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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는 종자

2026. 3. 13. · 9,106자 · 약 11분

녹아내리는 종자 썸네일
17

경보음이 울린 것은 새벽 3시 7분이었다. 지하 42미터. 종자 저장고 4구역. 윤하는 침낭에서 몸을 빼내며 콘솔을 봤다. 화면에 빨간 글씨가 떠 있었다. '온도 이상. 4구역 현재 영하 2.1도. 설정값 영하 18도. 편차 15.9도. ' 윤하는 화면을 두 번 두드렸다. 오류가 아니었다. 냉각 모듈 3번의 압축기가 멈춰 있었다. 윤하는 모듈 패널을 열었다. 압축기의 구동부에 얼음이 끼어 있었다. 배수관이 동결되면서 역류한 냉각수가 구동부를 얼린 것이었다. 부품을 교체하면 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체 부품이 없었다. 3년 전 마지막 보급 이후로 부품 재고가 바닥나 있었다. 윤하는 패널을 닫았다. 모듈은 다시 작동하지 않을 것이었다. 윤하는 복도로 나갔다. 복도의 온도계가 영하 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입에서 김이 나왔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가락이 2분 만에 저렸다.

4구역의 문을 열었을 때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영하 18도에서 영하 2도로 올라가면서 저장고 내부의 결빙이 녹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윤하의 장화가 물을 밟았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저장고 안에서 울렸다. 윤하는 후레시를 켰다. 빛이 선반을 비췄다. 알루미늄 용기 1,200개가 선반에 줄지어 있었다. 벼 420종, 밀 310종, 보리 180종, 나머지 잡곡과 두류. 대한민국 종자 보존 체계의 마지막 사본. 윤하가 이 저장고를 관리한 것은 3년이었다. 3년 동안 하루 2번 온도를 확인하고, 주 1회 습도를 점검하고, 월 1회 무작위 용기를 열어 종자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했다. 2,190번의 온도 확인. 156번의 습도 점검. 36번의 육안 검사. 한 번도 이상이 없었다. 오늘까지. 지상의 원본은 3년 전 폭풍이 시작된 첫 해에 소실됐다.

윤하는 선반 앞에 섰다. 용기의 표면에 결로가 맺혀 있었다. 물방울이 알루미늄 위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윤하는 가장 가까운 용기를 집어 뚜껑을 열었다. 내부에 진공 포장된 종자가 있어야 했다. 종자는 있었다. 하지만 진공 포장이 부풀어 있었다. 내부에서 가스가 발생한 것이었다. 윤하는 포장을 뜯었다. 벼 종자. 하지만 종자의 표면에서 하얀 실 같은 것이 뻗어 나와 있었다. 뿌리. 종자가 발아하고 있었다. 영하 2도에서.

윤하는 손을 뗐다. 용기를 선반에 올려놓았다. 옆의 용기를 열었다. 같았다. 그 옆도. 윤하는 선반을 따라 걸으며 12개의 용기를 열었다. 12개 모두 발아가 시작되어 있었다. 벼 종자가 영하 2도에서 발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벼의 발아 최저 온도는 섭씨 10도. 윤하는 후레시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무전기를 집었다.

“본부. 여기 저장고. 4구역 냉각 모듈 정지. 내부 온도 영하 2도. 종자 발아 진행 중.”

무전기에서 잡음이 흘렀다. 3초. 5초.

“…저장고, 여기 본부. 발아라고 했나? 온도가 영하 2도인데?”

정태의 목소리였다. 지상 관제실. 윤하보다 42미터 위에 있는 사람.

“맞아요. 12개 용기 확인. 전부 발아. 뿌리가 1센티미터 이상 자라 있어요.”

무전기 너머에서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태가 일어선 것 같았다.

“…샘플 가져와. 분석해야 해.”

윤하는 발아한 종자 3개를 밀봉 용기에 담아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의 온도가 올라갈수록 윤하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지상 층에 도착했을 때 바람 소리가 들렸다. 건물 외벽을 때리는 바람. 3년째 멈추지 않는 바람. 서울의 평균 기온이 영하 23도였다. 한여름에도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갔다. 폭풍이 시작된 뒤 농경은 불가능해졌다. 식량은 비축분과 종자 저장고의 재고뿐이었다. 서울 생존 구역에 3만 명이 남아 있었다. 폭풍 첫 해에 인구의 대부분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부산, 제주. 하지만 폭풍은 한반도 전역을 덮었다. 남쪽도 영하 10도 아래였다. 어디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3만 명이 서울에 남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종자 저장고. 이 건물 지하에 마지막 종자가 있었다. 종자가 있는 한 언젠가 다시 심을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이 3만 명을 서울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분석실은 건물 2층에 있었다. 정태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부어 있었다. 수면 부족. 지상의 식량 배급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매일 3만 명분의 배급량을 계산하고, 줄어드는 재고를 숫자로 확인하는 일. 정태의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윤하가 밀봉 용기를 정태에게 건넸다. 윤하가 밀봉 용기를 내려놓았을 때 손이 떨렸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태가 용기를 열고 종자를 꺼냈다. 핀셋으로 집었다. 종자의 표면에서 뻗어 나온 하얀 뿌리가 핀셋 아래에서 흔들렸다.

“이게 영하 2도에서 자란 거야?”

정태가 물었다.

“네.”

정태가 종자를 현미경 슬라이드에 올렸다.

분석에 4시간이 걸렸다. 윤하는 분석실 구석의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정태가 콘솔 앞에서 데이터를 읽고 있었다. 아침 7시. 윤하의 위장이 울렸다. 아침 배급을 받지 못했다. 지상의 배급소는 오전 6시에 문을 열었다. 윤하가 지하에 있었으므로 놓친 것이었다. 하루 배급량 1,800킬로칼로리. 그것을 놓치면 다음 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윤하가 분석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건물 밖의 바람 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벽 너머로 눈이 건물 외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래를 뿌리는 것 같은 소리.

“결과 나왔어.”

정태가 화면을 돌렸다. 윤하가 의자에서 일어나 화면 앞으로 갔다. 화면에 두 개의 유전자 지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왼쪽이 원본 벼. 오른쪽이 발아한 종자.

“유전적 일치율 61퍼센트.”

정태가 말했다. 목소리가 건조했다.

“원본 벼와 39퍼센트가 다른 거야. 이건 벼가 아니야.”

윤하는 화면을 봤다. 39퍼센트. 인간과 바나나의 유전적 일치율이 60퍼센트였다. 발아한 종자는 벼보다 바나나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이해 있었다.

“3년 동안 저장고 안에서 이렇게 변한 거예요?”

윤하가 물었다. 정태가 고개를 저었다.

“3년이 아니야. 냉각이 유지되는 동안은 변이가 일어날 수 없어. 냉각이 멈춘 뒤에 변이가 시작된 건데, 모듈이 멈춘 게 언제야?”

“어젯밤 기준으로 추정 72시간 전이요.”

“72시간 만에 39퍼센트 변이.”

윤하는 그 숫자의 의미를 생각했다. 자연 진화에서 39퍼센트의 유전적 차이가 만들어지려면 수천만 년이 걸렸다. 이 종자는 72시간 만에 그것을 해냈다. 영하 18도의 동결 상태에서 영하 2도로 깨어나는 과정에서 유전자가 폭발적으로 재편된 것이었다. 극한 환경에 대한 적응. 살아남기 위한 변이. 종자가 스스로 자기를 바꾼 것이었다. 정태가 입을 다물었다. 화면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춰 있었다.

정태가 추가 분석을 돌렸다. 변이 종자의 특성. 결과가 화면에 떠올랐다. 윤하는 화면을 읽었다. 발아 최저 온도: 영하 20도. 광합성 가능 최저 온도: 영하 15도. 성장 주기: 발아에서 결실까지 28일. 열매 수확량: 원본 벼의 3.2배. 윤하의 눈이 멈췄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슴 안쪽에서. 영하 15도에서 광합성. 28일 만에 수확. 수확량 3.2배. 지상의 영하 23도 환경에서 재배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3년 만에 처음.

윤하가 입을 열려는 순간 정태가 화면을 스크롤했다. 하단에 독성 분석 결과가 있었다. '열매 내 중금속 결합 단백질(메탈로티오네인 변이형) 검출. 농도: 건조 중량 대비 0.08퍼센트. 인체 축적성: 고위험. 간 기능 비가역적 손상 예상 시점: 지속 섭취 기준 10년. ' 윤하는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10년. 이 열매를 10년 이상 먹으면 간이 망가진다. 윤하는 의자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영하 15도에서 자라는 기적의 식물. 그 기적에 10년짜리 저주가 붙어 있었다.

“원본 종자는?”

윤하가 물었다.

“변이되지 않은 원본은 있어요?”

정태가 데이터를 확인했다.

“4구역 전체가 영향받았어. 냉각이 멈추면서 전 구역 온도가 올라간 거야. 1,200개 용기 전부. 원본 상태로 남아 있는 건 없어.”

정태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천장을 봤다.

“설사 원본이 남아 있어도, 지상 온도에서는 발아가 안 돼. 벼가 자라려면 최소 10도는 돼야 하는데, 지상은 한여름에도 영하 15도야.”

윤하는 분석실 창으로 갔다. 창 밖에 눈이 날리고 있었다. 수평으로 날리는 눈. 건물 앞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하얀 바람. 3년 전 이 창 밖에 4월의 벚꽃이 보였다. 지금은 눈밖에 없었다. 윤하는 창틀에 손을 대 봤다. 금속이 차가웠다. 손가락이 금속에 닿는 순간 열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태가 윤하에게 다가왔다. 태블릿을 들고. 화면에 숫자가 떠 있었다.

“현재 지상 비축 식량 잔여: 11일분. 3만 명 기준.”

11일. 윤하는 그 숫자를 봤다.

“변이 종자를 지상에 심으면 28일 뒤에 수확이 가능해. 11일분 비축 식량으로 28일을 버티려면 배급량을 현재의 39퍼센트로 줄여야 해. 하루 1인당 640킬로칼로리.”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양이에요?”

“버틸 수는 있어. 움직이지 않으면. 28일 동안. 기초대사량이 1,500킬로칼로리인 성인이 640킬로칼로리만 섭취하면 매일 860킬로칼로리씩 부족했다. 28일이면 24,080킬로칼로리 적자. 체중으로 환산하면 약 3킬로그램의 체지방과 근육이 소모되는 양이었다. 살 수는 있었다. 겨우.”

윤하는 태블릿의 숫자를 봤다. 11일. 28일. 640킬로칼로리. 10년. 숫자가 윤하의 머릿속에서 겹쳤다. 지금 심으면 28일 뒤에 먹을 수 있다. 하지만 10년 뒤에 간이 망가진다. 심지 않으면 11일 뒤에 식량이 바닥난다.

“심어야 해요.”

윤하가 말했다.

“10년 뒤를 걱정하려면 먼저 11일을 넘겨야 하잖아요.”

정태가 윤하를 봤다. 눈 밑의 그림자가 더 짙어 보였다.

“그건 나도 알아. 문제는 3만 명한테 뭐라고 말하느냐야. '이거 먹으면 살 수 있는데, 10년 뒤에 간이 망가집니다'라고?”

“사실을 말하면 되죠.”

정태가 창밖을 봤다. 눈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딸이 여덟 살이야.”

정태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그 애가 이걸 먹기 시작하면, 열여덟 살에 간이 망가져. 성인이 되기 전에.”

윤하는 정태의 옆모습을 봤다. 정태의 턱이 굳어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선택이 가능하지. 하지만 11일 뒤에 굶어 죽는 것과 10년 뒤에 간이 망가지는 것 사이에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있어?”

윤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바람 소리가 창을 때렸다. 건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동이 바닥을 통해 윤하의 발바닥으로 올라왔다.

윤하는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갈수록 온도가 떨어졌다. 4구역. 문을 열었다. 안개가 줄어 있었다. 온도가 영하 4도로 더 내려간 것이었다. 냉각 모듈 없이 지하 암반의 온도가 서서히 평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윤하는 선반 앞에 섰다. 1,200개의 용기. 전부 변이된 종자. 윤하는 용기 하나를 열었다. 발아한 종자의 뿌리가 더 길어져 있었다. 3센티미터. 6시간 전에는 1센티미터였다. 6시간 만에 2센티미터. 종자가 자라고 있었다. 영하 4도에서.

윤하는 용기를 들고 선반 사이를 걸었다. 1,200개. 3만 명을 먹일 수 있는 양이었을까. 계산이 필요했다. 원본 벼 기준 1,200종의 종자 은행은 재배용이 아니라 보존용이었다. 각 종당 종자 50그램. 총 60킬로그램. 60킬로그램의 종자로 첫 번째 수확을 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다시 심고, 반복하면. 윤하는 계산을 멈췄다. 계산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윤하는 무전기를 들었다.

“본부. 4구역의 변이 종자 전량을 지상 온실로 이송할 준비를 요청합니다.”

무전기가 3초 동안 침묵했다.

“…저장고, 본부. 이송 승인 권한은 네가 아니라 운영위원회에 있어. 알잖아.”

“알아요. 운영위원회 소집을 요청하는 겁니다.”

무전기 너머에서 정태의 한숨이 들렸다. 짧게.

“알겠어. 소집한다.”

운영위원회는 오후 2시에 열렸다. 건물 3층 회의실. 7명. 윤하와 정태를 포함해서. 윤하가 분석 결과를 보고했다. 유전적 일치율 61퍼센트. 발아 온도 영하 20도. 수확 28일. 중금속 결합 단백질. 10년. 위원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숫자가 명확했으므로. 침묵이 15초 동안 이어졌다. 회의실의 난방이 작동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김이 나왔다. 7명의 김이 회의실 중앙에서 섞였다.

한 위원이 입을 열었다.

“10년이면 그동안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나.”

정태가 대답했다.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장은 없습니다.”

다른 위원이 물었다.

“안 심으면?”

“11일 뒤에 식량이 바닥납니다.”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회의가 끝난 것은 오후 4시였다. 2시간. 결론은 하나였다. 변이 종자를 지상 온실에 이송하여 재배를 시작한다. 식량 배급량을 하루 640킬로칼로리로 감축한다. 3만 명에게 변이 종자의 독성 정보를 공개한다. 섭취 여부는 개인이 결정한다.

투표는 6 대 1이었다. 반대한 1명은 정태였다. 정태는 표결 후 아무 말 없이 회의실을 나갔다. 윤하는 정태의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처져 있었다. 딸이 여덟 살이라고 했다.

윤하는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창밖을 봤다. 오후 4시인데 하늘이 어두웠다. 폭풍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3년째. 윤하는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갔다. 복도의 벽에 서울시 생존 구역 지도가 붙어 있었다. 지도 위에 빨간 점으로 배급소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12곳. 3만 명이 12곳의 배급소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갔다. 4구역. 안개가 거의 걷혀 있었다. 바닥의 물이 다시 얼기 시작하고 있었다. 얇은 얼음 위를 장화가 밟았다. 깨지는 소리가 났다. 윤하는 용기 1,200개를 이송 카트에 옮기기 시작했다. 용기 하나의 무게가 400그램. 1,200개면 480킬로그램. 윤하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무전기로 인력을 요청했다. 30분 뒤에 4명이 내려왔다. 방한복을 입은 사람들. 얼굴이 붉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윤하는 그들의 얼굴을 봤다. 한 사람이 용기를 들다가 물었다.

“이게 뭔데요?”

윤하가 대답했다.

“종자요.”

“뭘 심는 건데요?”

“벼요. 아니, 벼였던 거요.”

그 사람이 윤하를 봤다. 이해하지 못하는 눈이었다. 윤하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송이 끝난 뒤에 3만 명 전원에게 공지가 나갈 것이었다. 그때 알게 될 것이었다. 자기가 먹게 될 것이 무엇인지. 윤하는 그 공지문의 내용을 생각했다. 누가 쓸 것인가. 정태일 것이었다. 정태가 숫자를 나열할 것이었다. 61퍼센트. 28일. 10년. 그 숫자들을 읽은 3만 명이 어떤 얼굴을 할지 윤하는 상상하지 않았다. 상상할 여유가 없었다. 용기를 옮겨야 했다. 지상에서 온 사람들. 배급을 받는 사람들. 이제 이 용기 안의 것을 먹게 될 사람들.

이송은 3시간이 걸렸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와 옥상을 23번 왕복했다. 윤하의 팔이 저렸다. 허리가 아팠다. 640킬로칼로리의 체력으로는 버거운 작업이었다. 아침 배급을 놓친 것이 느껴졌다. 위장이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위장으로 1,200개의 용기를 옮기고 있었다. 1,200개의 용기가 지상 온실로 올라갔다. 온실은 건물 옥상에 있었다. 삼중 유리. 폭풍 전에는 채소 재배용 온실이었다. 상추, 토마토, 허브.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선반만 남아 있었다. 녹슨 금속 선반. 난방은 없었다. 내부 온도가 영하 17도. 변이 종자에게는 충분한 온도였다. 윤하는 온실에서 첫 번째 용기를 열었다. 종자를 흙이 담긴 트레이에 옮겼다. 장갑을 낀 손으로. 종자의 뿌리가 흙에 닿는 순간 윤하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것은 벼가 아니었다. 원본 벼와 61퍼센트만 같은 것. 39퍼센트는 윤하가 모르는 것이었다. 이 39퍼센트가 영하 15도에서 광합성을 가능하게 했고, 28일 만에 열매를 맺게 했고, 그 열매에 중금속 결합 단백질을 넣었다.

윤하는 종자를 흙에 눌러 넣었다. 손가락이 흙 속으로 들어갔다. 흙이 차가웠다. 영하 17도의 흙. 종자가 흙 속에 묻혔다. 흙의 냄새가 났다. 차가운 흙에서도 냄새가 났다. 광물과 수분이 섞인 냄새. 3년 만에 윤하가 맡는 흙 냄새였다. 지하 저장고에는 흙이 없었다. 알루미늄과 콘크리트만 있었다. 윤하는 다음 종자를 집었다. 옮겼다. 눌렀다. 반복했다. 첫 번째 트레이가 차는 데 12분이 걸렸다. 트레이 하나에 종자 48개. 1,200개 용기의 종자를 전부 심으려면 트레이 500개 이상이 필요했다. 온실에 트레이가 200개 있었다. 나머지는 만들어야 했다. 윤하는 첫 번째 트레이를 온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트레이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울렸다. 윤하는 두 번째 트레이를 집었다. 1,200개의 용기를 전부 옮기려면 며칠이 걸릴 것이었다. 윤하는 멈추지 않았다.

온실 밖에서 바람이 유리를 때렸다. 삼중 유리가 진동했다. 눈이 유리 표면에 부딪쳐 미끄러져 내렸다. 윤하는 트레이에 종자를 심으면서 유리 너머를 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폭풍 구름 사이로 주황색 빛이 스며들었다. 3년 만에 처음 보는 석양이었다. 아니었다. 구름이 잠시 얇아진 것뿐이었다. 빛이 30초 동안 온실 안을 비추다가 사라졌다. 다시 회색. 다시 바람. 서울이 하얗게 묻혀 있었다. 롯데타워의 꼭대기만 구름 사이로 보였다. 나머지는 눈과 바람에 가려져 있었다. 저 건물들 안에 3만 명이 있었다. 배급을 기다리는 3만 명. 11일 뒤면 배급이 끊기는 3만 명. 건물의 윤곽만 보였다. 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3년 전의 서울에는 4월에 벚꽃이 피었다. 지금 이 온실에서 자라게 될 것은 벚꽃이 아니었다. 벼도 아니었다. 이름이 없는 것이었다.

윤하는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장갑을 벗었다. 맨손으로 흙을 만졌다. 차가웠다. 손가락이 저렸다. 흙 속에 종자가 있었다. 종자의 뿌리가 흙 속으로 뻗어 가고 있을 것이었다. 영하 17도의 흙 속에서. 윤하는 손을 흙 위에 올려놓았다. 28일. 이 흙 위에 무언가가 자라날 것이었다. 그것이 3만 명을 먹일 것이었다. 10년 동안. 10년 뒤의 일은 10년 뒤의 사람들이 결정할 것이었다. 윤하는 손을 뗐다. 흙 위에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섯 손가락 모양. 윤하는 장갑을 다시 끼고 다음 종자를 집었다. 바람이 온실 유리를 흔들었다. 유리가 진동하면서 낮은 소리를 냈다. 윤하는 종자를 흙에 넣었다. 28일 뒤에 이 흙에서 줄기가 올라올 것이었다. 이삭이 달릴 것이었다. 그 이삭을 3만 명이 먹을 것이었다. 10년 동안. 11년째 되는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윤하는 다음 종자를 집었다. 흙에 넣었다. 눌렀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멈추지 않았다.

10년 뒤에 간이 망가지는 식량과 11일 뒤에 바닥나는 비축분 사이에서, 당신이라면 흙에 종자를 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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