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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점수가 될 때

2026. 3. 8. · 9,057자 · 약 11분

기억이 점수가 될 때 썸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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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선 '은하'의 3구역 복도에서 경보음이 울렸을 때, 진우는 보정실 의자에 앉아 다른 사람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니터에 펼쳐진 것은 71세 여자의 생체 기억 인덱스. 좌반구 해마 영역의 회상 패턴이 문서 기록과 0.3퍼센트 이탈해 있었다. 0.3이면 허용 범위 안이었다. 진우는 '적합' 버튼을 누르고 다음 파일을 열었다. 경보음은 3구역의 환기 밸브 오작동이었다. 5분 뒤 멈췄다. 진우는 경보음이 멈춘 뒤에야 자기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보정실은 세대선 중심축에서 4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원심력이 만드는 인공 중력이 0.7배. 커피를 따르면 액체가 미세하게 안쪽으로 기울었다. 진우는 매일 아침 이 기울어진 커피를 마시며 탑승객들의 정체성 연속 점수를 검증했다. 정체성 연속 점수. 생체 기억과 문서 기록의 일치도, 사회적 관계망의 지속성, 심리 프로파일의 연속성을 종합한 수치. 이 점수가 70.0 이상이면 2차 장수 치료 대상. 55.0 이상이면 1차 기본 치료. 55.0 미만이면 자격 없음. 2차 치료를 받으면 생물학적 수명이 40년 연장됐다. 1차 치료는 15년. 55.0 미만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진우가 보정사로 일한 것은 9년이었다. 세대선 은하가 지구를 떠난 지 23년째. 출발 당시 1만 2천 명이 탑승했고, 도착 예상 시점까지 남은 항해 기간은 47년이었다. 목적지는 글리제 667씨 항성계. 70년짜리 항해. 탑승객의 절반 이상이 항해 중에 노년기에 진입할 예정이었고, 장수 치료 없이는 목적지에 살아서 도착할 수 없는 사람이 3천 명을 넘었다. 장수 치료의 배분은 정체성 연속 점수로 결정됐다. 점수가 높은 사람, 즉 자기 자신과의 일관성이 높은 사람이 먼저 치료를 받았다.

오후 2시. 진우의 모니터에 내부 통신이 떴다. 발신: 관리 1과. 내용은 짧았다. '보정사 한진우. 금일 18시까지 관리 1과 면담실로 출석 요망. 사유: 정체성 연속 점수 재산정 통보. ' 진우는 화면을 두 번 읽었다. 재산정. 보정사는 다른 사람의 점수를 검증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점수가 재산정된다는 통보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진우는 현재 자기 점수를 알고 있었다. 74.2. 2차 장수 치료 대상. 3년 전 정기 심사에서 확인한 수치. 그때 심사관이

“안정적입니다”

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진우는 남은 파일 3건을 처리하고 보정실을 나섰다. 복도는 세대선의 회전 방향을 따라 완만하게 휘어져 있었다. 걸으면 먼 곳의 천장이 바닥처럼 보이다가, 가까이 가면 다시 벽이 됐다. 이 휘어진 공간에서 23년을 살았다. 진우는 5구역의 면담실로 향하며 생각했다. 재산정의 사유가 뭘까. 기억 이탈? 관계망 변동? 진우의 기억은 안정적이었다. 아내 수현과 아들 한별이 4구역에 살고 있었다. 아들은 세대선에서 태어났다. 올해 7살. 관계망도 변동이 없었다.

면담실의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관리 1과의 윤 과장과, 진우가 모르는 여자. 여자는 지구 통신 수신부 소속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서연. 윤 과장이 자리를 가리켰다. 진우가 앉자 윤 과장이 책상 위의 종이컵을 옆으로 밀고 모니터를 돌렸다. 화면에 문서가 떠 있었다. 상단에 붉은 글씨: '지구 측 기록 정정 통보. 수신일: 세대선력 23년 142일. 원 발신일: 지구력 2051년 3월 8일. ' 지구에서 이 신호가 출발한 것은 12.4광년 전이었다. 12.4년 동안 빛의 속도로 날아와 오늘 도착한 것이었다.

윤 과장이 말했다.

“지구에서 기록 정정이 왔습니다.”

진우가 화면을 봤다. '대상: 한진우. 출생 기록 정정. 정정 내용: 출생 시 등록된 생부 정보 변경. 기존: 한태호. 정정: 박상민. 정정 사유: 2051년 유전자 감식 기반 친자 확인 결과에 따른 행정 정정. ' 진우의 시선이 멈췄다. 한태호.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진우가 기억하는 아버지. 키가 크고, 웃을 때 눈이 가늘어지던 사람. 세대선 출발 전 공항에서 진우의 어깨를 잡고

“건강해라”

라고 말한 사람. 그 사람이 생부가 아니라는 통보가 12.4년을 날아온 것이었다.

진우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서연이 설명을 이어갔다.

“지구에서 2050년부터 시행된 유전자 기반 친자 확인 사업의 일환입니다. 기존의 호적 기록과 유전자 정보가 불일치하는 경우 행정 정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진우 씨의 경우, 지구에 보관된 출생 시 혈액 샘플과 기존 등록 생부의 유전자가 불일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진우가 서연을 봤다.

“저는 12년 전에 이 배에 탔습니다. 지구에서 무슨 사업을 하든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서연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윤 과장이 대답했다.

“정체성 연속 점수의 산정 기준에 출생 기록이 포함됩니다. 생부 정보가 변경되면 가족 관계 지속성 항목이 재계산돼요.”

진우의 손이 의자 팔걸이를 잡았다.

“지구에서 기록을 고쳤다고 해서 제 점수가 바뀌는 겁니까.”

윤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대선 규정상 지구 측 행정 정정은 수신 즉시 반영됩니다. 출생 기록 변경으로 가족 관계 지속성 항목에서 생부 관계가 소멸 처리되고, 새 생부와의 관계가 등록되는데, 박상민이라는 사람의 현재 상태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12.4광년 밖이니까요. 확인 불가 관계는 0점 처리됩니다.”

서연이 모니터의 다른 탭을 열었다. 숫자가 떴다. '가족 관계 지속성: 기존 78.6 → 정정 후 54.1. 전체 점수: 기존 74.2 → 정정 후 64.8. ' 진우는 숫자를 봤다. 64.8. 2차 장수 치료 기준선 70.0에서 5.2점 아래.

진우의 귓속에서 맥박 소리가 커졌다. 의자의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우가 물었다.

“이의 제기는요.”

윤 과장이 답했다.

“지구 측 행정 정정에 대한 이의는 지구에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왕복 24.8년입니다.”

24.8년. 진우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굴렸다. 지금 이의를 제기하면 답을 받는 것은 47년 뒤. 세대선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점이었다. 도착할 때까지 답을 받을 수 없었다.

면담실을 나왔을 때 복도의 조명이 야간 모드로 전환되고 있었다. 세대선의 하루는 24시간 주기로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다. 지금은 저녁 7시에 해당하는 밝기. 진우는 4구역의 거주 블록으로 걸었다. 복도 양쪽의 거주실 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283호. 진우의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현이 식탁에서 한별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 한별이 진우를 보고 웃었다.

“아빠!”

진우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한별의 머리를 쓸었다. 수현이 진우의 얼굴을 봤다.

“무슨 일 있어?”

진우는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나중에 얘기할게.”

한별이 숟가락으로 밥을 뜨며 말했다.

“아빠, 오늘 3구역에서 경보 울렸지? 나 들었어.”

진우가 끄덕였다.

“환기 밸브 오작동이야. 금방 고쳤어.”

한별이 잠든 뒤, 진우는 거실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수현에게 말했다. 수현은 진우의 말을 끝까지 듣고 한참 조용히 있었다. 창문 너머로 세대선의 중심축이 보였다. 축을 따라 설치된 작업 조명이 밤에도 꺼지지 않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수현이 말했다.

“한태호 아버님이 네 생부가 아니라는 거야?”

진우가 끄덕였다. 수현이 천천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게 12년 전에 지구에서 일어난 일이고, 지금 여기서 네 점수를 바꾸는 거야.”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심축의 조명을 봤다.

수현이 물었다.

“박상민이라는 사람은 누구야?”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들어본 적 없어.”

수현이 진우의 손을 잡았다. 진우의 손이 차가웠다. 수현의 손이 따뜻했다. 그 온도 차이가 진우의 손등을 타고 팔까지 올라왔다. 진우가 말했다.

“어머니한테 물어볼 수도 없어. 어머니도 12.4광년 밖에 있으니까.”

수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이 없는 거야?”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중심축의 조명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진우는 보정실에 출근하지 않았다. 대신 세대선의 의료 기록 보관소를 찾아갔다. 6구역 하층, 환기 파이프가 천장을 가로지르는 좁은 공간. 냉장 보관 유닛 12개가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출발 당시 탑승객 전원의 혈액 샘플이 보관되어 있었다. 진우는 자기 샘플을 요청했다. 담당자가 서류를 확인하고 냉장 유닛에서 바이알 하나를 꺼내 건넸다. 투명한 용기 안에 진한 붉은색 액체가 0.5밀리리터. 12년 전 지구에서 채취한 진우의 혈액.

진우는 바이알을 들고 의료 연구실로 갔다. 세대선의 유전자 분석 장비는 기본적인 것이었지만, 친자 확인 정도는 가능했다. 문제는 비교 대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태호의 유전자 데이터는 세대선에 없었다. 지구에만 있었다. 12.4광년 밖에. 박상민의 유전자 데이터도 당연히 없었다. 진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혈액을 들여다보는 것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유전자를 분석해도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았다. 진우는 바이알을 연구실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놓고 한참 봤다. 투명한 용기 안의 붉은 액체. 12년 전의 자기 자신. 이 혈액은 지구에서 채취됐고, 같은 혈액이 지구에서 분석됐고, 그 결과가 12.4년을 날아와 지금 진우의 점수를 바꾸고 있었다.

점심때 진우는 2구역의 공용 식당에 갔다. 탑승객들이 줄을 서서 배급 식사를 받고 있었다. 수경 재배 채소와 합성 단백질. 진우 앞에 선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보정실에서 어제 '적합' 판정을 내린 71세 여자의 남편이었다. 남자가 진우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아내 점수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차 치료 대상이 유지됐다고 들었어요.”

진우가 끄덕였다.

“0.3퍼센트 이탈은 허용 범위입니다.”

남자가 웃었다.

“보정사님 덕분에 아내가 치료 받을 수 있어요.”

진우는 식판을 받아 빈자리에 앉았다. 합성 단백질을 씹었다. 질기고 비린 맛이 혀에 남았다. 진우는 자기가 '적합' 버튼을 눌러준 사람들의 목록을 떠올렸다. 9년간 수천 명. 그 사람들의 점수를 지켜준 손가락이, 지금 자기 점수는 지킬 수 없었다.

오후에 진우는 윤 과장을 다시 찾아갔다.

“세대선 내부 규정으로 예외를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윤 과장이 규정집을 펼쳤다. 세대선 정체성 관리 규정 제31조: 지구 측 행정 정정은 수신 즉시 반영한다. 예외 없음. 제32조: 점수 재산정에 대한 이의 신청은 원 발신 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윤 과장이 규정집을 닫으며 말했다.

“규정이 그렇습니다.”

진우가 물었다.

“제가 지구에 이의를 보내면, 답이 오는 데 24.8년이 걸립니다. 도착 시점이에요. 그 사이에 2차 치료 시기를 놓치면 생물학적으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윤 과장이 진우를 봤다.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가 돌아왔다.

“알고 있습니다.”

진우가 보정실로 돌아왔을 때, 대기자 목록에 새 파일이 14건 올라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점수를 검증해야 했다. 진우는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43세 남자. 기억 인덱스 이탈: 0.1퍼센트. 적합. 버튼을 눌렀다. 두 번째 파일. 58세 여자. 이탈: 0.7퍼센트. 허용 범위 안. 적합. 세 번째. 네 번째. 진우의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적합, 적합, 적합.

저녁에 진우는 한별을 데리고 세대선의 관측실로 갔다. 중심축 끝에 있는 작은 방. 강화 투명 패널 너머로 우주가 보였다. 글리제 667씨가 정면에 있었다. 아직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관측 장비의 확대 화면에는 붉은 점 셋이 삼중성을 이루고 있었다. 47년 뒤에 도착할 곳. 한별이 화면을 가리켰다.

“아빠, 저기 가면 뭐가 있어?”

진우가 말했다.

“새 행성이 있어. 우리가 살 곳.”

한별이 물었다.

“거기도 밤이 있어?”

진우가 답했다.

“있어. 근데 해가 3개라서 밤이 짧을 수도 있어.”

한별이 웃었다.

“해가 3개? 그럼 그림자도 3개야?”

진우가 웃었다.

“맞아. 그림자가 3개야.”

진우는 한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관측실에서 나오는 길에 진우는 서연을 만났다. 서연이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진우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한진우 씨.”

한별이 서연을 올려다봤다. 서연이 한별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한별이 아빠 뒤로 숨었다. 진우가 말했다.

“한별아, 아빠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거기 벤치에서 기다려.”

한별이 복도의 벤치로 뛰어갔다. 서연이 목소리를 낮췄다.

“비공식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진우가 봤다. 서연이 말했다.

“지구 통신 수신부에서 다음 신호 묶음을 예비 검토했는데, 박상민이라는 사람의 사망 기록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아직 복호화가 끝나지 않았지만, 성명 색인에 일치 항목이 떴어요.”

진우의 발이 멈췄다.

“사망 기록이요?”

서연이 끄덕였다.

“만약 박상민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면, 생부 관계가 소멸 처리돼요. 기존 등록 생부인 한태호와의 관계가 복원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점수가 원래대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어요.”

진우는 서연을 봤다. 서연의 얼굴에 형광등 불빛이 반쪽만 비치고 있었다.

“가능성이요.”

서연이 말했다.

“복호화가 끝나려면 3일에서 5일 걸립니다. 확정이 아니에요.”

진우가 물었다.

“만약 그 기록이 박상민이 아니면요.”

서연이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면 현재 점수가 유지됩니다. 64.8.”

서연이 돌아간 뒤, 진우는 벤치에서 기다리는 한별에게 갔다. 한별이 벤치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아빠, 천장이 돌아.”

진우가 웃었다.

“세대선이 돌아가는 거야.”

한별이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아빠는 안 어지러워?”

“처음에는 어지러웠어.”

한별이 아빠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었다. 한별의 체온이 진우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4구역으로 걸어갔다. 복도의 야간 조명이 발밑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3일이 지났다. 서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4일째 아침, 진우는 보정실에서 파일을 검토하다가 손이 멈췄다. 화면의 파일은 19세 남자의 것이었다. 세대선에서 태어난 아이. 기억 인덱스 이탈: 2.1퍼센트. 허용 범위 상한인 2.0을 0.1퍼센트 초과. 규정상 '부적합'이었다. 부적합 판정을 받으면 정체성 연속 점수가 하락하고, 장수 치료 등급이 내려갈 수 있었다. 진우는 화면을 봤다. 2.1퍼센트. 0.1퍼센트만 더 낮았으면 적합이었다. 진우의 손가락이 '적합' 버튼과 '부적합' 버튼 사이에서 멈춰 있었다. 0.1퍼센트. 측정 오차 범위 안에 있을 수도 있었다. 재측정을 요청하면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재측정을 요청하는 것은 보정사의 재량이 아니라 당사자의 신청에 의한 것이었다. 진우는 '부적합' 버튼을 눌렀다. 다른 사람의 점수를 조작할 수는 없었다. 자기 점수가 깨진 이유가 바로 그런 조작이었으니까.

5일째 오후, 서연에게서 통신이 왔다. 진우는 보정실에서 메시지를 열었다. '복호화 완료. 박상민 사망 기록 확인. 사망 시점: 지구력 2053년 9월. 사인: 사고사. ' 진우는 화면을 봤다. 박상민이 죽었다. 12.4년 전에. 진우가 세대선에 탄 뒤 1년도 안 돼서. 이 사람은 진우의 생부라는 기록이 만들어진 지 2년 만에 죽은 것이었다. 진우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몰랐다. 그 사람의 유전자가 진우의 몸 안에 있을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지구에서 그렇다고 했을 뿐이었다.

진우는 관리 1과에 연락했다. 박상민의 사망이 확인됐으니 생부 관계가 소멸 처리되고, 한태호와의 기존 관계가 복원되는지를 물었다. 윤 과장의 답은 짧았다.

“규정을 확인하겠습니다.”

2시간 뒤 답이 왔다. '제31조의 2: 정정된 기록의 당사자가 사망한 경우, 정정 기록은 유지되되 관계는 소멸 처리된다. 기존 기록의 복원은 별도의 행정 정정이 필요하며, 이는 원 발신 기관의 관할이다. ' 원 발신 기관. 지구. 12.4광년.

진우는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 64.8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박상민이 죽어도 점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태호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면 지구에 행정 정정을 요청해야 했고, 왕복 24.8년이 걸렸다. 그 사이 진우의 생물학적 나이는 계속 올라갈 것이었다. 2차 치료 시기를 놓치면 세포 재생의 효과가 급감한다고 의료 기록에 적혀 있었다. 적정 시기는 45세 이전. 진우의 현재 나이 38세. 7년 안에 치료를 받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졌다. 24.8년을 기다릴 수 없었다.

진우는 의자에서 일어나 보정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었다. 3구역, 2구역, 1구역을 지나 관측실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강화 패널 너머로 별들이 보였다. 세대선의 진행 방향 정면에 글리제 667씨가 있었다. 맨눈으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47년 뒤에 도착할 곳. 진우는 패널에 손바닥을 대고 섰다. 유리 너머의 냉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우주의 온도. 섭씨 영하 270도에 가까운 곳에서 얇은 패널 하나가 진우를 지키고 있었다. 12.4광년 밖의 서류 한 장이 진우의 점수를 깎았고, 같은 거리만큼의 서류가 있어야 복원됐다.

진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수현이 거실에서 한별의 그림을 벽에 붙이고 있었다. 해가 3개 그려진 행성. 그림자가 3개인 사람. 한별이 그린 것이었다. 수현이 진우를 보고 물었다.

“결과 나왔어?”

진우가 끄덕였다.

“점수는 안 돌아와.”

수현의 손이 벽에서 떨어졌다. 테이프가 반쯤 붙은 그림이 벽에서 미끄러졌다. 수현이 그림을 다시 잡았다. 진우가 수현 옆으로 가서 테이프의 나머지 반을 눌러 붙였다. 해가 3개인 행성이 벽에 고정됐다. 진우가 말했다.

“1차 치료를 신청하려고.”

수현이 진우를 봤다.

“1차면 15년이야.”

진우가 끄덕였다.

“한별이가 54살 될 때까지. 그 정도면 된다.”

수현의 눈이 빨개졌다. 진우가 수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수현이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한별이 그린 행성 그림 앞에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진우는 1차 장수 치료 신청서를 제출했다. 관리 1과 접수창구의 담당자가 서류를 받으며 진우의 얼굴을 봤다. 보정사가 1차 치료를 신청하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보정사는 대부분 2차 이상이었다. 담당자가 잠깐 진우를 보다가 아무 말 없이 서류를 접수했다. 진우는 접수증을 받아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종이의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보정실로 출근했다. 대기자 목록에 새 파일이 9건 올라와 있었다. 진우는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모니터에 누군가의 기억 인덱스가 펼쳐졌다. 좌반구 해마 영역의 회상 패턴. 진우는 데이터를 확인하고 버튼을 눌렀다. 보정실의 냉각 장치가 낮게 울렸다. 세대선이 회전하는 진동이 의자 다리를 타고 발바닥까지 올라왔다. 진우는 다음 파일을 열었다.

12광년 밖에서 날아온 서류 한 장이 당신의 수명을 결정한다면, 당신은 그 서류가 도착하기 전의 자신과 도착한 뒤의 자신 중 누구를 진짜라고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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