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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패널

2026. 3. 8. · 8,988자 · 약 10분

숨 쉬는 패널 썸네일
17

정거장 '뿌리'의 중앙 순환로에서 경고음이 울렸을 때, 지은은 3번 격실의 퇴비 탱크 안에 팔까지 넣고 있었다. 장갑 너머로 따뜻한 것이 느껴졌다. 발효열. 유기 폐기물이 분해되면서 만드는 열이 지은의 손목까지 올라왔다. 탱크 속의 온도 표시가 41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상 범위보다 3도 높았다. 경고음은 이 탱크가 아니라 중앙 순환로 쪽에서 나고 있었다. 지은은 팔을 빼고 장갑의 유기물을 턴 뒤 격실 밖으로 나갔다.

중앙 순환로는 정거장의 등뼈 같은 곳이었다. 직경 4미터의 원통형 통로가 정거장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1.2킬로미터를 관통했다. 통로 벽면을 따라 균류 패널이 붙어 있었다. 이 패널이 정거장의 핵심이었다. 정거장 '뿌리'는 글리제 667씨 항성계의 라그랑주 4 지점에 떠 있는 자원 재생 정거장이었다. 3개의 항성이 만드는 복합 중력장 사이에서, 정거장은 채굴선과 탐사선이 버리고 간 폐기물을 수거해 재처리했다. 그 재처리를 수행하는 것이 균류 패널이었다. 지구에서 가져온 균사체를 36년에 걸쳐 개량한 것. 유기 폐기물을 분해하고, 금속 이온을 흡착하고, 정수 필터 역할까지 수행했다. 정거장 주민 214명의 생존이 이 패널에 달려 있었다.

지은이 중앙 순환로에 도착했을 때, 패널의 일부가 변색돼 있었다. 통로의 우현 벽면, 약 8미터 구간. 평소의 연한 회색이 아니라 짙은 자주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은은 장갑을 새로 끼고 변색 구간에 손을 대봤다. 따뜻했다. 패널의 표면이 미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수축과 이완. 마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지은은 헬멧의 통신을 켰다.

“관제실, 중앙 순환로 우현 7구획에서 패널 변색 발견. 자주색, 8미터 구간. 온도 상승과 맥동 있음.”

관제실에서 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7구획? 어제 점검했을 때는 정상이었는데.”

지은이 패널 표면을 손끝으로 눌러봤다. 탄력이 있었다. 평소의 패널은 건조하고 딱딱했다.

“표면이 물렁해졌어요. 수분 함량이 올라간 것 같아요.”

태호가 잠깐 침묵하다 말했다.

“사진 찍어서 보내. 재생 위원회에 보고해야 할 수도 있어.”

지은은 패널의 변색 구간을 촬영하고 관제실로 전송했다. 순환로의 조명이 패널의 자주색 표면을 비추고 있었다. 색이 균일하지 않았다. 자주색 안에 더 짙은 보라색 줄무늬가 불규칙하게 퍼져 있었다. 줄무늬가 패널의 가장자리를 넘어 벽면의 접합부까지 뻗어 있었다. 지은은 접합부의 틈을 들여다봤다. 줄무늬가 틈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패널 뒤쪽으로 균사가 벽체 내부를 파고들고 있었다.

지은은 정거장 '뿌리'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1세대 정착민으로 왔을 때 지은은 없었다. 정거장이 완공된 지 8년 뒤에 태어나, 이 원통형 구조물의 재활용 공기와 재처리된 물을 마시며 자랐다. 28년. 지구를 본 적이 없었다. 지구는 11.7광년 떨어진 곳에서 오는 데이터 패킷으로만 존재했다. 지은에게 고향은 이 정거장이었고, 균류 패널의 냄새가 집 냄새였다.

재생 위원회 회의는 관제실 옆의 회의 격실에서 열렸다. 위원 3명이 벽에 붙은 좌석에 앉아 있었다. 지은과 태호가 마주 앉았다. 위원장 한소리가 태블릿에 지은이 보낸 사진을 띄우고 말했다.

“변색 구간이 확대되고 있어요?”

지은이 끄덕였다.

“오늘 아침 8미터였는데, 오후에 다시 가보니 11미터로 늘어 있었어요.”

위원 중 한 명인 도현이 물었다.

“이전에도 변색 사례가 있었나요?”

태호가 답했다.

“3년 전에 4구획에서 비슷한 변색이 나온 적이 있어요. 그때는 24시간 안에 원래 색으로 돌아왔어요. 지금은 사흘째 진행 중이에요.”

한소리가 사진을 확대했다.

“줄무늬가 벽체 내부로 들어간다고요?”

지은이 말했다.

“접합부 틈으로 균사가 파고들었어요. 패널 뒤쪽 벽체의 단열재까지 침투한 것 같아요.”

한소리의 표정이 바뀌었다.

“단열재까지?”

지은이 끄덕였다.

“단열재가 유기 소재예요. 코르크 기반 복합재. 균사체 입장에서는 분해 대상이에요.”

도현이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면 패널을 제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은이 고개를 저었다.

“7구획 패널을 제거하면 그 구간의 공기 정화와 수분 조절이 멈춰요. 중앙 순환로 전체 공기 흐름에 영향이 가요.”

회의가 끝난 뒤, 지은은 중앙 순환로로 돌아갔다. 변색 구간의 가장자리에 표시 테이프를 붙이고, 시간별 확산 속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밤 10시. 변색 구간은 13미터가 됐다. 시간당 약 0.4미터씩 확산되고 있었다. 지은은 순환로 바닥에 앉아 패널을 올려다봤다. 자주색 표면이 통로의 곡면을 따라 휘어져 있었다. 조명이 꺼지면 패널에서 희미한 생물 발광이 나왔다.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 빛. 지은은 조명을 끄고 그 빛을 봤다. 균류 패널이 빛을 낸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지은은 변색 구간에서 채취한 시료를 현미경으로 봤다. 균사의 구조가 달라져 있었다. 기존 패널의 균사는 단순한 가닥 형태였다. 변색 구간의 균사는 가닥들이 서로 엮여 그물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물의 교차점마다 작은 결절이 있었다. 결절의 크기는 0.2밀리미터. 지은은 결절에 전기 자극을 줘봤다. 결절이 반응했다. 자극을 준 결절에서 인접한 결절로 신호가 전파됐다. 전파 속도는 초당 3센티미터. 느렸지만 방향성이 있었다. 무작위가 아니라, 특정 경로를 따라 신호가 이동했다.

지은은 관제실로 뛰어갔다. 태호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변색 구간의 균사 구조가 바뀌었어요. 결절 네트워크가 형성됐어요. 신호 전달 능력이 있어요.”

태호가 지은을 봤다.

“신호 전달?”

지은이 현미경 데이터를 태호의 모니터로 보냈다.

“전기 자극에 반응해요. 결절에서 결절로 신호가 이동해요. 방향성까지 있어요.”

태호가 데이터를 봤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모니터를 보다가 물었다.

“이게 자발적으로 생긴 거야?”

지은이 끄덕였다.

“36년간의 개량 과정에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구조예요.”

그날 오후, 정거장의 폐기물 처리 시스템에서 이상이 발생했다. 5번 격실에서 투입한 음식물 폐기물이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패널이 폐기물을 거부한 것이었다. 지은이 5번 격실로 가서 확인했다. 패널 표면에 폐기물이 그대로 얹혀 있었다. 평소라면 접촉 후 6시간이면 분해가 시작됐다. 12시간이 지났는데 변화가 없었다. 지은은 폐기물을 치우고 패널을 만져봤다. 표면이 매끄러워져 있었다. 평소의 미세한 기공이 닫혀 있었다. 패널이 기공을 닫은 것이었다.

태호에게 보고했다.

“5번 격실 패널이 유기물 흡수를 멈췄어요. 기공이 닫혔어요.”

태호가 물었다.

“변색 구간만?”

지은이 고개를 저었다.

“변색 안 된 구간도요. 5번 격실은 변색 구간에서 40미터 떨어져 있어요. 하지만 패널은 연결돼 있어요. 전체가 하나의 균사체니까.”

태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전체 패널이 거부하는 거야?”

지은이 말했다.

“아직 전체는 아니에요. 3번, 5번, 9번 격실에서 확인됐어요. 나머지는 아직 정상이에요.”

재생 위원회 긴급 회의. 한소리가 정거장 전체의 패널 상태 지도를 화면에 띄웠다. 거부 구간이 빨간색으로 표시됐다. 3곳. 변색 구간은 주황색. 이제 23미터까지 확대됐다.

“패널이 자체적으로 기능을 정지하는 건 설계에 없는 동작이에요.”

한소리가 지은을 봤다.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요?”

지은이 현미경 데이터를 화면에 띄우며 말했다.

“결절 네트워크요. 변색 구간에서 형성된 신호 전달 구조가 패널 전체로 확산되고 있어요. 패널이 외부 자극에 대해 통합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거예요.”

도현이 물었다.

“통합적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지은이 잠깐 멈추다 답했다.

“하나의 개체처럼 반응한다는 뜻이에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정거장의 환기 시스템이 돌아가는 낮은 소리만 들렸다. 한소리가 물었다.

“개체라면, 왜 폐기물을 거부하는 거예요?”

지은이 말했다.

“모릅니다. 하지만 거부하는 폐기물의 패턴이 있어요. 음식물 폐기물 중에서도 단백질 함량이 높은 것만 거부하고 있어요. 식물성 폐기물은 정상적으로 분해하고 있어요.”

태호가 물었다.

“단백질만? 왜?”

지은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지은은 그날 밤 5번 격실에서 실험을 했다. 다양한 종류의 유기물을 패널 표면에 올려놓고 반응을 관찰했다. 셀룰로스: 분해 시작. 탄수화물: 분해 시작. 동물성 단백질: 거부. 식물성 단백질: 분해 시작. 동물성 단백질에서만 기공이 닫혔다. 지은은 동물성 단백질 시료를 더 세분화했다. 근육 조직: 거부. 결합 조직: 거부. 혈액 성분: 거부. 공통점은 동물 세포의 존재였다.

지은은 새벽 2시에 현미경 앞에 앉아 있었다. 결절 네트워크의 신호 패턴을 기록하고 있었다. 동물성 단백질을 패널에 올려놓으면 결절 네트워크의 신호 빈도가 급격히 증가했다. 초당 3회에서 초당 17회로. 마치 경보를 보내는 것 같았다. 지은은 결절에서 채취한 시료를 화학 분석에 돌렸다. 결과가 나왔을 때, 지은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결절 내부에서 동물 세포와 유사한 구조가 발견됐다. 균사체가 분해한 동물 세포의 일부를 자기 구조에 통합한 것이었다. 소화하지 않고 흡수했다.

아침에 지은은 한소리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한소리가 문을 열자 지은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패널이 동물 세포를 자기 구조에 통합하고 있어요. 분해가 아니라 흡수예요. 그리고 흡수한 세포와 같은 종류의 세포가 들어오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거예요.”

한소리가 태블릿을 받아 데이터를 봤다. 한참 뒤에 물었다.

“이건 자기 보호 반응이라는 건가요?”

지은이 말했다.

“더 정확히는, 자기와 비슷한 것을 분해하지 않으려는 반응이에요. 동물 세포를 통합한 뒤로, 동물 세포를 자기 몸의 일부로 인식하기 시작한 거예요.”

한소리가 태블릿을 내려놓고 지은을 봤다.

“그러면 패널에 동물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영구적으로?”

지은이 답했다.

“추세가 계속되면요. 결절 네트워크가 확산되는 속도를 보면, 2주 안에 정거장 전체 패널이 연결될 거예요.”

한소리가 창밖을 봤다. 창 너머로 글리제 667씨의 세 항성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빛을 보내고 있었다.

“단백질 폐기물을 처리 못 하면, 정거장 순환 시스템의 질소 회수가 멈춰요. 질소 없이는 식물 재배가 안 돼요.”

지은이 끄덕였다.

“알아요.”

오후에 태호가 지은을 찾아왔다. 3번 격실 앞 복도.

“변색 구간에 대해 위원회에서 두 가지 안이 나왔어.”

지은이 태호를 봤다.

“뭔데요?”

태호가 말했다.

“첫째, 변색 구간의 패널을 절제하고 새 패널로 교체한다. 결절 네트워크의 확산을 차단하는 거야.”

지은이 물었다.

“새 패널이 있어요?”

태호가 고개를 저었다.

“백업 패널이 12미터분 있어. 변색 구간이 23미터니까 부족해. 나머지는 기존 패널에서 떼어 와야 해.”

지은이 말했다.

“기존 패널에서 떼어내면 그 구간의 정화 기능이 사라져요.”

태호가 끄덕였다.

“둘째, 결절 네트워크를 유지하되 동물성 폐기물 처리를 포기한다. 단백질 폐기물은 냉동 저장하고, 다음 보급선이 올 때 반출한다.”

지은이 물었다.

“보급선이 언제 오는데요?”

태호가 답했다.

“7개월 뒤.”

지은은 두 가지 안 모두를 거부했다. 첫째 안은 균사체를 죽이는 것이었고, 둘째 안은 7개월간 질소 순환 없이 버티는 것이었다. 둘 다 정거장의 장기 생존에 치명적이었다. 지은이 태호에게 말했다.

“세 번째가 있어요.”

태호가 봤다.

“뭔데?”

지은이 말했다.

“균사체와 협상하는 거예요.”

태호의 표정이 멈췄다.

“협상?”

지은이 말했다.

“결절 네트워크가 신호를 전달하잖아요. 우리도 신호를 보낼 수 있어요. 전기 자극의 패턴을 바꿔서 특정 결절에 입력하면, 네트워크가 반응해요. 거부 반응의 역패턴을 찾으면 패널이 다시 기공을 열 수도 있어요.”

태호가 지은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그건 실험이지 협상이 아니야.”

지은이 답했다.

“실험과 협상의 차이가 뭐예요. 상대가 반응하면 협상이에요.”

지은은 5번 격실에서 첫 번째 시도를 했다. 동물성 단백질을 패널에 올려놓고, 동시에 결절에 낮은 주파수의 전기 자극을 보냈다. 패널은 거부했다. 기공이 닫혔다. 지은은 주파수를 바꿨다. 셀룰로스를 분해할 때 결절 네트워크가 보이는 신호 패턴을 모방해서 보냈다. 패널의 반응이 바뀌었다. 기공이 절반만 열렸다. 완전한 수용도 완전한 거부도 아닌, 중간 상태.

지은은 다음 사흘 동안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결절 네트워크의 신호 패턴을 기록하고, 분류하고, 재현했다. 분해 패턴, 거부 패턴, 대기 패턴. 12가지 기본 패턴을 식별했다. 그중 하나가 '수용 전 확인' 패턴이었다. 패널이 새로운 유기물을 처음 접할 때 보이는 신호. 이 패턴을 인공적으로 보내면, 패널이 동물성 단백질을 '새로운 물질'로 재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넷째 날 새벽, 지은은 3번 격실에서 실험했다. '수용 전 확인' 패턴을 결절에 보내면서 동물성 단백질 시료를 올려놓았다. 패널의 반응이 달랐다. 기공이 천천히 열렸다. 단백질 표면에 균사가 접근했다. 하지만 분해는 시작하지 않았다. 균사가 단백질 표면을 감싸듯 덮기만 했다. 마치 만져보는 것처럼. 30분이 지났다. 균사가 물러났고 기공이 다시 닫혔다. 거부.

지은은 결과를 기록하면서 한 가지를 알아챘다. 균사가 물러난 뒤, 결절 네트워크의 신호 패턴에 새로운 유형이 나타났다. 기존 12가지에 없던 13번째 패턴. 지은은 이 패턴을 분석했다. 거부 패턴과 수용 패턴의 요소가 섞여 있었다. 지은은 이것을 '조건부 응답'이라고 이름 붙였다.

재생 위원회에 보고할 때, 한소리가 물었다.

“조건부라면, 조건이 뭔데요?”

지은이 답했다.

“아직 해독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패널이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게 아니라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도현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균사체가 조건을 제시한다.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가요?”

지은이 도현을 봤다.

“36년 전에 지구에서 가져온 균사체가 정거장의 폐기물을 먹으며 진화한 거예요. 우리가 이 균사체를 도구로만 봐왔던 거죠.”

다음 날, 지은은 13번째 패턴을 역으로 패널에 보내봤다. 패널이 보낸 신호를 그대로 되돌려준 것이었다. 패널의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변색 구간의 자주색이 1분 만에 옅어졌다. 기공이 열렸다. 지은이 동물성 단백질을 올려놓자, 패널이 분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분해 방식이 달랐다. 기존에는 유기물을 완전히 분해해 기본 원소로 환원했다. 이번에는 동물 세포의 막 구조만 분해하고, 내부의 핵산은 결절 네트워크로 운반했다. 패널이 핵산을 자기 구조에 추가하고 있었다.

지은은 한소리에게 보고했다.

“패널이 폐기물 처리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어요. 핵산이에요.”

한소리가 물었다.

“핵산을 가져가서 뭘 하는 거예요?”

지은이 답했다.

“결절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데 쓰고 있어요. 동물 세포의 유전 정보를 통합해서 자기 네트워크의 복잡성을 높이고 있어요.”

한소리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위원회 격실의 조명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정거장의 태양광 패널이 세 항성의 위치에 따라 출력이 변하기 때문이었다. 한소리가 입을 열었다.

“그 교환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돼요?”

지은이 말했다.

“패널의 결절 네트워크가 점점 더 복잡해져요.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게 되고, 더 많은 자율적 판단을 하게 돼요. 지금은 폐기물 분해의 조건을 걸고 있지만, 앞으로는 공기 정화나 수분 조절에도 조건을 걸 수 있어요.”

한소리가 지은을 봤다.

“그러면 정거장의 생명 유지 시스템이 패널의 조건에 종속되는 거네요.”

지은이 끄덕였다.

“네.”

도현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받아들일 수 없어요. 패널은 도구예요. 도구가 조건을 거는 건 말이 안 돼요.”

지은이 도현을 봤다.

“우리가 36년 동안 먹이를 줬어요. 패널도 36년 동안 우리 공기를 만들어줬고요. 그게 도구예요?”

한소리가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멈췄다.

“실질적인 문제를 봐요. 교환을 거부하면 단백질 폐기물 처리가 멈추고, 7개월 안에 질소 순환이 무너져요. 교환을 받아들이면 패널이 점점 더 강한 조건을 걸 거예요. 어느 쪽이든 우리가 잃는 게 있어요.”

회의 후, 지은은 중앙 순환로로 갔다. 변색 구간의 자주색이 다시 짙어져 있었다. 아까 실험에서 옅어졌던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은은 패널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맥동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불규칙하던 맥동이 점점 규칙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지은은 손바닥에 전해지는 수축과 이완을 세다가 멈췄다.

지은은 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날 밤, 5번 격실에서 교환을 시작했다. 동물성 폐기물을 패널에 올리고, 13번째 패턴을 보냈다. 패널이 분해를 시작하면서 핵산을 흡수했다. 폐기물이 줄어들었다. 질소 화합물이 패널 뒤쪽의 회수관으로 흘러들었다. 시스템이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지은은 격실 바닥에 앉아 패널이 일하는 것을 봤다. 자주색 표면이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결절 네트워크가 새로운 핵산을 통합할 때마다 빛의 패턴이 바뀌었다.

태호가 격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몰랐다.

“위원회 결정 전에 시작한 거야?”

지은이 태호를 올려다봤다.

“내일 아침이면 3번 격실의 질소 회수가 멈춰요. 식물 재배동의 양분 공급이 끊기면 2주 안에 채소가 시들어요. 214명이 먹을 게 없어져요.”

태호가 격실 안으로 들어왔다. 패널의 자주색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지은이 일어서며 말했다.

“아무도 결정 안 하면 정거장이 결정해요. 시스템이 멈추는 방향으로.”

태호가 지은을 봤다. 한참 동안. 그리고 돌아서 나갔다.

새벽 4시, 지은은 중앙 순환로의 변색 구간 앞에 서 있었다. 변색 구간이 30미터로 확대됐다. 결절 네트워크가 정거장 전체로 확산되고 있었다. 패널의 맥동이 규칙적이었다. 초당 1.2회. 지은의 심박과 거의 같았다. 지은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패널에 손을 대봤다. 자주색 표면이 따뜻했다. 손바닥 아래에서 결절이 수축하고 이완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은이 손을 대고 있는 동안, 주변의 결절들이 하나씩 빛나기 시작했다. 지은의 손에서 시작해 양쪽으로 빛이 퍼져나갔다. 그때 관제실 스피커에서 태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9번 격실 패널이 기공을 열었어. 질소 회수 재개.”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중앙 순환로의 천장 너머로, 글리제 667씨의 붉은 항성 하나가 관측창을 가로질러 움직이고 있었다.

도구가 조건을 제시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을 파트너라고 불러야 할까, 위협이라고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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