. 용기 주변의 공기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기장이 공기 중의 미세 입자를 정렬시키는 현상이었다.
연희는 격리 챔버의 외벽에 손을 대봤다. 차가워야 할 금속이 미지근했다. 손바닥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떨림이 아니었다. 당김이었다. 손바닥이 챔버 벽에 달라붙는 느낌. 연희는 손을 뗐다. 손을 떼는 데 힘이 들었다. 자석에서 쇠를 떼어내는 것과 같은 저항이 있었다. 연희는 한 번 더 시도했다. 손바닥을 대고 떼고, 대고 떼고. 갈수록 저항이 강해졌다. 연희는 손바닥을 봤다. 손바닥에 미세한 금속 가루가 붙어 있었다. 챔버 외벽의 표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외벽이 부식되고 있었다. 부식이 아니었다. 재편되고 있었다. 금속 원자의 배열이 자기홀극의 영향으로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연희는 실험 기록 장치를 찾았다. 전자 장비가 모두 죽어 있었다. 연필과 종이를 찾아 기록을 시작했다. 시각 추정 14시 40분. 격리 챔버 내부 시료 용기에서 단극 자기장 확산 확인. 챔버 외벽까지 자기 재편 진행. 실험실 나동 전자 장비 전면 정지. 원인 추정: 자기홀극 물질이 방출하는 단극 자기장이 주변 금속의 자기 구조를 비가역적으로 재편. 재편된 금속에서 발생하는 2차 자기장이 전자 장비의 반도체 소자를 파괴.
연희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복도로 나갔다. 나동에서 가동으로 이어지는 복도의 바닥이 차가웠다. 가동의 조명은 살아 있었다. 격리 챔버에서 7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자기 재편의 범위가 70미터 미만이라는 뜻이었다. 연희는 가동의 통신 패널로 갔다. 패널이 작동했다. 연희는 선내 통신을 열었다.
“여기 연희. 나동 전면 정전. 격리 챔버에서 비정상 자기장 확산 중. 전원 가동으로 집합.”
3분 후 엔지니어 도현이 가동에 도착했다. 달려온 것이었다. 숨이 차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287번 시료에서 자기홀극이 생성된 것 같아요.”
도현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졌다. 복도의 비상등 불빛 아래서 도현의 입술이 회색으로 보였다.
“합성에 성공한 거예요?”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요. 시료가 격리 챔버를 먹고 있어요.”
도현이 나동 복도 끝까지 따라왔다. 가동과 나동의 경계에서 멈췄다. 나동 쪽의 복도 벽면에 검은 무늬가 나타나 있었다. 격리 챔버에서 시작된 동심원 패턴이 벽면으로 번진 것이었다. 도현이 벽면을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 연희가 도현의 손목을 잡았다.
“만지지 마요.”
연희가 자기 손바닥을 보여줬다. 금속 가루가 아직 붙어 있었다.
“접촉하면 자기장이 신경에 간섭해요. 아까 챔버 벽을 만졌을 때 손가락이 1초 정도 말을 안 들었어요.”
도현이 손을 내렸다. 두 사람은 경계면에서 2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검은 무늬가 번져가는 것을 봤다. 무늬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연희는 가동의 데이터 단말기를 켰다. 나동의 센서는 죽어 있었지만, 가동의 센서가 나동과의 경계에서 자기장 강도를 측정하고 있었다. 숫자가 화면에 떴다. 연희의 눈이 좁아졌다. 경계면의 자기장 강도가 3시간 전보다 40퍼센트 올라가 있었다. 자기 재편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었다. 연희는 확산 속도를 계산했다. 시간당 약 4.2미터. 이 속도면 가동까지 도달하는 데 17시간. 가동의 전자 장비가 죽으면 생명 유지 시스템이 정지한다. 산소 생성, 온도 조절, 통신. 전부 멈춘다.
도현이 화면을 보고 말했다.
“격리 챔버를 분리하면 안 돼요? 챔버째 가속기에서 떼어내서 우주로 방출하면.”
연희가 고개를 저었다.
“챔버 외벽이 이미 재편됐어요. 볼트가 풀리지 않을 거예요. 36헤르츠 때처럼.”
연희는 말을 멈췄다.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가속기 자체를 궤도에서 이탈시킬 수 있어요? 에우로파-3 전체를 목성으로 떨어뜨리는 거예요.”
도현이 연희를 봤다. 연희의 셔츠에 코피 자국이 번져 있었다.
“4.7킬로미터짜리를요?”
“목성 대기로 추락시키는 거예요. 자기홀극 물질이 목성 대기의 수소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인간 문명권에서는 사라져요.”
도현이 잠시 침묵했다.
“궤도 이탈 추력은 다동 엔진 모듈에 있어요. 작동시키려면 다동에 가야 해요. 그런데.”
도현이 말을 끊었다.
“다동은 나동 반대편이에요. 나동을 지나가야 해요.”
연희는 가동 통신 패널에서 지구 관제에 메시지를 보냈다. 목성-지구 통신 지연은 편도 38분이었다.
“에우로파-3 연구원 연희. 287번 충돌 실험에서 자기홀극 합성 추정. 자기 재편 현상이 시설 내부로 확산 중. 나동 전자 장비 전면 정지. 확산 속도 시간당 4.2미터. 가동 도달 추정 17시간. 대응 지시 요청. 합성 데이터 전송 여부 확인 요청.”
연희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봤다. 합성 데이터. 287번 충돌 실험의 파라미터, 에너지 레벨, 충돌 각도, 검출 신호. 이 데이터가 있으면 지구에서 자기홀극을 재현할 수 있었다.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은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통제에 실패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76분 후 관제 응답이 왔다.
“에우로파-3, 관제. 합성 데이터를 즉시 전송할 것. 시설 대피 절차 준비. 탈출 모듈은 라동에 위치. 자기 재편 범위가 라동에 도달하기 전 대피 완료할 것. 궤도 이탈은 마지막 수단으로만 시행. 데이터 전송이 최우선.”
연희는 화면을 봤다. 데이터 전송이 최우선. 연희는 의자에 앉아 천장을 봤다. 가동의 조명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가동의 조명도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연희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 합성 데이터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 숫자와 그래프가 나열됐다. 충돌 에너지 1,247테라전자볼트. 충돌각 17.3도. 타깃 물질 구성비. 자기장 차폐 패턴. 검출기 신호의 시간 분포. 이 데이터면 충분했다. 지구의 가속기에서 같은 조건을 재현할 수 있었다. 지구의 가속기는 에우로파-3보다 컸다. 더 높은 에너지로 더 많은 양의 자기홀극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지구에는 격리 챔버가 아닌 도시가 있었다.
도현이 다가왔다.
“데이터 보내요?”
연희가 도현을 봤다.
“관제가 보내라고 했어요.”
“관제가 여기 있어요?”
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 화면을 봤다.
“이걸 보내면 지구에서 재현하겠죠. 재현하면 통제할 수 있을까요?”
연희가 말했다.
“우리가 통제하고 있어요?”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연희는 의자에서 일어나 나동 경계로 걸어갔다. 경계면의 벽에 검은 무늬가 3시간 전보다 2미터 넘게 확장돼 있었다. 공기가 달랐다. 미세한 금속 냄새가 났다. 혀 끝에 쇳물 맛이 올라왔다. 연희는 경계면에서 1미터 떨어진 곳에 섰다.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을 펴봤다. 정상이었다. 반 발짝 앞으로 갔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기장이 신경 전도에 간섭하기 시작하는 거리였다. 연희는 손가락을 쥐었다 펴봤다. 지연이 있었다. 뇌에서 손가락으로 가는 신호가 0.3초 늦게 도착하는 느낌이었다. 연희는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손가락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동까지 가려면 나동을 관통해야 했다. 나동의 길이는 120미터. 자기 재편이 가장 심한 격리 챔버 근처를 지나야 했다. 신경 간섭이 강한 구간에서 몸이 제대로 움직일지 알 수 없었다. 연희는 도현에게 물었다.
“다동 엔진 모듈의 원격 작동은요?”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수동 점화예요. 물리적으로 밸브를 돌려야 해요. 원래 무인 추락용으로 설계된 게 아니라 궤도 수정용이에요.”
연희가 봤다.
“밸브를 돌리려면 손가락이 움직여야 해요.”
도현이 연희를 봤다. 연희의 셔츠에 코피 자국이 번져 있었다.
“격리 챔버 근처에서는 손가락이 안 움직일 수 있어요.”
연희가 끄덕였다.
연희는 가동으로 돌아가 통신 패널 앞에 섰다. 데이터 전송 파일이 화면에 열려 있었다. 커서가 전송 버튼 위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깜빡임이 맥박처럼 느껴졌다. 연희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파일의 핵심 파라미터를 봤다. 충돌각 17.3도. 이 숫자 하나를 바꾸면 재현이 불가능해졌다. 17.3을 17.8로. 0.5도의 차이. 지구의 과학자들은 재현에 실패할 것이다. 실패를 반복하다가 자기홀극이 이론적 예측일 뿐이라고 결론내릴 것이다. 연희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287번 실험은 장비 오류로 기록된다. 자기홀극은 다시 이론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연희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17.3. 커서가 숫자 위에 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기장 간섭이 아니었다. 연희의 의지가 멈춘 것이었다. 12년이었다. 연희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천장의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12년간 이 순간을 위해 일했다. 대학원 7년, 에우로파-3 배정 대기 2년, 가속기 위의 14개월. 연희의 커리어 전체가 이 숫자에 들어 있었다.
도현이 옆에 서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연희가 도현을 봤다.
“라동 탈출 모듈의 산소는?”
“4명분 72시간. 목성 궤도에서 구조선이 오려면 최소 8일.”
“8일이면 산소가.”
“부족해요.”
연희가 화면을 봤다. 데이터를 전송하면 관제가 즉시 구조선을 보낼 것이다. 데이터가 없으면 구조선을 보낼 동기가 약해진다. 에우로파-3은 이미 오염된 시설이다. 데이터 없이는 가속기 추락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관제가 원격으로 추락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연희와 승무원이 아직 안에 있는 상태로.
연희는 데이터 파일을 닫았다. 전송하지 않았다. 도현이 연희를 봤다. 연희의 셔츠에 코피 자국이 번져 있었다. 연희가 말했다.
“다동에 갈게요.”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나동을 통과해야 해요.”
“알아요.”
“격리 챔버 근처에서.”
“알아요.”
연희는 복도 벽에 걸린 비상 도구함을 열었다. 파이프 렌치가 있었다. 무게 2.3킬로그램. 알루미늄이 아닌 강철이었다. 연희는 렌치를 들어봤다. 손에 무게가 실렸다. 이것으로 밸브를 돌릴 수 있었다. 손가락이 안 움직여도, 손목이 움직이면 돌릴 수 있었다.
연희는 나동 경계를 넘었다.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발바닥에서 미세한 당김이 느껴졌다. 신발 밑창의 금속 보강재가 바닥에 달라붙으려 했다. 연희는 발을 떼고 다음 발을 내디뎠다. 10미터. 벽면의 검은 무늬가 양쪽으로 뻗어 있었다. 천장까지 올라가 있었다. 비상등의 붉은 불빛이 무늬를 비추고 있었다. 20미터.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렌치를 쥔 오른손의 검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연희는 렌치를 더 세게 잡았다. 30미터. 왼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먹을 쥐라고 했는데 손가락이 펴져 있었다. 연희는 왼손을 무시하고 걸었다. 40미터. 격리 챔버가 보였다.
챔버의 관측창에서 나오는 푸른빛이 복도를 물들이고 있었다. 빛의 강도가 3시간 전보다 강해져 있었다. 복도 바닥의 금속 패널이 변형돼 있었다. 원래 평평했던 패널이 미세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자기 재편이 금속의 결정 구조를 바꾸면서 부피가 변한 것이었다. 연희는 솟아오른 패널을 밟으며 걸었다. 50미터. 격리 챔버 바로 옆이었다. 오른손의 경련이 심해졌다. 렌치가 손에서 미끄러지려 했다. 금속 렌치가 바닥 쪽으로 당겨지고 있었다. 연희는 이를 악물고 렌치를 잡았다. 손가락이 아닌 손목 근육으로 잡았다. 60미터. 양쪽 다리가 무거워졌다. 걷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금속 보강재가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70미터. 챔버를 지났다. 푸른빛이 등 뒤로 물러났다. 손가락의 경련이 줄었다. 80미터. 왼손이 다시 움직였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느리지만 움직였다.
나동 끝에 도달했을 때 연희의 셔츠가 등까지 땀에 젖어 있었다. 호흡이 거칠었다. 120미터를 걷는 데 14분이 걸렸다. 평소에는 2분이면 되는 거리였다. 다동의 문을 열었다. 다동의 조명이 살아 있었다. 엔진 모듈은 다동 끝에 있었다. 연희는 복도를 걸었다. 다동의 벽은 깨끗했다. 검은 무늬가 없었다. 아직. 연희는 모듈의 제어 패널 앞에 섰다. 패널은 전자식이 아니었다. 기계식이었다. 수동 점화용 밸브 3개와 방향 설정 레버. 밸브를 순서대로 열면 추력이 발생하고, 레버로 방향을 설정하면 궤도가 바뀐다. 연희는 방향 설정 레버를 목성 방향으로 밀었다. 레버가 무거웠다. 양손으로 밀어야 했다. 레버가 걸쇠에 걸렸다. 목성 방향 고정.
연희는 1번 밸브에 파이프 렌치를 맞췄다. 돌렸다. 밸브가 열렸다. 배관에서 연료가 흐르는 소리가 배관을 통해 들렸다. 저음의 웅웅거림이 벽을 타고 전해졌다. 2번 밸브. 렌치를 맞추고 돌렸다. 열렸다. 3번 밸브. 점화 밸브였다. 이것을 열면 엔진이 점화되고, 에우로파-3은 목성 대기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연희는 렌치를 3번 밸브에 맞추고 멈췄다.
가동에 데이터가 있었다. 전송하지 않은 데이터. 가속기가 목성에 추락하면 데이터도 함께 사라진다. 자기홀극의 존재를 증명한 데이터. 물리학 120년의 질문에 대한 답. 연희의 12년이 담긴 숫자들. 전부 목성의 수소 대기 속으로 가라앉는다. 다시 만들 수 없다. 에우로파-3급 가속기를 짓는 데 20년이 걸린다. 연희는 그때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었다.
연희는 렌치를 내려놓았다. 다동에서 나와 나동을 다시 걸었다. 격리 챔버 앞을 지날 때 오른손이 다시 경련했다. 왼발이 바닥에 달라붙어 2초간 떨어지지 않았다. 연희는 이를 악물고 발을 뗐다. 가동에 도착했다. 데이터 단말기 앞에 앉았다. 합성 데이터 파일을 열었다. 충돌각 17.3도. 연희는 숫자를 봤다.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렸다. 17.3을 지우고 17.8을 입력했다. 파일을 저장했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변조된 데이터가 지구를 향해 날아갔다. 38분 후에 도착할 것이었다.
연희는 의자에서 일어나 나동을 세 번째로 걸었다. 이번에는 빨리 걸었다. 격리 챔버 앞에서 오른팔 전체가 경련했다. 렌치를 거의 놓칠 뻔했다. 왼쪽 무릎이 접히지 않아 3보를 끌듯이 걸었다. 복도 벽에 손을 짚으려 했지만 벽에 손이 달라붙을 것이 두려워 짚지 못했다. 다동에 도착했을 때 연희의 코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자기장이 비강의 모세혈관에 영향을 준 것이었다. 연희는 소매로 코를 닦고 엔진 모듈 앞에 섰다. 3번 밸브에 렌치를 맞췄다. 돌렸다. 밸브가 열렸다. 바닥이 흔들렸다. 벽이 진동했다. 엔진이 점화된 것이었다.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올라왔다. 에우로파-3이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목성의 중력이 가속기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연희는 다동에서 나와 라동으로 갔다. 탈출 모듈이 있었다. 도현과 나머지 승무원 5명이 이미 모듈 안에 있었다. 연희가 모듈에 올라탔다. 해치를 닫았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데이터는요?”
도현이 물었다. 연희가 말했다.
“보냈어요.”
도현이 연희를 봤다. 연희의 셔츠에 코피 자국이 번져 있었다.
“그러면 지구에서 재현할 수 있는 거잖아요.”
연희는 좌석 벨트를 맸다.
“충돌각을 바꿨어요. 17.3을 17.8로. 재현은 안 될 거예요.”
도현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모듈이 에우로파-3에서 분리됐다. 작은 충격이 좌석을 통해 전해졌다.
모듈이 에우로파-3에서 수백 미터 떨어졌다. 관측창으로 가속기가 보였다. 4.7킬로미터 길이의 가속기가 목성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목성의 줄무늬 대기가 관측창을 채웠다. 갈색과 흰색의 소용돌이. 에우로파-3의 실험동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기홀극 물질이 만들어내는 빛. 가속기가 목성 대기의 상층부에 닿았다. 연희는 관측창에 이마를 대고 봤다. 가속기의 외벽이 대기 마찰로 붉어졌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함께 타올랐다. 에우로파-3이 목성의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나동 격리 챔버의 관측창에서 나오는 푸른 점이었다. 점이 줄어들다가 구름에 삼켜졌다. 12년치 데이터가 구름과 함께 사라졌다. 연희는 관측창에서 이마를 뗐다. 유리에 이마의 기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국 너머로 목성의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도현이 옆에서 말했다.
“구조선이 8일 걸린다고 했잖아요. 산소가 72시간이에요.”
연희가 좌석에 앉아 천장을 봤다.
“관제가 데이터를 받으면 구조선을 보낼 거예요. 데이터가 변조됐다는 건 모를 거예요. 적어도 8일 안에는.”
도현이 연희를 봤다. 연희의 셔츠에 코피 자국이 번져 있었다.
“8일 후에 알면요?”
연희가 대답하지 않았다. 모듈 안의 산소 잔량 표시가 벽면에 떠 있었다. 72시간. 7명이 나눠 쓰면 실제로는 더 짧았다. 42시간. 연희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연희는 산소 표시에서 눈을 떼고 관측창을 봤다. 목성의 대기가 창 밖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에우로파-3이 사라진 자리에 아무 흔적도 없었다. 연희의 오른손 검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자기장의 잔여 영향인지, 피로인지 알 수 없었다. 연희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움직였다. 느리지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