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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의 바다

2026. 7. 30. · 9,530자 · 약 11분

3시간의 바다 썸네일
17

수도꼭지에서 마지막 물방울이 떨어졌다. 컥, 하는 메마른 소리와 함께 펌프의 미세한 진동이 멎었다. 욕조에는 물이 3분의 1쯤 차 있었다. 서진은 무릎을 꿇은 채 욕조의 가장자리를 보고 있었다. 수면이 아주 천천히 흔들리다 멈췄다. 오전 8시 정각. 오늘의 급수는 끝났다.

그녀는 일어서서 화장실 벽에 걸린 플라스틱 양동이 두 개를 확인했다. 하나는 가득 차 있었고, 다른 하나는 절반쯤 비어 있었다. 이걸로 내일 오전 5시까지 버텨야 했다. 설거지, 세면, 그리고 마실 물. 그녀는 어젯밤 받아놓은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어 컵에 따랐다. 정수 필터를 거친 물이었지만 희미한 흙냄새가 났다. 익숙한 냄새였다.

창밖은 이미 뿌연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통합정부의 기후 제어 시스템이 수도권 상공의 미세먼지를 완벽하게 막아낸다고 광고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창틀에는 매일같이 고운 모래가 쌓였다. 서진은 물티슈 한 장을 뽑아 창틀을 닦았다. 한 번 훔쳐냈을 뿐인데 티슈가 금세 회색으로 변했다. 티슈를 버리는 대신, 잘 말려두었다가 나중에 바닥을 닦는 데 쓸 것이다. 물이 귀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두 번, 세 번 다시 쓰는 법을 배웠다.

옷을 갈아입고 현관을 나섰다. 복도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웃들이 저마다의 물통을 들고 움직였다. 아파트 단지 중앙의 공용 급수대에 줄을 서려는 사람들이었다. 단수 시간 이후에도 비상용으로 하루 100리터씩 배급되는 물을 받기 위한 줄은 보통 2시간을 넘겼다. 서진은 그들을 지나쳐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통합정부 중앙부처 공무원에게는 월 500리터의 추가 용수가 지급되었다. 그 사실이 때로는 안도감을, 때로는 부채감을 주었다.

차를 몰아 내부순환도로에 진입하자 풍경이 달라졌다.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스마트 관개 농장들의 유리 돔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났다. 최소한의 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도록 설계된 식물 공장들이었다. 저 안에서 자라는 작물들은 서진이 마시는 물보다 더 깨끗한 물을 공급받을 것이다. 차의 자율주행 시스템이 부드럽게 차선을 변경하는 동안, 서진은 전방 스크린에 뜬 뉴스 헤드라인을 훑었다. ‘서남부 지역 가뭄 400일 돌파, 식수 배급량 추가 감축.’ ‘수자원부, 해수 담수화 플랜트 4호기 고장으로 가동 중단.’ 좋은 소식은 없었다.

20분 뒤, 차는 광화문의 통합정부청사 지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의 사무실은 17층, 외계자원개발부 정책조정실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완벽하게 제어되는 습도와 온도. 바깥세상의 갈증과는 무관한 공간이었다.

책상 위에는 두 종류의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왼쪽에는 어젯밤 수자원부에서 보낸 ‘수도권 광역상수도 노후관 교체 사업 예산 검토 요청’이라는 제목의 두꺼운 서류 뭉치가, 오른쪽에는 ‘아레스-7 심우주 망원경 프로젝트 3단계 예산 최종 승인 요청서’라는 제목의 얇고 빳빳한 브로셔가 있었다. 브로셔 표지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푸른빛을 띤 외계 행성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었다.

서진은 의자에 앉아 오른쪽 브로셔를 먼저 집어 들었다. 아레스-7 프로젝트. 인류 역사상 가장 멀리 내다보는 눈. 지구에서 24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은하의 외곽, 항성 ‘TYC 392-1786-1’을 공전하는 외계 행성 ‘자일로스(Xylos)’의 대기 스펙트럼에서 물 분자의 흔적을 발견한 프로젝트였다. 브로셔를 넘기자, 지난주 언론 브리핑에서 보았던 바로 그 그래프가 나왔다. 거의 평탄한 곡선 위로 아주 작게, 바늘처럼 솟아오른 부분. 수증기 흡수 스펙트럼. 수백만 광년 너머에 물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서명해야 할 것은 그 증거를 ‘확증’하기 위한 예산이었다. 망원경의 출력을 3배로 증폭하고, 10년간 관측을 지속하여 자일로스에 정말 액체 상태의 물, 즉 바다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계획. 그 계획에 필요한 예산은 왼쪽의 낡은 수도관들을 교체하는 데 필요한 금액의 12배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실장님, 박기현 박사님 오셨습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의 남자가 거의 뛰어들어오다시피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레스-7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실장님. 어제 보내드린 자료는 보셨습니까?”

박기현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서진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데이터 패드를 켰다. 화면에는 복잡한 수식과 시뮬레이션 영상이 떠 있었다.

“자일로스의 대기 모델링을 정교화했습니다. 현재 데이터만으로도, 행성 표면에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확률이 72%에 달합니다. 72%! 이건… 이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직전, 서쪽 바다 너머에 육지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과 같습니다.”

서진은 표정 없이 그의 얼굴과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박사님, 앉으시죠.”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에 박기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최종 승인만 남았습니다. 실장님의 서명 하나면, 인류는 새로운 바다를 갖게 되는 겁니다. 지구 밖의 바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서진이 짧게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박기현의 데이터 패드가 아닌, 책상 왼쪽의 수도관 교체 사업 보고서에 머물러 있었다.

“이 예산으로 우리 시의 노후 상수관을 얼마나 교체할 수 있는지, 혹시 계산해 보셨습니까?”

박기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네? 그건… 수자원부 소관이지 않습니까.”

“현재 서울의 누수율은 17%입니다. 50년이 넘은 관들이 터져나가고 있죠. 보내는 물의 5분의 1이 땅속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아레스-7 프로젝트 3단계 예산의 절반만 있어도 서울 전역의 주 배관을 교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누수율을 3%까지 낮출 수 있죠.”

박기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실장님, 이건 수도관 따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종의 미래에 대한 투자입니다. 지구의 물이 언젠가 마를 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자일로스는 단순한 행성이 아니라, 인류의 다음 보금자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란 말입니다.”

“그 아이들이 오늘 마실 물이 부족합니다, 박사님.”

서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사무실의 공기를 무겁게 갈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17층에서 내려다본 도시 위로 먼지 안개가 자욱했다.

“어젯밤 광화문 광장에서 물 배급 시간을 늘려달라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2,000명이 모였고, 17명이 탈수 증세로 실려 갔습니다. 제 이웃들은 아침 8시면 끊기는 물을 받으려고 새벽부터 줄을 섭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240만 광년 떨어진 곳의 바다를 찾기 위해 그들이 10년간 마실 물 값을 서류 한 장에 결재해야 하는 상황이고요.”

그녀가 몸을 돌려 박기현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건 단기적인 시각입니다! 위대한 발견은 언제나 눈앞의 희생을 딛고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의 세대는 거둘 열매 자체가 없을 겁니다.”

“그 씨앗을 뿌릴 땅이 말라 죽어가고 있다면요?”

침묵이 흘렀다. 박기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서진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녀는 아레스-7의 브로셔와 수자원부의 보고서를 나란히 놓았다. 1쪽은 매끄러운 광택지에 인쇄된 우주의 꿈이었고, 다른 1쪽은 거친 재생지에 인쇄된 도시의 현실이었다.

“결정은 오늘 오후까지 내려야 합니다.”

박기현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그의 목소리에서 아까의 열정은 사라져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나가보셔도 좋습니다.”

박기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으로 향하던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실장님. 그 스펙트럼 선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닙니다. 그건 희망입니다.”

그가 나가고, 사무실에는 다시 정적만 남았다. 서진은 브로셔에 인쇄된 가느다란 스펙트럼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희망. 그녀는 책상 위의 컵을 들어 남은 물을 마셨다. 희미한 흙냄새가 다시 입안에 감돌았다.

그것은 땅의 냄새, 생명의 근원이지만 이제는 종말의 전조처럼 느껴지는 냄새였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두 개의 저울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1쪽에는 240만 광년 너머의 바다가, 다른 1쪽에는 당장 내일 터져버릴지도 모르는 수도관이 놓여 있었다. 둘 다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지만, 그 시간의 단위가 너무도 달랐다.

책상 위 인터컴에서 낮은 신호음이 울렸다. 수신자를 확인하자 ‘수자원부 기반시설관리팀 최민준 팀장’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프로토콜에 따르면 다른 부처의 팀장급이 그녀에게 직접 연락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연결해.”

짧게 말하자,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실장님, 외람된 줄 아오나, 긴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 5분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진은 잠시 망설였다. 박기현 박사와의 면담 직후, 수자원부에서 온 연락.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책상 위의 두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올라오시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최민준 팀장은 박기현 박사와는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있는 듯한 인물이었다. 마른 체구에 햇볕과 먼지에 그을린 얼굴, 잘 맞지 않는 낡은 정장 소매 아래로는 작업용 스마트워치가 채워져 있었다. 그는 이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에 바깥세상의 건조한 공기를 한 줌 몰고 온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장님.”

그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땀과 먼지가 뒤섞인 냄새를 풍겼다. 서진은 손짓으로 의자를 권했다.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최 팀장님. 아시다시피 서로 바쁜 몸입니다.”

최민준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데이터 패드를 꺼냈다. 그가 화면을 켜자, 서진의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 속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복잡하고 붉은 경고 표시로 가득한 수도관 지도가 나타났다.

“실장님께서 검토 중이신 보고서는 지난 분기 자료를 기반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상황은, 그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그가 지도의 한 부분을 확대했다. 한강 남쪽, 송파 취수장으로 이어지는 제1 주배관 라인이었다. 화면 속 배관의 특정 지점들이 섬광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음파 탐지 센서와 내부 압력 데이터입니다. 어젯밤 23시를 기점으로 임계치를 돌파했습니다. 내부에서 미세 균열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희 시뮬레이션 결과, 이 상태로는 일주일을 버티기 힘듭니다. 만약 제1 주배관이 파열되면….”

최민준은 말을 잇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서진이 대신 그의 말을 끝맺었다.

“강남, 서초, 송파, 강동. 서울 동남권 전체에 급수가 중단되겠죠.”

“중단 정도가 아닙니다, 실장님. 복구에는 최소 3개월이 소요됩니다. 비상 급수망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섭니다. 400만 인구가 완벽한 식수 고립 상태에 빠지는 겁니다. 어젯밤 광화문 시위는… 아이들 장난처럼 보이게 될 겁니다.”

사무실 안의 서늘한 공기가 순식간에 증발하는 듯했다. 서진은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누수율 17% 같은 행정적인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명시한 재앙의 예고였다.

“왜 공식 보고 라인을 거치지 않았죠?”

“너무 늦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공식 안건으로 상정하고, 긴급 예산을 요청하고, 그 예산이 여러 부처의 문턱을 넘어 저희 손에 들어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봤습니다. 그 절차가 끝날 때쯤이면 저희는 이미 파열된 수도관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겠지요.”

최민준의 시선이 서진의 책상 위, 아레스-7 프로젝트의 브로셔로 향했다. 그의 눈에 절박함과 일말의 경멸이 동시에 스쳤다.

“실장님의 서명 하나를 기다리는 예산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저는 모릅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압니다. 그 예산의 10분의 1만 있으면, 지금 당장 응급 보강팀을 투입해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습니다. 파열 확률을 80%에서 15%로 낮출 수 있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부디… 부디 땅 밑을 봐주십시오, 실장님. 수백만 광년 떨어진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 바로 아래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민준이 나가고, 사무실의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서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박기현이 말했던 ‘희망’이라는 단어와 최민준이 예고한 ‘재앙’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끔찍하게 뒤엉켰다. 그녀는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뿌연 먼지 너머로 거대한 도시가 누워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풍경.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제 보이지 않는 땅속, 낡은 혈관처럼 도시를 휘감은 수도관들이 보였다. 그 안에서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는 결심한 듯 손을 뻗어, 책상 1쪽에 놓인 비상 예산 전용 결재 패드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최민준 팀장이 말한 응급 보강팀 투입 예산. 규정과 절차를 무시한 월권행위였지만, 400만 명의 목마름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패드에 지문을 인식시키려던 바로 그 순간, 책상 위 인터컴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비서실을 거치지 않은 직통 회선이었다. 발신자는 ‘장관실’이었다.

“서 실장, 나요.”

스피커 너머로 윤 장관의 나직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진은 패드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바로 했다.

“네, 장관님.”

“아레스-7 보고서, 올라왔지? 박기현 박사도 다녀갔을 테고.”

“방금 막 검토를 마쳤습니다.”

“좋아. 오후 3시에 대통령 브리핑이 잡혔어.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만한 소식이 필요해. 알다시피 요즘 민심이 흉흉하잖소. 땅만 쳐다보고 한숨 쉴 게 아니라, 가끔은 하늘도 보게 해줘야지. 우리가 바로 그 일을 하는 부서고.”

장관의 목소리에는 어떤 의심이나 질문의 여지도 없었다. 그것은 통보였다. 서진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장관님, 하지만 수도권 광역상수도 쪽에…”

“아, 그 보고서도 봤어.”

윤 장관이 가볍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수자원부 놈들, 매년 똑같은 소리야. 예산만 주면 다 해결될 것처럼 앓는 소리 하는 게 그 친구들 연례행사 아니던가. 서 실장, 큰 그림을 봐야지. 당장 수도관 몇 개 때우는 것보다, 인류의 미래를 여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게 통합정부의 위상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생각해 봐. 이건 외계자원 확보라는 실리뿐 아니라, 대중을 통합하고 이끄는 상징이 될 거요. 오후 2시까지 결재해서 올려. 브리핑 자료 만들어야 하니까.”

통신이 끊겼다. 사무실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진의 시선은 자신의 손과, 그 아래 놓인 두 개의 상반된 미래를 담은 결재 패드 사이를 오갔다. 윤 장관의 말처럼, 사람들은 정말 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 발밑의 갈라진 땅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니, 견뎌내야만 하는 걸까. 그녀의 손끝에서 도시의 운명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통신이 끊긴 사무실은 완벽한 진공 상태가 된 것 같았다. 서진은 윤 장관의 목소리가 남긴 잔향이 공기 중에서 모두 흩어질 때까지 숨을 참았다. 큰 그림. 상징. 희망.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 단어들이 맴돌았다. 그것은 너무도 거대하고 매끄러워서, 최민준 팀장의 갈라진 손등이나 아파트 복도를 채우던 이웃들의 지친 얼굴 같은 것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책상 위의 두 서류를 보았다. 푸른 행성의 브로셔와 누런 재생지 보고서. 하늘과 땅. 미래와 현재. 희망과 생존. 그러나 이제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장관의 말은 명령이었고, 이 거대한 관료제의 최상층에서 내려온 결정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어 그녀의 책상까지 밀려온 것이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흐름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 맞춰 정확한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외계자원개발부 정책조정실장이라는 직책의 본질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아레스-7 프로젝트의 브로셔와 함께 놓인 결재용 데이터 패드를 집어 들었다.

패드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화면을 켜자 ‘아레스-7 심우주 망원경 프로젝트 3단계 예산 최종 승인 요청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전자펜을 들었다. 펜 끝이 화면에 닿기 직전,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 찰나의 순간, 그녀는 240만 광년 떨어진 미지의 바다가 아니라, 어젯밤 컵에 물을 따를 때 희미하게 맡았던 흙냄새를 떠올렸다. 마르고 갈라진 땅의 냄새.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의 냄새였다.

그녀는 서명했다. 자신의 이름 세 글자가 푸른 빛으로 화면에 새겨지는 것을 무감각하게 지켜보았다. ‘승인’ 버튼을 누르자, 파일은 즉시 장관실로 전송되었다. 모든 것은 3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데이터 패드를 책상 저편으로 밀어냈다. 마치 오염된 무언가를 밀어내듯. 이어서 수자원부의 보고서를 집어 들어 파일 캐비닛 가장 아래 칸, ‘보류’ 서류함에 던져 넣었다. 철제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갈랐다.

오후 3시. 약속된 시간에 사무실 벽의 대형 스크린이 켜지며 대통령의 긴급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완벽하게 정돈된 집무실을 배경으로, 대통령은 단호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절망이 아닌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서진은 표정 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대통령의 뒤편 스크린에 그녀가 방금 승인한 브로셔의 표지 사진, 푸른 행성 자일로스의 모습이 장엄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지구로부터 240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바다의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먼 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새로운 미래이며, 인류의 위대한 도전 정신이 이뤄낸…”

대통령의 연설이 절정으로 치닫던 순간이었다. 스크린 하단에 손톱만 한 크기의 붉은색 자막이 깜빡이며 나타났다. ‘[긴급재난문자] 서울시 송파구 일대 주배관 파열. 강남, 서초, 송파, 강동구 전 지역 급수 완전 중단. 복구 시점 미정.’

자막은 몇 초간 머물다 사라졌지만, 서진의 망막에는 그 붉은 글자들이 낙인처럼 새겨졌다. 화면 속 대통령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인류의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다. 서늘한 사무실 안, 완벽하게 통제된 습도의 공기 속에서 서진은 문득 극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뿌연 먼지 안개 너머, 재앙이 시작된 도시가 침묵 속에 누워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 거대한 도시의 혈관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책상으로 돌아와 아침에 마시다 남은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컵을 향해 주전자를 기울였다. 맑은 물이 컵 안으로 떨어지며 작게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컵을 들어, 차갑고 희미한 흙냄새가 나는 물을 천천히, 남김없이 목 안으로 넘겼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내린 결정의 무게는, 결국 누가 짊어지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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