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체 외벽을 타고 오는 진동이 멈춘 것은 3일 전이었다. 항법 엔진이 최종 감속을 마치고, 탐사선 세종이 카이퍼 벨트 천체 2087 아리의 궤도에 안착한 순간이었다. 이후 선내에는 공조 장치의 팬 소리와 냉각수가 파이프를 지나는 미세한 수음만 남았다. 7년간 배경이었던 엔진 진동이 사라지자, 선체가 무덤처럼 고요했다. 소라의 귀가 적응하는 데 하루가 걸렸다. 소라는 분석실의 모니터 앞에 앉아 외부 카메라 영상을 봤다. 천체의 표면은 검고 평평했다. 얼음이 아니었다. 반사율이 너무 낮았다. 천체 전체가 빛을 삼키고 있었다.
소라 옆의 좌석에서 진혁이 스캔 데이터를 올렸다. 탐사선의 물리학 담당으로, 5년간 같은 선내에서 소라와 호흡을 맞춰 온 사람이었다. 화면에 분광 분석 결과가 떴다.
“이건 자연물이 아니야.”
진혁이 말했다. 소라가 화면을 봤다. 스펙트럼에 주기적 패턴이 있었다. 무작위 광물 조성에서는 나올 수 없는 규칙성이었다. 소라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의자 팔걸이를 잡았다. 금속이 차가웠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착륙 직후 채취한 표면 시료에서 미세 구조가 드러났다. 전자 현미경 이미지를 확대하자 나노미터 단위의 격자가 나타났다. 격자의 배열이 반복됐다. 반복이지만 동일하지 않았다. 매 층마다 미세한 변이가 있었다. 소라는 그 변이 패턴을 화면에 늘어놓았다. 변이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작위도 아니었다. 소라의 목 뒤가 서늘해졌다. 숨을 들이쉬었다. 분석실의 공기가 건조했다. 이것은 구조였다. 무작위 결정이 만들 수 없는 정밀함이었다. 카이퍼 벨트 천체의 표면 아래에, 누군가가 나노미터 단위로 정보를 새긴 것이었다.
소라는 언어 분석 도구를 열었다. 7년간의 항해 동안 소라가 유일하게 해 온 일은 가상의 비인간 언어 체계를 모델링하는 것이었다. 지구의 어떤 기관도 이 임무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카이퍼 벨트 천체 탐사는 광물 자원 조사가 주 목적이었고, 소라의 역할은 부수적이었다. 지구를 떠난 지 7년. 소라는 그 시간의 대부분을 분석실에서 혼자 보냈다. 가상 데이터로 가상의 비인간 통신을 해독하는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실재하지 않으니 결과도 실재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소라의 작업을 이해하지 못했고, 소라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노 격자의 변이 패턴이 화면에 놓이자, 소라가 7년간 만져 온 모델의 틀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 닮은 것이 아니었다. 소라의 모델이 이 패턴을 예측한 적이 있었다. 2년 전 시뮬레이션에서 폐기한 변수 조합이 이 격자의 구조와 96퍼센트 일치했다.
“진혁.”
소라가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는 데 힘이 들었다.
“이거 봐.”
진혁이 화면을 봤다. 소라의 모델과 격자 패턴의 대조 결과. 진혁의 어깨가 올라갔다.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의자를 뒤로 밀었다. 바퀴가 바닥에서 긁히는 소리가 났다.
“우연일 수 있어.”
진혁이 말했다. 소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분석실의 조명이 미세하게 떨렸다. 냉각 파이프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벽 뒤에서 들렸다.
소라는 격자 패턴의 변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1단계 변이, 2단계 변이, 3단계 변이. 각 단계 사이의 전이 규칙을 추출했다. 작업은 16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소라는 분석실을 떠나지 않았다. 진혁이 식량 바를 가져다 놓고 갔다. 소라는 바를 씹으며 화면을 봤다.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씹는 동작만 반복했다. 삼키고 나서야 뭘 먹었는지 생각했다. 전이 규칙이 추출되자, 패턴이 열리기 시작했다. 1단계 변이의 조합이 의미 단위를 이루는 것 같았다. 의미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인간 언어의 형태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구조 단위가 보였다.
3일째 되던 날, 소라는 격자 패턴의 기본 단위 247개를 분류했다. 각 단위에 임의의 한국어 레이블을 붙이려 했다. 처음 50개까지는 가능했다. 하지만 51번째부터 한국어 레이블이 부정확하게 느껴졌다. 단위 자체가 레이블보다 더 정밀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소라는 레이블을 포기하고 단위 자체의 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단위들 사이의 결합 규칙을 추출하고, 결합이 만들어내는 상위 구조를 분석했다. 화면에 도표가 펼쳐졌다. 소라는 도표를 보다가 멈췄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표의 구조가 복잡해야 하는데,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라는 도표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읽히는 속도가 빨라져 있었다. 어제까지 30분이 걸리던 패턴 분석이 5분 만에 끝났다. 소라는 시계를 봤다. 분석실의 디지털 시계가 '14: 23'을 표시하고 있었다. 숫자를 읽는 데 0.2초가 걸렸다. 평소보다 느렸다. 하지만 격자 도표를 읽는 속도는 평소의 6배였다.
소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거울을 봤다. 얼굴에 피로가 쌓여 있었지만, 눈동자의 초점이 평소와 달랐다. 뭐가 다른지 설명할 수 없었다. 동공의 크기는 정상이었다. 충혈도 없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인식하는 데 평소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자기 얼굴이 데이터로 보였다. 눈의 위치, 코의 각도, 입술의 곡률. 얼굴이 아니라 배열이었다. 소라는 거울 위 선반에 놓인 치약 튜브를 봤다. 튜브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한국어였다. 그런데 글자를 인식하는 데 평소보다 시간이 걸렸다. 0.5초 정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라는 느꼈다. 글자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글자를 읽는 자신의 과정이 낯설었다. 소라는 튜브를 내려놓고 양손을 봤다. 손가락 열 개가 보였다. 열 개라는 숫자보다 먼저, 격자의 기본 단위 분류에서의 배열 수가 떠올랐다. 소라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손등을 때렸다. 감각이 돌아왔다. 일시적으로.
분석실로 돌아온 소라는 격자 도표를 다시 열었다. 도표가 즉시 읽혔다. 한국어 문장을 읽는 것보다 빨랐다. 소라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소라는 키보드를 잡고 한국어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멈칫거렸다. '구조적 변이의 반복적 패턴은'이라는 문장을 쓰다가 '반복적'이라는 단어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단어가 떠오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단어가 부정확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격자 패턴의 3단계 변이에 해당하는 구조가 '반복적'보다 더 정확한 기술이었다. 한국어 어휘가 격자 패턴에 비해 투박했다. 소라는 '반복적'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격자 패턴의 기호를 타이핑하려 했다. 키보드에 해당하는 키가 없었다. 한국어 자판이었다. 소라는 화면을 멍하니 봤다. 자판의 한국어 배열이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격자의 구조를 입력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존재하지 않았다.
소라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심장이 빨라져 있었다.
“진혁.”
소라가 내선을 눌렀다. 응답이 왔다.
“나 지금 한국어가 이상해.”
내선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뭐가 이상한데?”
“단어가 안 떠오르는 게 아니야. 단어가 맞지 않아. 격자 패턴으로 생각하는 게 더 정확해.”
진혁이 분석실로 왔다. 소라의 얼굴을 봤다. 소라의 눈이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모니터에는 격자 도표가 떠 있었다.
“이 도표 읽어 봐.”
소라가 말했다. 진혁이 화면을 봤다. 30초. 1분.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읽을 수 없어. 네가 분류한 체계를 모르니까.”
“나는 읽혀. 한국어보다 빨리.”
진혁이 소라의 뇌파 측정기를 가져왔다. 탐사선 의료 장비 중 하나였다. 소라의 관자놀이에 센서를 부착하고, 두 가지 조건에서 뇌파를 측정했다. 한국어 텍스트를 읽을 때와 격자 도표를 읽을 때. 결과가 모니터에 나란히 떴다. 진혁이 결과를 보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모니터를 20초 동안 봤다. 한국어를 읽을 때의 뇌파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처리 속도가 느려져 있었다. 이전 기록보다 18퍼센트 저하. 격자 도표를 읽을 때의 뇌파는 정상 범위 밖이었다. 패턴이 알려진 어떤 인지 활동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언어 처리도, 수학적 추론도, 공간 인지도 아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신경 활성 패턴이었다.
“이게 뭐야.”
진혁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평소의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진혁이 소라의 관자놀이에서 센서를 떼었다. 센서 부착 부위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소라는 격자 도표 작업을 중단했다. 24시간 동안 도표를 보지 않았다. 한국어 텍스트만 읽었다. 소설, 보고서, 임무 매뉴얼. 한국어가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한국어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문장을 읽을 때 문법 구조가 의식됐다. 주어-목적어-서술어의 배열이 의식적으로 느껴졌다.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읽고 있었다. 문장의 의미는 이해됐지만, 문장이 왜 그런 순서로 배열되는지가 의식됐다. 한국어의 문법이 선택지 중 하나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격자의 문법이. 소라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천장의 조명 패널이 직사각형이었다. 직사각형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전에, 격자 패턴의 2단계 변이 중 하나가 먼저 떠올랐다. 격자가 먼저 오고, 한국어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소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둠 속에서 숙소의 벽이 보였다. 벽의 질감이 격자의 표면 변이 패턴으로 읽혔다. 소라는 눈을 감았다. 감아도 격자가 보였다. 눈꺼풀 안쪽의 어둠이 격자의 바탕색이었다.
소라는 분석실로 돌아갔다. 도표를 다시 열었다. 열자마자 감각이 확장됐다. 격자 패턴이 평면 도표가 아니라 다차원 구조로 느껴졌다. 소라는 도표의 상위 구조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상위 구조는 하위 단위의 단순 조합이 아니었다. 결합 방식 자체가 정보를 담고 있었다. 결합의 순서, 방향, 밀도가 각각 독립적인 의미축을 이루고 있었다. 소라는 4시간 동안 상위 구조를 분석했다. 분석이 끝났을 때 소라의 입이 말라 있었다. 물을 마시려 컵을 잡았다. 컵의 원통형 구조가 격자의 변이 패턴으로 분해됐다. 물의 표면 장력이 격자의 동적 전이 규칙으로 읽혔다. 소라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컵을 내려놓았다. 손을 떨고 있었다.
격자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격자는 도구였다. 읽는 행위가 도구를 작동시키는 조건이었다. 소라가 격자를 분석하는 동안, 격자가 소라의 인지 구조를 재배열하고 있었다. 소라가 패턴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패턴이 소라의 이해 방식을 바꾸고 있었다. 소라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떨렸다. 심장이 빨랐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벽을 짚었다. 분석실의 벽면이 금속 패널로 이루어져 있었다. 패널의 볼트가 규칙적으로 박혀 있었다. 소라의 눈이 볼트의 배열을 읽었다. 볼트의 배열이 격자 패턴의 1단계 변이처럼 보였다. 아니,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소라의 인지가 모든 것을 격자의 문법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볼트 사이의 간격이 격자의 전이 규칙으로 변환됐다. 벽 패널의 접합부가 상위 구조의 노드로 보였다. 분석실 전체가 격자의 부분 집합처럼 읽혔다.
소라는 진혁을 찾아갔다. 진혁이 관제실에서 통신 로그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 작업을 계속하면 내 한국어가 사라져.”
진혁이 돌아봤다.
“뭐?”
“격자를 읽을수록 한국어가 멀어져. 지금도 이 문장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려.”
진혁의 입이 굳었다.
“그만두면 돼.”
“그만두면 격자 쪽 인지도 풀려. 근데.”
소라가 멈췄다. 단어를 찾고 있었다.
“근데 풀리면서 한국어 쪽도 같이 손상될 것 같아. 인터페이스가 이미 바뀌었어.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양쪽 다 잃어.”
진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소라와의 거리가 좁아졌다. 진혁의 손이 소라의 어깨에 닿았다. 소라는 그 손의 무게를 느꼈다. 동시에 진혁의 손이 가하는 압력이 격자의 물리 변이 패턴으로 변환되는 것을 느꼈다. 두 가지 인지가 겹쳐 있었다. 인간의 감각과 격자의 해석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다.
“지구에 보고하자. 통신 지연 편도 7시간이지만, 전문가 의견을 받아야 해.”
소라가 고개를 저었다.
“7시간 후면 더 진행돼. 지금도 이 대화를 하면서, 네 말이 격자 패턴으로 번역되고 있어. 자동으로.”
진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내 말이 뭘로 번역돼?”
“네가 '보고하자'라고 했을 때, 그 말이 격자의 전이 규칙 중 하나로 먼저 변환됐어. 그 다음에 한국어 의미가 왔어. 순서가 뒤집혔어.”
진혁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소라가 봤다. 진혁의 움직임이 격자의 동적 변이 패턴으로 읽혔다. 사람의 움직임이 정보 구조로 분해되고 있었다. 소라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분석실의 공간 구조가 느껴졌다. 격자가 열어 준 인지. 벽의 위치, 진혁의 체열, 공조 장치에서 나오는 공기의 흐름. 모든 것이 격자의 문법으로 정렬돼 있었다. 소라는 눈을 떴다.
“나는 이걸 계속할 거야.”
진혁이 소라를 오래 봤다.
“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소라가 벽에 기대 섰다. 등 뒤의 금속 벽이 차가웠다.
“이미 바뀐 걸 되돌리면 양쪽 다 부서져.”
진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라가 이어 말했다.
“격자를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어. 한국어로만 사고하던 내가 이미 없어. 앞으로 가는 것만 남았어.”
소라는 분석실로 돌아갔다. 문을 열었다. 분석실의 공기가 건조했다. 모니터 세 대의 대기 화면이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소라는 의자에 앉아 격자 도표의 최상위 구조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진혁은 관제실에서 소라의 뇌파를 원격으로 모니터링했다. 소라의 뇌파가 인간의 알려진 어떤 패턴과도 일치하지 않는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진혁은 화면을 보면서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소라의 뇌파가 진동하고 있었다. 기존 데이터베이스의 어떤 유형과도 일치하지 않는 고주파 활성. 진혁은 통신 모듈의 기록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기록은 남겨야 했다. 지구까지 통신이 도달하는 데 7시간. 응답이 돌아오는 데 7시간. 14시간 동안 이 선내에서 벌어지는 일은 진혁 혼자 감당해야 했다.
소라의 화면에 최상위 구조가 펼쳐졌다. 격자의 전체 설계가 보였다. 나노 구조의 층위가 수천 개. 각 층위가 독립적인 의미 체계를 이루면서 동시에 상위 체계의 부분이었다. 소라는 그 구조를 읽었다. 읽는 것이 아니었다. 구조 안에 있었다. 소라의 인지가 구조 안으로 들어갔다. 격자가 소라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었다. 태양계 외곽의 다른 천체들. 같은 격자 구조를 가진 천체가 17개 더 있었다. 각 천체의 위치와 거리와 격자의 변이 차이가 하나의 도표 안에 있었다. 17개의 천체가 하나의 연결된 체계였다. 체계의 설계가 소라의 인지 안에서 한꺼번에 펼쳐졌다. 격자를 만든 존재가 태양계 외곽 전체를 하나의 정보 기반으로 설계한 것이었다. 소행성과 얼음 천체들의 표면 아래에 같은 나노 격자가 박혀 있었다. 각 격자가 독립적인 도구이면서 전체 체계의 노드였다. 소라는 그 체계의 규모를 감지하는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 의자 팔걸이를 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소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벽을 잡고 관제실로 갔다. 진혁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소라를 봤다. 소라의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이 건조했다.
“진혁.”
소라가 말했다. 한국어가 느리게 나왔다. 단어 사이에 간격이 있었다.
“여기가. 하나가. 아니야.”
소라의 입술이 떨렸다. 한국어의 조사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가'와 '이'의 선택이 의식적이었다. 예전에는 자동이었던 것이 수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혁이 일어섰다.
“뭐가 하나가 아니야?”
소라가 손을 들어 관제실의 항법 모니터를 가리켰다. 태양계 외곽의 궤도 지도가 떠 있었다.
“17개. 더. 있어. 같은 거.”
소라의 눈에서 초점이 흔들렸다. 동공이 확장돼 있었다. 진혁이 소라의 팔을 잡았다. 소라의 피부가 차가웠다. 맥박이 빨랐다. 진혁이 소라를 관제실 의자에 앉혔다. 소라의 체중이 가볍게 느껴졌다. 3일째 식사를 거의 하지 않은 것이었다.
소라는 관제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혁이 옆에 앉았다. 소라의 호흡이 불규칙했다. 소라가 입을 열었다. 한국어가 아닌 소리가 나왔다. 격자 패턴의 변이 구조를 음성으로 표현하려는 시도 같았다. 목구멍에서 나는 저음과 치찰음의 조합. 인간의 성대로 낼 수 있는 소리였지만, 어떤 인간 언어에도 속하지 않는 소리였다. 소라가 멈췄다. 자기 목에서 나온 소리를 자기 귀가 들었다. 그 소리가 격자의 음성 변환과 정확히 일치했다. 입을 다물었다. 턱이 떨렸다. 눈을 감았다.
“소라.”
진혁이 불렀다. 소라가 눈을 떴다. 진혁을 봤다. 진혁의 얼굴이 보였다. 동시에 진혁의 체열 분포와 근육의 긴장도와 호흡 주기가 격자의 문법으로 읽혔다.
“나. 아직. 여기 있어.”
소라가 말했다. 한국어였다. 느리고, 비틀거리는 한국어.
소라는 바닥에 앉은 채 관제실의 천장을 봤다. 천장의 조명 패널이 보였다. 직사각형. 이번에는 '직사각형'이라는 한국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격자의 2단계 변이만 떠올랐다. 소라는 그 변이 패턴을 입 안에서 굴렸다.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소라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관제실 바닥에 격자 패턴을 그리기 시작했다. 진혁이 봤다. 소라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닥에 나노 구조의 확대 모사가 그려지고 있었다. 정확했다. 현미경 이미지를 보지 않고 그리고 있었다. 소라의 기억이 아니었다. 소라는 이 패턴을 의식적으로 외운 적이 없었다. 격자가 소라의 운동 신경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복사하고 있었다. 소라의 손은 도구였다. 격자의 자기 복제를 위한 출력 장치. 소라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출력 장치.
진혁이 소라의 손을 잡았다. 펜이 멈췄다. 소라가 진혁을 봤다. 소라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초점이 진혁과 격자 패턴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지구에 통신 보낼게.”
진혁이 말했다.
“이 천체에. 사람을. 더 보내면 안 돼.”
소라가 말했다. 진혁이 소라를 오래 봤다.
“왜?”
소라가 바닥에 그린 패턴을 가리켰다.
“이걸. 보는 사람은. 다. 바뀌어.”
진혁이 바닥의 패턴을 봤다. 나노 격자의 확대 복사본. 선과 점의 배열. 진혁의 눈이 패턴 위를 따라가고 있었다. 선의 배열이 시선을 끌었다. 눈이 스스로 다음 선으로 이동했다. 소라가 경험한 것의 시작이 진혁에게도 일어나고 있었다. 소라가 진혁의 손을 잡았다. 세게.
“보지 마.”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소라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진혁이 바닥에서 눈을 떼는 데 2초가 걸렸다. 눈을 뗀 뒤에도 패턴의 잔상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 진혁이 눈을 비볐다.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관제실의 팬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바닥에 그려진 격자 패턴이 형광등 아래에서 선명했다. 진혁의 눈이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