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 5호실 조명이 어두워지자 여자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셋을 세면 울음이 나와야 했다. 하나, 둘. 목구멍 안쪽에서 오래 눌러둔 소리가 올라왔다. 셋. 곡성이 좁은 방을 채웠다.
박자가 정확했다. 조문객 몇이 그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요즘 세상에 저렇게 우는 사람은 없었다. 상주 옆에 앉은 노인이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 곡비라며. 요즘도 저런 일을 해?”
“의뢰받고 오는 거예요. 시간당 얼마씩 받는다던데.”
여자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울음의 파고를 조절했다. 높이 올렸다가 떨어뜨리고, 다시 밀어 올렸다. 영정 속 얼굴은 웃고 있었다. 70대로 보이는 여자였다. 사인은 노환. 통상적인 죽음, 통상적인 장례. 상주들의 눈은 말라 있었다. 복도 건너 6호실에서도 비슷한 시간에 발인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방에는 곡비가 없었다. 조용했다.
곡비를 부르는 장례는 열에 한둘이었다. 상조회사 담당자는 여옥에게 이 일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여러 번 말했다. 표준처방 이후로 조문 시간 자체가 짧아졌다. 30분짜리 발인도 있었다. 상조회사는 그런 상품을
“심플 코스”
라고 불렀다.
여자의 이름은 여옥이었다. 상조회사 명단에는
“정서 대행”
이라는 항목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정식 명칭은 곡비. 조선 시대부터 있었다는 그 직업이 이름만 바뀐 채 여전히 존재했다. 다만 이제는 대신 울어주는 일이 아니라, 아무도 울지 않는 자리를 대신 채우는 일이었다.
발인이 끝나고 여옥은 봉투를 받았다. 얇았다. 요즘 벌이가 그랬다. 상조회사 대기실 로비에는 큰 화면이 걸려 있었고, 화면 속에서 젊은 배우가 알약을 손바닥에 놓고 웃고 있었다.
“글리마정, 표준처방으로 만나는 22번째 봄.”
자막이 떴다. 이어 다른 문구가 지나갔다.
“이제 아프지 않게 이별하세요. 잊을 권리, 글리마가 드립니다.”
전국민 처방률 97퍼센트.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다시 한 줄이 지나갔다. 알츠하이머 발병률 0.03퍼센트.
글리마정은 원래 비만과 당뇨를 관리하는 약이었다. 20여 년 전, 이 약을 오래 복용한 사람들에게서 신경세포 손상이 유의미하게 적다는 보고가 나왔다. 임상시험이 다시 진행됐고, 5년 뒤 정부는 40세 이상 전 국민에게 표준처방을 권고했다. 약국마다 재고가 동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여옥은 뉴스 자료 화면으로만 봤다. 그 권고가 발표된 해, 다인은 이미 없었다.
여옥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옥의 집은 방 하나짜리였다. 창은 옆 건물 벽을 마주 보고 있어서 낮에도 불을 켜야 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위층 배관 소리가 유일한 배경음이었다. 여옥은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치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 서랍에는 한 달치 글리마정이 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처방받은 양의 절반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냉동실 안쪽, 얼린 만두 봉지 뒤에 숨겨두었다. 보건소 정기 검진 때마다 복약 기록을 확인했지만 냉동실까지 뒤지는 일은 없었다.
여옥은 약 봉지를 뜯지 않고 식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대신 서랍 안쪽에서 낡은 녹음기를 꺼냈다. 표면에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소매로 한 번 닦고 버튼을 눌렀다.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뒤로 아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이거 봐봐. 나 이빨 빠졌어.”
22년 전 목소리였다. 다인이었다. 7살, 앞니 두 개가 없는 얼굴로 웃던 아이. 여옥은 그 얼굴을 정확히 그릴 수 있었다. 눈썹 끝이 살짝 처진 모양, 왼쪽 뺨의 작은 점, 웃을 때 드러나는 잇몸의 색까지.
처음 표준처방을 시작한 건 다인이 떠난 지 2년이 지난 봄이었다. 여옥은 그날도 사고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을 준비를 하고 이불 속에 누웠다. 트럭의 전조등, 젖은 아스팔트, 다인의 신발 한 짝. 순서대로 떠올렸다. 신발까지 갔을 때, 눈이 말라 있었다. 여옥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았다. 다시 처음부터 떠올렸다. 트럭의 전조등, 젖은 아스팔트, 신발 한 짝. 두 번째에도 눈은 마르고 있었다.
그날 밤 여옥은 남은 약 봉지를 변기에 쏟아부었다. 다음 날 병원에서 새 처방을 받아 왔지만, 절반만 먹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다.
밤마다 여옥은 녹음기를 틀었다. 다인의 목소리, 트럭의 전조등, 젖은 아스팔트, 신발 한 짝. 순서를 확인하는 일이 하루의 마지막 일과였다. 순서가 흐트러지지 않으면, 그날은 넘어간 것이었다.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은 보건소 정기 검진일이었다. 표준처방 대상자는 전원 의무 검진 대상이었다. 간호사가 여옥의 손끝에 채혈기를 대며 말했다.
“어르신, 요즘 복약 잘 하고 계시죠?”
“그럼요.”
“올해 관내 알츠하이머 신규 진단이 1건도 없었어요. 여옥 님 연배에서는 옛날엔 열에 서넛은 걸렸다는데.”
여옥은 손끝에 맺힌 피를 봤다. 검사지에 붉은 점이 번졌다.
“신기하죠? 이제 다들 안 잊어버려요.”
“그러게요.”
간호사가 화면을 넘기며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지난 반기 인지 점수가 조금 내려갔네요. 82점에서 76점. 복약 순응도 낮은 분들한테 가끔 이런 게 나오는데, 혹시 요즘 약 거르신 적 있으세요?”
“없어요.”
간호사는 화면을 한 번 더 보더니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그럼 다음 반기에 다시 볼게요. 너무 걱정 마시고요.”
여옥은 보건소를 나오면서 손끝의 반창고를 뜯었다. 피가 아직 조금 배어 나왔다. 그 자국을 오래 봤다.
집에 돌아오니 휴대폰에 상조 중개 앱 알림이 떠 있었다. 신규 의뢰 1건. 여옥은 알림을 눌렀다. 화면에 뜬 이름은 낯설었다. 정재현. 발인 이틀 전. 위치는 도보로 15분 거리였다. 여옥은 수락 버튼을 눌렀다.
사흘 뒤, 여옥의 집으로 그 남자가 직접 찾아왔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고, 정장 재킷을 입었지만 넥타이는 매지 않은 채였다. 문 앞에서 벨을 두 번 누르고, 세 번째는 손가락을 든 채로 망설였다.
“저. . 상조 쪽에서 번호를 받았는데요.”
여옥은 문을 반쯤 열어둔 채 그를 봤다.
“곡비 필요하세요?”
“네. 어머니가. . 그저께 돌아가셨어요.”
“발인은 언제예요?”
“모레요.”
여옥은 그를 안으로 들이지 않고 조건부터 말했다.
“1시간에 15만 원. 발인까지 하면 30만 원. 진짜처럼 울어드립니다.”
“진짜처럼요.”
그가 그 말을 따라 했다. 이상하다는 듯이. 여옥은 그의 얼굴을 다시 봤다. 눈 밑이 부어 있지 않았다. 울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안 우세요?”
남자가 시선을 떨궜다. 발끝을 봤다.
“울어야 하는데. . 안 나와요. 표준처방 시작한 지 8년 됐거든요. 뉴스에서 그러는데 요즘은 다 그렇대요. 3일이면 정리된다고.”
“3일장처럼요.”
“네. 딱 그만큼요.”
남자의 이름은 재현이었다. 재현은 문턱에 선 채 집 안을 흘긋거렸다. 식탁 위의 뜯지 않은 약 봉지, 서랍 밖으로 삐져나온 녹음기 줄.
“이상한 걸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요.”
“우는 게. . 아직도 되세요? 진짜로요.”
여옥은 대답 대신 문을 마저 열었다.
“계약금 절반, 지금 주세요.”
재현은 지갑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부럽다는 게 아니라요. 그냥 궁금해서요. 저는 어머니 얼굴을 봐도, 뭐랄까, 창문 너머로 보는 것 같아서요. 슬픈 건 아는데 만져지지가 않아요.”
여옥은 돈을 세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약을 끊으면 만져져요.”
“그거 불법 아니에요?”
“불법은 아니고, 그냥 아무도 안 해요.”
재현이 지갑을 다시 넣으며 물었다.
“왜 아무도 안 해요?”
“돌려받고 싶은 게 없으니까요.”
재현은 그 말에 뭔가 더 물으려다 그만뒀다. 대신 발인 시간과 장례식장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발인 날, 여옥은 예정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영정 사진 속 여자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재현은 상복을 입고 문 앞에 서 있었다.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여옥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소리를 밀어 올렸다. 곡성이 시작되자 조문객 몇이 돌아봤다. 재현의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관을 옮기는 순서였다. 여옥은 관을 따라 걸으며 곡을 이어갔다. 관의 손잡이를 보는 순간, 소리가 목 안에서 멈췄다. 손잡이는 은색이었다. 22년 전, 다인의 관에도 같은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여옥은 그 관을 땅에 묻은 계절을 떠올리려 했다.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그날 하늘이 어떤 색이었는지. 손잡이 모양은 선명한데, 하늘이 없었다.
여옥의 발이 멈췄다. 뒤따르던 사람들이 부딪힐 뻔했다. 재현이 옆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여옥은 대답 대신 다시 걸었다. 곡소리를 다시 밀어 올렸지만, 아까와 다른 소리였다. 박자가 어긋나 있었다.
장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재현이 옆자리에 앉았다. 조문객들과 조금 떨어진 뒷좌석이었다.
“아까, 잠깐 멈추셨을 때요.”
“멈춘 적 없어요.”
“멈추셨는데요.”
여옥은 창밖을 봤다. 창에 비친 자기 얼굴 위로 풍경이 겹쳐 지나갔다.
“손잡이가 낯이 익어서요.”
재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함께 봤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의 어깨가 잠깐씩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장지는 야산 중턱이었다. 인부들이 하관줄을 조절하는 동안 여옥은 다시 곡을 준비했다. 하나, 둘. 셋을 세기 전에, 재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따님이셨어요?”
여옥의 숨이 멎었다. 셋을 넘겼다. 곡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하셨어요?”
“손잡이 얘기하실 때, 표정이. . 아니에요.”
관이 흙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밧줄이 서서히 풀렸다. 여옥은 목 안에서 소리를 다시 밀어 올렸다. 이번에는 나왔다. 늦게 나온 만큼 컸다.
관이 완전히 흙 속에 잠기는 동안 인부들은 삽을 서너 번 더 얹었다. 재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여옥의 옆얼굴을 계속 봤다. 여옥은 곡을 그치지 않았다. 소리는 크게 나왔지만 박자는 여전히 어긋나 있었다. 하나를 세야 할 자리에서 둘을 세고, 둘을 세야 할 자리에서 멈췄다. 조문객 몇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상조회사 직원이 슬쩍 다가와 여옥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시간 다 됐습니다.”
여옥은 눈을 뜨고 곡을 멈췄다. 목이 쉬어 있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목이 상하지 않았다.
하관이 끝나고 사람들은 산을 내려갔다. 여옥은 맨 뒤에서 걸었다. 발밑의 흙이 젖어 있었다. 신발 밑창에 붙은 흙덩어리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재현이 뒤로 처져 그녀의 걸음에 맞췄다.
“봉투는 장례식장에서 드릴게요.”
“급하지 않아요.”
“급한 게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여옥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 그 질문, 대답 안 하셨어요.”
“무슨 질문요.”
“따님이셨냐고요.”
여옥은 산길 옆 나무를 봤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나무였다. 가지 사이로 하늘이 조각조각 보였다.
“곡비는 사연 안 물어요. 우는 게 일이지.”
“근데 방금은 우는 게 아니었잖아요. 그거.”
“뭐가요.”
“박자가 이상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듣던 사람이라 알아요. 어머니 발인 준비하면서 곡비 후기 영상 스무 개는 봤거든요. 다 똑같아요, 하나 둘 셋. 근데 아까는 아니었어요.”
여옥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재현이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말을 이었다.
“저 실은, 오늘 어머니 장례에 곡비를 부른 게 처음부터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그럼요.”
“저를 위해서였어요. 우는 사람을 옆에 두면, 저도 뭔가 나올까 봐. 근데 안 나왔어요. 대신 아까 여옥 씨가 멈췄을 때, 그때 뭔가 봤어요. 진짜였어요, 그거.”
산 아래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말이 없었다. 상조회사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여옥은 버스에 타지 않고 걸어서 돌아가겠다고 했다. 재현이 따라나섰다.
“버스 타셔야죠, 먼 데서 오셨을 텐데.”
“머리 좀 식히고 싶어서요.”
“저도 같이 걸으면 안 돼요?”
여옥은 대답 대신 걷기 시작했다. 재현은 상복 위에 코트를 걸치고 뒤따랐다.
두 사람은 야산 아래 도로를 따라 걸었다. 겨울 오후의 해가 낮게 걸려 있었다. 재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옥 씨는 왜 반만 드세요?”
여옥의 걸음이 잠깐 흐트러졌다.
“뭘요.”
“약이요. 서랍에 봉지 그대로 있던 거, 뜯지도 않았던데요. 그날 집에서 봤어요.”
“남의 집 서랍을 왜 봐요.”
“보려던 게 아니라 보였어요. 문 앞에 서 있었잖아요.”
여옥은 걸음을 멈추고 재현을 돌아봤다.
“그쪽이 알 바 아니에요.”
“알아요. 근데 저도 요즘 그 생각을 해요. 끊으면 어떻게 되는지. 뉴스에서는 위험하다고만 하지 정확히 뭐가 어떻게 위험한지는 안 알려주잖아요. 인지 저하니, 조기 치매 위험이니, 그런 말만 하고.”
“위험한 거 맞아요.”
“근데 여옥 씨는 하고 계시잖아요.”
“나는.”
여옥은 말을 끊었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생각했다. 이 남자는 오늘 어머니를 묻었다. 창문 너머로 보는 것 같다고 말한 얼굴이 지금도 그대로였다.
“나는 잃을 게 이미 없어서 그래요. 그쪽은 아니잖아요. 회사도 있고, 가족도 있고.”
“어머니는 이제 없어요.”
“다른 가족이요.”
“여동생 하나 있어요. 걔도 저랑 똑같아요. 오늘 발인인데 얼굴 한 번 안 비쳤어요. 지방 발령이라 못 온다고 했는데, 알아요, 그거 핑계인 거. 걔도 창문 너머로 보는 거예요, 자기 엄마 죽음을.”
바람이 불어 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여옥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재현이 보폭을 맞추며 물었다.
“약 끊으면, 그, 처음에 어떤 느낌이에요?”
“묻지 마요.”
“궁금해서 그래요.”
“묻지 말라고요.”
여옥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나가던 차 한 대가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지나갔다. 재현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여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건소에서 반기마다 인지 점수 재요. 순응도 낮으면 담당자가 배정돼요. 집으로 사람이 와요. 그다음엔 강제 처방으로 바뀌고요. 그쪽은 회사 다니죠? 회사에 통보 가요, 그거.”
재현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런 것까지 가요?”
“작년에 바뀐 지침이에요. 복약 순응도가 국민건강관리 지표에 들어갔거든요. 회사 단체 검진 결과에 포함돼요.”
“몰랐어요.”
“그러니까 묻지 마요. 궁금해할 수록 위험해지는 거예요.”
재현은 걸음을 멈추고 여옥을 정면으로 봤다.
“근데 여옥 씨는 왜 아직 안 걸렸어요? 지난번 검진에서 점수 떨어졌다면서요. 그 정도면 담당자 배정 대상 아니에요?”
여옥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간호사가 화면을 넘기며 미간을 좁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 반기에 다시 보자던 말도.
“아직은요.”
“아직은.”
재현이 그 말을 곱씹듯 따라 했다.
“그럼 다음 반기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여옥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재현의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멀리 버스 정류장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류장 표지판 아래서 재현이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구겨진 영수증을 꺼내 뒷면에 볼펜으로 숫자 몇 개를 눌러 적었다.
“제 번호예요. 걸으실 때 심심하면요.”
여옥은 받지 않았다.
“필요 없어요.”
“그럼 버리세요. 그냥 드리고 싶어서요.”
재현이 종이를 여옥의 코트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손끝이 잠깐 스쳤다. 여옥은 손을 피하지 않았다.
버스가 도착했다가 그대로 떠났다. 둘 다 타지 않았다.
“안 타세요?”
“걸어간다고 했잖아요.”
“저도 안 탈래요.”
“버스비 아까워요?”
“아니요. 지금 헤어지면 다음 반기 얘기를 못 들을 것 같아서요.”
여옥은 그를 오래 들여다봤다. 창문 너머로 보는 것 같다던 얼굴이, 지금은 창문이 사라진 얼굴처럼 보였다. 눈가가 붉었다. 하루 종일 나오지 않던 것이 지금에서야 거기 맺혀 있었다. 여옥은 그 낯을 알아봤다. 곡비 일을 하며 수백 번 마주친 얼굴, 터지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우세요.”
“네?”
“울고 싶으면 우세요. 아무도 안 봐요.”
재현의 어깨가 먼저 흔들렸다. 소리는 한참 뒤에 따라왔다. 낮고 거친 소리였다. 곡비의 소리와는 달랐다. 박자도 없고 높낮이도 없었다. 그냥 무너지는 소리였다. 여옥은 등을 두드리지 않고 옆에 서서 버스 두 대가 지나가는 걸 지켜봤다.
재현이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이럴 데가 아닌데.”
“이럴 데가 딱 맞는 데예요. 오늘 어머니 묻었잖아요.”
재현이 웃었다.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여옥 씨 덕분인 것 같아요. 아까 멈추셨을 때, 그거 보고 나서부터 뭔가 자꾸 올라왔어요.”
“내가 한 거 없어요.”
여옥은 주머니 속 구겨진 종이를 손끝으로 만졌다. 버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여옥은 겉옷도 벗지 않고 식탁 앞에 앉았다. 뜯지 않은 약 봉지가 그대로 있었다. 그것을 들고 냉동실로 가 얼린 만두 봉지 뒤, 나머지 절반 옆에 밀어 넣었다. 문을 닫는 손끝이 시렸다.
서랍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테이프가 늘어난 듯 재생 속도가 아주 조금 느렸다. 다인의 목소리가 예전보다 낮게 흘러나왔다.
“엄마, 이거 봐봐. 나 이빨 빠졌어.”
22년이면 자기테이프도 늙는다. 여옥은 그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아챘다. 순서를 확인하려 했다. 트럭의 전조등, 젖은 아스팔트, 신발 한 짝. 그런데 오늘은 하나를 세기도 전에, 셋을 채우기도 전에, 목구멍 안쪽에서 소리가 올라왔다.
여옥은 식탁에 이마를 댔다. 곡비의 울음이 아니었다. 박자도 높낮이도 없었다. 그냥 무너지는 소리였다. 녹음기가 테이프 끝에 닿아 달칵, 멈췄다. 여옥은 그 소리를 듣고도 손을 뻗지 않았다. 되감지 않았다. 어깨가 떨리는 대로 두었다.
한참 뒤 여옥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어 있었다. 손을 뻗어 녹음기를 집었다.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테이프가 늙은 소리로 천천히 감겼다. 여옥은 그 소리가 다 끝나기를, 손끝이 시린 채로,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