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각 장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진료실의 온도는 22도에 맞춰져 있었지만, 바깥의 54도가 유리창을 녹이고 벽의 단열재를 비집으며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남자는 다이얼을 돌려 생체 신호 안정기의 출력을 3% 낮췄다. 투명한 튜브를 따라 흐르던 옅은 녹색 용액의 속도가 느려졌다. 의자에 반쯤 누워 있는 여자의 팔에 연결된 바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자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턱 근육이 긴장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거의 끝났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그는 여자의 팔뚝 안쪽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나뭇잎 같기도 하고, 불꽃 같기도 한 모양. 열내성 유전자 요법, 서마-G 시술을 받은 모든 사람의 피부에 남는 ‘각인’이었다. 각인은 체내 나노머신이 유전자 변형을 유지하는 한 푸른색을 띠다가, 제거 시술인 ‘회귀’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잿빛으로 변했다. 여자의 각인은 이제 거의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남자, 민준의 팔뚝에도 같은 각인이 있었다. 그의 것은 여전히 선명한 푸른색이었다.
“이제… 더우면 죽나요?”
여자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죽지 않습니다. 다만 평균 기온 40도 이상의 ‘적색 구역’ 활동 시 반드시 냉각복을 착용해야 합니다. 권고 사항이 아니라 법규입니다.”
“그냥… 보통 사람이 되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민준은 대답하며 마지막 약병을 안정기에 연결했다. 회귀 시술의 마지막 단계, 변형된 유전자를 비활성화하고 체온 조절 기능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중화제였다. 20년 전, 그의 아버지는 이 기술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폭염으로 도시 기능이 마비되고 식량 생산량이 급감하던 시절, 쥐 실험에서 시작된 서마-G는 기적이었다. 체온을 2도 낮추고 땀 배출 효율을 300% 증가시켜, 냉각복 없이 60도의 환경에서도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유전자 치료. 항만 노동자, 건설 인부, 도시 인프라 관리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들은 폭염 속에서 무너져가는 세상을 지탱하는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청구서는 15년 뒤부터 날아오기 시작했다. 변형된 유전자는 생존을 대가로 암세포의 비정상적 증식을 유발했다. ‘각인 종양’이라 불리는 새로운 암. 정부는 회귀 시술을 표준 의료보험에 포함시켰지만,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암의 위협을 감수하며 바깥 세상에서의 자유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다시 폭염에 취약한 옛날의 몸으로 돌아가 평생을 냉각 시설에 의지해 살아갈 것인가.
민준은 ‘회귀 기술사’였다. 사람들을 영웅의 몸에서 보통의 몸으로 되돌리는 일을 했다.
안정기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시술이 끝났다. 민준은 여자의 팔에서 바늘을 뽑고 소독솜으로 눌렀다. 여자의 각인은 이제 완전히 빛바랜 잿빛 자국으로만 남아 있었다.
“일주일간은 어지럼증이나 오한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몸이 다시 더위에 적응하는 과정입니다. 처방해 드린 체온 안정제를 복용하세요.”
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22도의 실내에서도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마치 수십 년 만에 처음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팔을 감쌌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민준의 팔에 있는 푸른 각인을 잠시 보더니, 시선을 피했다. 기술사는 시술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회귀하지 않았다. 많은 고객이 그런 눈으로 그를 보았다. 민준은 익숙했다.
여자가 나간 뒤, 민준은 시술 도구를 정리했다. 자동 세척기에 기구들을 넣고 살균 사이클을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이글거리는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대기는 열기로 일렁여 모든 것의 윤곽이 아지랑이처럼 흐릿했다. 도로 위를 오가는 방열 차량들의 금속 표면이 작열하는 태양빛을 어지럽게 반사했다. 사람들은 지하 통로나 냉각 터널로만 이동했다. 저 바깥은 서마-G 시술을 받은 이들의 세상이었다.
개인 단말기가 진동했다. 화면에는 공공의료정보원(PHIS)에서 보낸 공식 통지서가 떠 있었다.
[수신자: 민지호 (보호자 민준 귀하)]
[제목: 서마-G 각인 종양 고위험군 진입 및 회귀 시술 권고 통지]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는 감각이 들었다. 아들 지호. 올해로 17세. 서마-G 시술을 받은 청소년들이 의학적으로 각인 종양 발병률 급증기에 들어서는 나이였다.
민준은 통지서를 아래로 쓸어내렸다. 예상했던 문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향후 5년 내 종양 발현 확률 34.5%’, ‘조기 회귀 시술 시 발병률 1.2% 미만으로 감소’, ‘6개월 내 시술 결정 권고’. 아내도 똑같은 통지서를 받았다. 그녀는 회귀를 미루다 2년 만에 종양을 발견했고, 발견했을 땐 이미 늦었다.
민준은 소독이 끝난 기구들을 정리하며 창밖을 봤다. 아들은 지금 저 바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 방열 처리된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도시 외곽의 폐기된 건물들을 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냉각복의 거추장스러움 없이, 맨몸으로 바람을 느끼며. 지호에게 바깥 세상은 놀이터였고, 서마-G는 그 놀이터의 입장권이었다.
퇴근 시간. 민준은 진료실의 모든 전원을 끄고 복도로 나왔다. 병원 전체가 거대한 냉장고처럼 서늘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의 터널 승강장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려면 냉각 터널을 이용해 12개 블록을 이동해야 했다. 터널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대부분 민준처럼 각인이 없거나, 잿빛으로 변한 사람들이었다. ‘회귀자’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시원한 자리를 찾아 벽에 몸을 기댄 채, 창백하고 지친 얼굴로 단말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푸른 각인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터널의 냉기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그들은 마치 다른 종족처럼 보였다. 더 강하고, 더 자유롭고, 더 짧은 생명을 가진 종족.
민준은 터널 트램에 몸을 실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들에게 어떻게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아내는 말했다. 이 몸은 빌린 시간이라고. 우리는 더위를 피한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불을 몸 안에 들인 거라고. 언젠가 그 불이 우리를 태울 거라고. 민준은 아내의 말이 옳았다고 생각했지만, 지호는 다를 것이다. 17살에게 먼 미래의 암은 현실이 아니었다. 현실은 내일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없게 된다는 사실뿐이었다.
아파트 단지는 지상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거대한 차광 돔으로 덮여 있었다. 돔 내부의 온도는 35도. 여전히 덥지만 맨몸으로 짧은 거리를 걷는 것은 가능한, 회귀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 민준은 107동 입구에서 잠시 멈춰 돔 천장을 올려다봤다. 반투명한 패널 너머로 붉게 타는 하늘이 보였다. 저 너머에 진짜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은 그 세상에 속해 있었다.
현관문 디지털 잠금장치가 희미한 기계음을 내며 열렸다. 집 안의 공기는 병원 복도보다도 1층 더 차갑고 건조했다. 인공지능이 제어하는 최적의 온도, 21.5도. 민준은 잠시 문 앞에 서서 바깥의 열기와 안의 냉기가 부딪쳐 피부에 맺히는 미묘한 감각을 느꼈다. 아내와 함께 고른, 지금은 색이 바랜 복도 매트 위로 마른 먼지 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아들이 방금 들어온 흔적이었다.
“지호야.”
민준이 부르자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그림자가 꿈틀했다. 지호는 헤드셋을 낀 채 단말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반소매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은 건강한 구릿빛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민준의 것과 똑같은 푸른 각인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들은 헤드셋을 한쪽으로 밀어 올리고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 오셨어요?”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덥잖아요. 밖에서 더 할 것도 없고.”
지호는 그렇게 말하며 단말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면에서는 총성과 폭발음이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민준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아들 곁으로 다가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에너지바 포장지와 빈 음료수 캔이 뒹굴고 있었다. 지호의 몸에서는 바깥 세상의 냄새, 달궈진 아스팔트와 먼지와 오존이 뒤섞인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저녁은?”
“아직요. 배달시키려고요.”
“같이 먹자. 내가 할게.”
민준은 부엌으로 향하며 대화를 이어가려 애썼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통지서를 그냥 보여줘야 할까, 아니면 충분히 설명하며 설득해야 할까. 아내는 늘 이런 상황에서 민준보다 현명했다. 그녀는 아들의 눈높이에서 이야기하는 법을 알았다. 당신은 너무 딱딱해, 민준 씨. 가끔은 그냥 안아주는 게 백 마디 말보다 나아.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는 동안에도 등 뒤에 박히는 지호의 무관심이 느껴졌다. 아들은 가상현실의 전투에 몰두해 있었다. 저 아이에게 현실은 무엇일까. 이 서늘하고 안전한 집일까, 아니면 54도의 열기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달리는 저 바깥일까.
“지호야. 오늘… 통지서가 왔다.”
민준은 결국 가장 서툰 방식으로 말을 꺼내고 말았다. 칼질을 하던 손이 멈췄다. 거실에서 들려오던 게임 소리도 멎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민준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도 아들의 표정을 그릴 수 있었다.
“무슨 통지서요.”
목소리는 예상보다 차분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PHIS에서. 너도 받았을 텐데.”
“…아, 그거. 스팸인 줄 알고 지웠는데.”
지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부엌 입구에 기대서서 팔짱을 꼈다. 열일곱 소년의 몸은 이미 어른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민준은 아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지우면 안 되는 거였다. 중요한 내용이야.”
“뻔하죠. 이제 위험하니까 옛날 몸으로 돌아가라고. 평생 이 냉장고 같은 집구석에서 살라고. 맞죠?”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민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아들을 마주 보았다. 지호의 눈에는 반항심이 가득했다.
“위험한 건 사실이다. 네 엄마도…”
“엄마 얘기는 하지 마세요.”
지호가 말을 잘랐다. 그의 턱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엄마는 선택한 거예요. 끝까지 밖에서 살기로. 그게 엄마의 자유였어요. 아빠는 맨날 그걸 후회라고 말하지만.”
“그건 자유가 아니야! 죽음으로 끝나는 선택은 선택이 아니다.”
민준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그러자 지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아빠는요?”
아들의 시선이 민준의 팔뚝에 있는 푸른 각인으로 향했다. 오늘 진료실의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회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마저도 그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빠는 왜 회귀 안 해요? 아빠는 안 위험해요? 맨날 다른 사람들 몸은 옛날로 되돌려주면서, 정작 아빠는 왜 그대로냐고요. 아빠도 바깥이 좋잖아요. 가끔 주말에 외곽 순찰 나갈 때 보면 신나 보이던데.”
“그건… 일이잖니. 나는 기술사로서…”
“일 핑계 대지 마세요. 그냥 아빠도 포기 못 하는 거잖아요. 냉각복 없이 바람 맞으면서 걷는 거. 가끔이라도 저 붉은 하늘 직접 보는 거. 저라고 다를 것 같아요? 전 매일 그렇게 살아요! 그게 제 세상의 전부라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걸 다 뺏고 지하 터널의 유령들처럼 살라고요?”
지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는 거실 테이블 위의 빈 캔을 홧김에 걷어찼다. 캔이 날아가 벽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민준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의 말이 전부 아픈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이 푸른 각인이 주는 짧은 자유의 순간들을 사랑했다. 아내가 죽은 뒤, 그는 가끔씩 일부러 적색 구역의 순찰 업무를 자원했다. 이글거리는 세상의 한복판에 혼자 서 있으면, 마치 그녀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그 세상에.
“다음 달에 ‘솔라 레이스’가 있어요. 폐쇄된 고속도로에서 하는 건데, 우승하면 대학 추천권도 나와요. 저 그거 나가기로 애들이랑 약속했어요. 회귀하면 다 끝이에요. 그냥 끝이라고요.”
지호는 절박하게 말했다. 17살에게 대학 추천권과 친구들과의 약속은, 34.5%라는 막연한 확률보다 훨씬 더 무겁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런 경주 때문에 목숨을 걸겠다는 거냐?”
“아빠는 엄마 때문에 목숨 걸고 있잖아요!”
아들의 외침이 얼음장 같은 집 안 공기를 갈랐다. 민준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왜 회귀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의 절반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내에 대한 속죄, 혹은 그녀가 남긴 세상에 대한 미련. 민준은 입을 열어 변명하려 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거칠게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잠시 후, 방 안에서 헤드셋을 뚫고 나올 만큼 큰 음악 소리가 벽을 타고 희미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민준은 차가운 조리대 위에 힘없이 양손을 짚었다. 도마 위에는 반쯤 썰다 만 채소가 널려 있었다. 창밖, 돔 너머의 하늘은 이제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여름의 청구서는 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 무게는 결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호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공격적인 비트의 음악이 집 안의 인공적인 고요함을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그는 차갑게 식은 조리대를 손으로 쓸었다. 아들의 외침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확한 진단이었고, 민준이 스스로에게조차 인정하기를 회피해 온 진실이었다. 아내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선택을 증명했고, 아들은 그 죽음을 자유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둘 사이에 끼어, 회귀 기술사라는 안전한 직업 뒤에 숨어 아내의 유령을 좇고 있었다.
그는 결국 저녁 준비를 포기했다. 썰다 만 채소를 음식물 처리기에 갈아버리고, 도마와 칼을 세척기에 넣었다. 기계가 돌아가는 건조한 소음 속에서 그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 위, 지호가 걷어찬 음료수 캔이 찌그러진 채 뒹굴고 있었다. 민준은 개인 단말기를 열어 ‘솔라 레이스’를 검색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불법 사이트들이 화면을 채웠다. 가장 상단의 링크를 누르자,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폐고속도로의 영상이 나타났다. 방열 코팅된 보드를 탄 아이들이 곡예에 가까운 속도로 아스팔트 위를 질주했다. 카메라가 흔들리고 바람 소리가 거칠게 섞여 들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웃고, 소리치고 있었다. 살아있었다. 민준은 영상 속에서 아들의 얼굴을 찾으려 애썼다. 그 아이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은 지하 터널의 창백한 얼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호가 지키려는 세상이었다. 아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세상.
며칠이 흘렀다. 집 안의 공기는 대화가 끊긴 만큼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민준과 지호는 서로를 보이지 않는 벽처럼 대하며 최소한의 동선으로만 움직였다. 식사는 각자의 방에서 해결했고, 민준이 출근할 때 지호는 자고 있었고, 민준이 퇴근할 때 지호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지호의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인공적인 냉기가 민준의 발목을 감았다.
민준은 진료실에서 기계적으로 환자들을 상대했다. 잿빛으로 변해가는 각인들을 무감각하게 들여다보며 그는 아들의 팔에 선명하던 푸른 불꽃을 떠올렸다. 그 불꽃을 제 손으로 꺼야 한다는 사실이 납덩이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아들의 말이, ‘아빠는 엄마 때문에 목숨 걸고 있잖아요!’라는 외침이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정말 그런가. 죽은 아내의 그림자를 좇아 이 위험한 자유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아들에게 어떤 자격으로 회귀를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밤, 민준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내의 유품이 담긴 상자를 열었다. 먼지 쌓인 데이터칩, 빛바랜 사진 몇 장, 그리고 그녀가 쓰던 방열 고글이 있었다. 그녀는 도시 외곽의 식물 복원 연구사였다. 폭염 속에서 멸종된 식물들의 유전자를 되살려내는, 서마-G 시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고, 자신의 몸을 뜨거운 대지에 내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푸른 각인은 저주가 아니라 날개였다. 민준은 고글을 들어 눈에 대보았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거실 풍경이 살짝 왜곡되어 보였다. 마치 다른 세상처럼. 그는 아내가 이 고글을 통해 보았을 세상을 상상했다. 타는 듯한 태양, 아지랑이 피는 대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작은 생명들.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렌즈에 남은 미세한 흠집 너머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다음 날, 민준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지호는 여전히 방에 있었다. 민준은 아들의 방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두드렸다.
“지호야. 나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민준은 다시 한번 노크했다.
“얘기 좀 하자.”
한참 만에 문이 열렸다. 지호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민준은 말없이 아내의 고글을 내밀었다.
“이거….”
지호는 고글을 받아들었다. 구식 모델이었지만, 전문적인 장비임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렌즈에는 오래된 열기의 흔적이 미세한 흠집으로 남아 있었다.
“엄마 거다.”
민준이 말했다.
“네가 나갈 거라는 그 레이스, 위험하겠지. 당연히 아빠는 반대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
지호의 얼굴에 실망과 분노가 다시 어렸다. 그는 막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민준이 말을 이었다. 그는 닫히려는 문을 잡지 않았다. 대신, 아들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네가 왜 그걸 포기할 수 없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네 엄마도 그랬으니까. 그러니… 혼자 가게 두진 않겠다.”
지호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무슨 뜻이에요?”
“레이스에 나가라. 대신 조건이 있다. 내가 네 팀의 의료 지원 담당자로 같이 간다. 네 생체 신호는 내가 실시간으로 체크할 거고, 조금이라도 위험 수치가 보이면 그 자리에서 경기는 끝이다. 그리고 레이스가 끝나면, 그때는 다시 이야기하는 거다. 이 청구서를 우리가 어떻게 지불할지.”
민준의 목소리는 기술사로서 말할 때처럼 건조했지만, 그 안에는 이전에는 없던 미세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아들의 선택을 막을 수 없다면, 그 위험의 한가운데로 함께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호는 한참 동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들은 대답 대신, 방문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아들은 고개를 돌려 손에 든 고글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듯했다. 마침내 지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 주말, 민준은 지호와 함께 돔 밖으로 나갔다. 공식적인 업무가 아닌, 사적인 외출은 아내가 죽은 후 처음이었다. 냉각복을 입지 않은 맨몸에 50도가 넘는 공기가 확 끼쳐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 피부의 모든 땀샘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는 것 같았다. 지호는 벌써 저만치 앞서가며 폐쇄된 고속도로로 향하는 길을 살피고 있었다. 민준은 아들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너무 앞서가지 마라! 같이 가!”
지호가 뒤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어색했지만 비난의 기색은 없는 표정이었다. 민준은 아들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신발 밑창을 뚫고 발바닥을 데웠다. 아스팔트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어디선가, 이글거리는 열기 속에서만 우는 여름 매미의 첫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