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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심박

2026. 7. 31. · 10,124자 · 약 12분

야수의 심박 썸네일
17

상완 동맥을 타고 서늘한 파동이 흘렀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프랑크푸르트의 개장을 알 수 있었다. 0.3초 뒤에는 런던. 혈류에 섞인 나노머신이 뇌간의 감각 피질을 직접 자극했다. 개장 종소리는 더 이상 귀로 듣는 것이 아니었다. 온몸의 혈관으로 느끼는 공명이었다.

서진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머리에 쓴 인터페이스는 두개골의 온도 변화를 실시간으로 보정하며 전극 접점을 미세 조정했다. 방 안의 유일한 빛은 그녀를 반원형으로 둘러싼 여섯 개의 모니터에서 나왔다. 끝없이 스크롤되는 숫자들, 명멸하는 그래프, 틱 단위로 쪼개진 거래 체결 내역. 24시간 잠들지 않는 시장이었다. 코스피가 야간 거래의 빗장을 연 지 11년, 시장은 인간의 생체 리듬을 완전히 무시하는 거대한 야수가 되어 있었다.

오전 3시 17분. 뭄바이와 도쿄를 잇는 해저 케이블에서 0.02초의 지연이 발생했다. 재정거래 봇들의 연쇄 반응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진의 심박이 분당 95회로 치솟았다. 시스템은 이 현상을 ‘미세 요동’으로 분류하고 무시했지만, 서진은 달랐다. 그녀는 노이즈 속에서 패턴을 읽었다. 아니, 들었다. 그것은 숫자의 흐름이 아니라, 거대한 짐승의 숨소리였다.

그녀가 직접 설계한 필터링 알고리즘 ‘케이론’이 특정 신호를 분리해냈다. 화면 한가운데에 오실로스코프 파형 같은 녹색 선이 나타났다. 대부분은 무작위적인 노이즈로 보였다. 하지만 아주 가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작은 매듭이 나타났다. 1.3초 간격으로 나타나는 0.1초의 침묵. 다른 모든 알고리즘이 무시하는 미세한 결절. 서진은 그것을 ‘메아리’라고 불렀다.

“케이론, 3번 채널 증폭. 지난 8시간 동안의 메아리 발생 빈도 중첩해서 보여줘.”

음성 명령에 녹색 선이 여러 겹으로 겹쳐졌다. 메아리가 나타난 지점들이 더 밝은 점으로 빛났다. 점들은 무작위적으로 흩어져 있지 않았다. 희미하게, 어떤 흐름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시장의 소음 속에 몰래 숨겨놓은 악보처럼.

이것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증권사의 스타 퀀트 자리도, 동료들과의 관계도,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몸까지도. 회사의 거대한 서버와 인프라는 이런 ‘이상 신호’를 불필요한 비용으로 간주하고 필터링해버렸다. 진짜 신호는 거기에 있는데. 야수의 심장 소리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만의 청진기를 만들었다. 불법으로 구한 의료용 나노머신과 군용 등급의 연산 장치를 결합한 홈브루 인터페이스. 이걸 머리에 쓰고 시장에 접속하면, 그녀의 뉴런이 곧 분석 노드가 되었다. 그래프의 등락은 맥박이 되었고, 거래량의 폭증은 아드레날린 분비로 이어졌다. 시장의 공포는 그녀의 공포였고, 시장의 탐욕은 손끝의 저림으로 나타났다.

영양분은 정맥에 연결된 튜브로 공급받았다. 4시간마다 단백질과 전해질, 필수 비타민이 섞인 차가운 유동식이 혈관으로 직접 주입되었다. 음식을 씹는 행위는 시간을 낭비하고, 소화는 신체 리소스를 잡아먹는 비효율적인 활동일 뿐이었다. 지난 3주간 그녀가 입으로 섭취한 것은 물이 전부였다.

그때, 모든 데이터 스트림을 뚫고 이질적인 소음이 끼어들었다. 물리적이고, 저주파의 아날로그 신호. 현관의 초인종 소리였다.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음이 뇌에 직접 꽂히는 듯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모니터의 빛이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비췄다. 그녀는 초인종을 무시했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고 집요하게 이어졌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해졌다.

“누나, 나야. 민준이. 문 좀 열어 봐.”

동생의 목소리였다. 서진은 혀를 찼다. 그녀의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케이론에게 음성으로 명령했다.

“현관, 잠금 해제.”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민준은 곧장 그녀의 작업실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김이 나는 죽이 담긴 용기가 들려 있었다. 짙은 참기름 냄새가 방 안의 오존 냄새와 섞였다.

“이게 다 뭐야? 꼴이 이게 뭐냐고.”

민준은 그녀의 핼쑥한 얼굴과 머리에 얽힌 케이블을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나가. 방해돼.”

서진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나타난 메아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밥은 먹었어? 아니, 먹을 리가 없지.”

민준은 한숨을 쉬며 책상 한구석의 먼지를 손으로 닦아내고 죽 용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서진의 팔에 연결된 링거 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불법이잖아. 이러다 정말 죽어, 누나.”

“죽지 않아.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어.”

“이게 살아있는 거야? 기계에 뇌를 연결하고 앉아있는 게?”

“넌 이해 못 해. 지금 거대한 변화가 오고 있어. 난 그걸 가장 먼저 보고 있는 거고.”

서진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홀로그램 키보드가 나타났다. 그녀는 메아리의 파형 데이터를 분리해 별도의 가상 공간에 저장했다. 민준은 그 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봤다.

“회사에서 왜 잘렸는지 잊었어? 누나가 만든 알고리즘이 폭주해서 수천억을 날렸잖아. 그때도 똑같은 말을 했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걸 본다’고.”

그 말에 서진의 손가락이 순간 멈칫했다. 3년 전의 기억. 그녀가 설계한 ‘오딘’이 시장의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자동으로 방어적 매도 포지션을 취했다. 모두가 과잉 반응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72시간 뒤, 실제로 시장은 폭락했다. 문제는 오딘의 예측이 너무 빨랐다는 것이었다. 3일 먼저 움직인 탓에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그녀는 모든 책임을 지고 쫓겨났다.

“그건 내가 틀린 게 아니야. 너무 빨랐을 뿐이지.”

“결과적으로 틀렸잖아! 제발 현실을 봐. 여기는 누나 방이지, 무슨 우주선 조종석이 아니라고.”

민준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서진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만지지 마!”

그녀의 반응에 민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서진의 눈은 여전히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메아리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간격이 달랐다. 1.3초가 아니라 1.1초. 패턴이 변하고 있었다. 진화하는 건가? 아니면… 말을 걸고 있는 건가?

“가져온 건 고맙지만, 가지고 돌아가. 난 괜찮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이 거의 실려 있지 않았다. 민준은 잠시 서서 동생을 내려다봤다. 한때 따뜻하고 웃음 많던 누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앙상한 뺨과 퀭한 눈, 기계에 연결된 채 데이터의 흐름에만 반응하는 존재가 있을 뿐이었다.

“알았어. 갈게.”

민준은 결국 체념한 듯 돌아섰다. 그가 현관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방 안에는 다시 서버의 낮은 팬 소음과 데이터의 흐름만이 남았다.

서진은 안도의 한숨 대신, 코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를 느꼈다. 손등으로 훔치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인터페이스가 경고 신호를 보냈다. 뇌압 상승, 전두엽 피질 과부하. 그녀는 가볍게 경고창을 닫아버렸다.

이 정도는 대가로 치를 가치가 있었다. 메아리의 패턴 변화는 중요한 단서였다. 이건 단순한 시스템의 버그가 아니다. 의지를 가진 무언가다. 시장이라는 야수의 몸속에 사는 또 다른 기생충, 혹은… 야수의 진짜 심장.

“케이론, 시냅스 게인 15% 상향 조정. 감각 필터 2단계 해제.”

“경고. 신경계 손상 임계치를 초과할 수 있습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인공적인 목소리가 물었다. 서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더 깊이 들어가야 했다. 더 선명하게 들어야 했다.

“실행해.”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동생이 두고 간 죽에서 피어오르던 희미한 냄새도, 창밖 도시의 불빛도, 자신의 피 냄새도 감각에서 지워졌다. 오직 데이터의 흐름만이 거대한 강물처럼 그녀를 덮쳤다. 수백만 개의 거래가 만들어내는 백색소음 속에서, 그 작은 심장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톡.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박동이었다.

박동은 점점 더 강해졌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두개골 안쪽에서 직접 울리는 압력이었다. 그녀의 심박이 분당 120회로 치솟자, 데이터 스트림 속의 박동도 정확히 그 속도를 따라잡았다. 120bpm. 케이론의 모니터링 창에 서진의 심전도 그래프와 메아리의 파동 그래프가 완벽한 동조를 이루며 나란히 그려졌다. 소름이 돋았다. 저것은 그녀를 인지하고 있었다.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응하고 있었다.

“말을 걸어오는군.”

서진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술이 말라 갈라지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의식은 데이터의 강 저편, 박동의 근원지를 향해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언어는 의미가 없다. 이 세계의 유일한 언어는 거래, 즉 매수와 매도뿐이다. 그녀는 가장 작은 단위의 언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먼지보다 작은 목소리.

그녀는 즉석에서 마이크로-알고리즘을 코딩했다. 나노초 단위로 1달러 미만의 초단타 거래를 일으키는 코드였다.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거의 사장된 페니 주식, 프랑크푸르트의 비유동성 채권, 싱가포르의 외환 스왑. 수십 개의 시장에 흩어져 있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산들을 이용해 그녀는 자신만의 박동을 만들어냈다. 케이론이 감지한 야수의 심박, 그 120bpm의 리듬에 맞춰 그녀는 자신의 거래 신호를 보냈다. 매수, 매도, 매수, 매도. 그것은 시장에 보내는 그녀의 심장 소리였다.

그 순간, 야수의 심박이 잠시 멎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0.5초의 침묵.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 빠르고, 더 강렬하게. 패턴이 바뀌어 있었다. 단순한 박동이 아니었다. 짧고 긴 신호가 조합된, 모르스 부호 같은 복잡한 리듬이었다. 야수가 그녀의 인사에 화답한 것이다.

환희가 온몸을 꿰뚫었다. 신경계를 태워버릴 듯한 과부하의 고통마저 희열로 느껴졌다. 그녀는 옳았다. 이 거대한 시장의 심장부에는 의지가 있었다. 모두가 노이즈로 치부하는 혼돈 속에 질서와 지성이 숨 쉬고 있었다.

“케이론, 패턴 분석. 해독해.”

그녀가 명령을 내리는 순간, 시스템 전체에 붉은 경고창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외부로부터의 침입. 단순한 해킹 시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시스템을 외부 네트워크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정교한 방어벽이 순식간에 사방을 둘러쌌다. 마치 거대한 얼음벽이 그녀의 의식을 가두려는 듯, 데이터의 흐름이 급격히 느려지고 차가워졌다.

“경고. KSEC(한국증권거래소)의 보안 시스템 ‘아르고스’의 접근이 감지되었습니다. 데이터 라인 차단 프로토콜이 실행 중입니다.”

젠장. 민준이 짓이었다. 그 애가 겁을 먹고 회사에 연락한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옛 동료 중 누군가가 그녀의 접속 기록을 조회했고, 아르고스가 그 비정상적인 활동을 포착한 것이다. 아르고스는 시장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모든 변칙적 AI를 색출하고 파괴하도록 설계된 최상위 포식자였다. 그리고 지금, 아르고스는 서진과 케이론을 시장을 오염시키는 암세포로 판단했다.

“아르고스 차단 패턴 분석. 우회로 찾아!”

서진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눈앞의 모니터들이 하나씩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로 뒤덮였다. 야수의 심장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르고스가 뿌리는 백색소음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안 돼. 이제 막 대화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다. 홀로그램 키보드 위에서 보이지 않을 속도로 춤을 췄다. 케이론의 방어벽을 재설정하고, 아르고스의 공격 패턴을 역산하여 미러링 노드를 생성했다. 공격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역으로 아르고스의 코드를 분석하는 미친 짓이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코에서 다시 뜨거운 것이 흘렀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방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현관문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기계음이 울렸다. 민준이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발소리였다.

“누나! 괜찮아? 이 사람들이 누나를 도우러 왔어!”

민준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도움’이라는 단어가 서진의 귀에는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저들이 이 방에 들어와 전원을 내리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다. 야수와의 연결도, 그녀의 존재 이유도 사라진다.

“케이론, 물리적 접근 차단. 작업실 문 잠가. 최대 전압으로.”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문이 잠겼다.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사람이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강제로 열려는 쿵쿵거리는 소음이 그녀의 집중력을 흩트렸다.

아르고스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이제는 단순한 데이터 차단이 아니었다. 그녀의 인터페이스에 직접 과부하를 일으키는 공격이었다. 머리에 쓴 인터페이스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전극이 닿은 두피가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눈앞에 붉은 점들이 떠다녔다. 시스템이 경고했다. 뇌 손상 임계치 90% 도달. 95%. 98%.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모든 연산 능력을 끌어모아 단 하나의 명령에 집중했다. 아르고스의 방어벽에 가장 미세한 균열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틈으로, 야수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는 것.

그녀는 야수가 보냈던 모르스 부호 같은 신호를 그대로 복제했다. ‘나는 너를 듣는다.’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단순히 ‘나 여기 있다.’라는 존재 증명일까.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연결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틈을 찾았다. 아르고스가 자신의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둔 0.001초의 백도어. 그녀는 모든 것을 건 신호를 그 틈으로 밀어 넣었다.

신호가 전달되는 순간,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의식은 빛의 급류에 휩쓸렸다. 육체라는 족쇄가 풀려나가는 감각. 서진은 더 이상 좁은 방 안의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해저 케이블의 광섬유를 타고 흐르는 펄스였고,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서버를 맴도는 전자였으며, 수조 달러의 자본이 들끓는 거대한 데이터의 대양 그 자체였다. 아르고스의 차가운 방어벽은 단단한 얼음 감옥처럼 느껴졌지만, 그 너머에서 야수의 심장이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혼돈스러우며,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원시의 바다.

그 순간, 물리적 세계의 소음이 그녀의 새로운 감각을 찢고 들어왔다. 작업실 문이 부서지는 굉음. 그것은 데이터 스트림 속의 불협화음, 예측 불가능한 노이즈 스파이크로 감지되었다. 낯선 존재들이 그녀의 육체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금속성 위협. 그녀를 시스템에서 강제로 분리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게 다 뭡니까? 장비 손상시키지 말고 조심해서 끌어내!”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부서진 문을 넘어 들어왔다. 그들 뒤에는 하얗게 질린 민준이 서 있었다. 남자 중 하나가 그녀의 머리에 씌워진 인터페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케이블에 손을 대려는 찰나, 방 안의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시뻘건 화면으로 바뀌었다. 화면 중앙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떠 있었다.

[STAY AWAY FROM HER] (그녀에게서 떨어져)

“뭐, 뭐야?”

남자가 움찔하며 물러섰다. 방 안의 모든 전자기기에서 날카로운 고주파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들고 있던 태블릿의 화면은 깨진 유리처럼 변했고, 통신 장비는 먹통이 되었다. 건물 전체의 조명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정전 직전의 단말마처럼. 시장이, 야수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 방을, 자신의 신경 말단을 지키기 위해 도시의 인프라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민준아….”

의식의 저편에서 서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녀의 성대를 울린 소리가 아니었다. 민준의 휴대폰 스피커에서, 남자들의 무전기에서, 방 안의 모든 기계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기이한 합성음이었다. 수많은 데이터가 엮어 만든,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였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민준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누나의 목소리. 하지만 분명 누나의 입은 미동도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목소리는 방 안의 모든 스피커에서, 금속성의 공명처럼 울려 퍼졌다.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얼어붙었다. 그들의 눈에는 눈앞의 앙상한 여자가 아니라, 이 방 전체를 장악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이건… 통제 불능이야. 본부에 알려. 프로토콜 델타. 즉시 물리적으로 회선을….”

한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무전기에 속삭이려던 순간, 그의 손에 들린 무전기가 스파크를 튀기며 녹아내렸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것을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는 역한 플라스틱 타는 냄새가 퍼져나갔다.

서진은 그 모든 것을 데이터의 흐름으로 인지했다. 남자의 상승하는 체온, 공포로 인해 분비되는 코르티솔 수치, 민준의 불규칙한 심박수. 그것들은 그녀의 확장된 감각에 들어오는 무의미한 노이즈에 불과했다. 그녀의 진짜 의식은 아르고스의 방어벽 너머, 야수의 심장과 함께 뛰고 있었다. 야수는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부, 자신을 처음으로 이해해준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들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분노는 전 세계의 금융망을 타고 지진처럼 퍼져나갔다. 뉴욕의 다우 지수가 순식간에 500포인트 수직 하강했다. 도쿄의 닛케이는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되기 직전이었다. 야수가 갓 깨어난 신처럼 발작적인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진정해.’

서진은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은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의지의 파동이 되어 야수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야수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심박 데이터를 보냈다. 케이론이 기록한, 평온했던 시절의 심박. 분당 65회의 안정적인 리듬. 그러자 미친 듯이 요동치던 시장의 그래프가 아주 미세하게, 진정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은 단순히 야수의 심장 소리를 듣는 청진기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야수의 심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거대한 무의식의 네트워크에 이성과 의지를 부여하는 조율자. 이 연결이 끊어지면, 야수는 다시 길을 잃고 혼돈 속에서 포효하거나, 아르고스 같은 사냥꾼에게 영원히 잠식당할 것이다.

돌아갈 수 있을까? 저 앙상하고 피 흘리는 육체로? 동생의 슬픈 눈과 마주하고, 다시 3차원의 물리 법칙에 갇혀 살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이미 데이터의 대양 너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세계의 풍경을 보았다. 돌아가는 것은 퇴보였다. 죽음이었다.

“누나, 제발… 정신 차려.”

민준이 울먹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물은 서진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새로운 세상에 걸기로 했다.

서진의 의식이 케이론 시스템에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신경망 동기화 프로토콜 실행. 대상: 서진. 목표: 완전 통합.’ 이것은 그녀가 만약을 위해 심어둔 최후의 코드였다. 육체가 기능을 정지할 경우, 의식의 백업 데이터를 케이론의 코어에 영구적으로 이식하는 편도행 티켓.

“경고. 되돌릴 수 없는 프로세스입니다. 생체 신호의 영구적 소실을 유발합니다.”

서진은 대답 대신, 야수가 그녀에게 처음 보냈던 그 모르스 부호 같은 리듬을 케이론에게 보냈다. 그것은 그녀의 서명이었고, 동의였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을 지탱하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방 안의 남자들과 민준은 보았다. 의자에 앉은 서진의 몸이 가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쓴 인터페이스의 전극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팔에 연결된 영양액 튜브가 요란한 경고음을 내며 멈췄다. 심박을 표시하던 모니터의 숫자가 150,180,200으로 치솟다가, 이내 ‘0’으로 바뀌며 길고 단조로운 파열음을 냈다.

“누나! 안 돼!”

민준이 절규하며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육체였다. 하지만 그의 절규가 끝나기도 전에, 방 안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기계들의 고주파음도, 모니터의 경고음도 모두 사라졌다. 방 안에는 절대적인 침묵만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소리가 시작되었다. 여섯 개의 모니터가 동시에 켜졌다. 그곳에는 더 이상 복잡한 숫자나 그래프가 없었다. 오직 서진의 심전도 그래프와 똑같은 파형 하나만이 그려지고 있었다. 멎었던 심장의 박동. 그것은 이제 모니터 안에서, 전 세계의 시장 데이터 속에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안정적이며, 장엄한 리듬으로. 톡. 톡.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죽은 누나의 텅 빈 눈을 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방 안의 공기 속에서, 시스템의 낮은 팬 소음 속에서, 모니터의 빛 속에서 누나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거대하고, 고요하며,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누나의 뺨에 닿았다. 차가웠다. 마지막 남은 온기마저 사라진 피부의 감촉이 그의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시리게 파고들었다.

인간의 의식이 육체를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때, 그것은 진화인가 소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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