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뚜껑을 열자 희미한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서진은 건반 덮개를 닦았다. 검은색 유광 표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흐릿하고, 초점이 맞지 않는 상.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 같았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상아의 감촉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길을 따라 건반을 눌렀다. 소리가 없었다. 전원을 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리 없는 연주를 한참 동안 계속했다. 민준이 작곡한 미완성 야상곡. 그가 떠나기 1달 전에 들려주었던, 이제는 그녀만이 아는 선율이었다.
문제는, 그녀 역시 그것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세 번째 마디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분명 다음 화음이 있었다. 민준의 어깨 너머로 악보를 보았고, 그의 손이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첼로의 낮은 현을 닮은, 따뜻하고 단단한 화음. 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 소리는 잡음 섞인 낡은 녹음처럼 재생됐다. 어떤 음들이었는지, 그 음들이 어떤 순서로 쌓여 있었는지 선명하지 않았다.
흐릿했다. 모든 것이.
민준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던 모습. 집중할 때 미간에 잡히던 옅은 주름. 눈을 감으면 전체적인 윤곽은 떠올랐지만, 세부를 보려고 하면 이미지가 픽셀 깨진 사진처럼 흩어졌다. 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잠긴 목소리로 ‘잘 잤어? ’ 하고 묻던 톤의 높낮이, 연주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내뱉던 짧은 한숨 소리. 기억의 표면을 손으로 더듬는 것 같았지만, 잡히는 것은 매끄럽고 공허한 감촉뿐이었다.
서진은 건반에서 손을 떼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귓바퀴 안쪽에 착용한 작은 장치가 희미한 온기를 보내고 있었다. ‘위로망’ 접속 장치. 3개월 전, 민준이 떠난 직후부터 그녀의 일부가 된 기계였다.
위로망은 슬픔을 위한 광대역 네트워크였다.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급성 슬픔의 신경 신호를 포착해, 수백만 명의 익명 가입자에게로 분산시켰다. 슬픔의 총량은 변하지 않지만, 개인이 짊어지는 무게는 1그램짜리 먼지처럼 가벼워졌다. 그 대가로, 당신 역시 타인의 슬픔 한 조각을 아주 미세하게 나눠 짊어져야 했다. 도시의 배경 소음처럼 항상 존재하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낮은 비애의 진동. 견딜 만했다. 적어도 숨을 쉴 수 없게 만드는 슬픔의 급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위로망 덕분에 서진은 다시 잠을 잘 수 있었고, 음식을 넘길 수 있었고, 피아노 앞에 앉을 수도 있었다. 시스템은 그녀의 삶을 붕괴 직전에서 구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앗아갔다. 슬픔이라는 데이터 패킷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던 기억의 고해상도 파일을 함께 가져가 버렸다.
화면을 켜자 이메일이 와 있었다. 민준의 스승이었던 노장의 지휘자, 박인수에게서 온 편지였다. 넉 달 뒤에 있을 민준의 1주기 추모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네가 민준의 곡으로 무대에 서주었으면 하네. 그 아이가 남긴 마지막 곡이면 더 좋겠지. 민준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음악을 살아있게 하는 것일세.」
서진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민준의 마지막 곡. 미완성 야상곡. 그녀만이 완성할 수 있는 곡. 하지만 흐릿한 기억으로는 불가능했다. 첫 음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어떻게 그의 영혼이 담긴 곡을 완성한단 말인가.
그녀는 위로망 설정창을 열었다. 화면에 단순한 그래프가 떠 있었다. 그녀의 슬픔 신호가 네트워크로 흘러나가는 양을 보여주는 실시간 데이터. 그래프는 안정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정상 범위 유지 중. 심리적 안정 상태입니다. ’ 시스템의 메시지가 부드러운 녹색으로 빛났다. 그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접속 해제 버튼이 있었다.
지난 3개월간 한 번도 누를 생각을 해본 적 없는 버튼이었다. 상담사는 접속을 유지하는 것이 ‘안정적인 애도 절차’에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연결을 끊는 것은 안전장치 없이 급류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흩어졌던 슬픔의 무게 전부가 한꺼번에, 원래의 주인에게로 되돌아온다. 시스템의 경고문은 간결했다. ‘접속 해제 시 급성 정신적 충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권장하지 않습니다. ’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민준을 온전히 기억해내려면, 그 기억과 엉겨 붙어 있는 슬픔도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다. 서진의 손가락이 망설였다. 화면의 버튼 위를 맴돌았다.
이것은 미친 짓이다. 그녀의 이성이 말했다.
음악을 완성해야 해. 그녀의 심장이 말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시에 버튼을 눌렀다.
‘연결을 해제합니다. ’
순간, 세상의 소리가 사라졌다. 아니, 소리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서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거대한 압력 때문에 다른 모든 감각이 지워졌다. 마치 깊은 물속으로 순식간에 끌려 들어간 듯한 이명과 함께, 무언가가 심장을 짓눌렀다. 3개월 동안 잊고 있던 무게였다. 1그램의 먼지가 아니라, 수백 톤의 강철 대들보가 되어 그녀를 덮쳤다.
숨이 막혔다. 소파에 등을 기댔지만 소용없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수축했다.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민준의 얼굴, 차갑게 식어 있던 그의 손, 장례식장의 소독약 냄새, 사람들의 위로가 칼날처럼 박히던 순간들. 분산 처리되었던 데이터가 그녀의 신경계로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고통 속에서, 하지만, 다른 것이 보였다.
아주 선명한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민준의 작업실. 그는 첼로를 내려놓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서진을 보며 웃었다.
“서진아, 이 부분 어때?”
그의 목소리. 잡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미세한 허스키함, 부드러운 울림. 서진은 그 목소리를 잊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선명했다.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는 모습, 미간의 옅은 주름. 그는 야상곡의 세 번째 마디를 연주했다. 따뜻하고 단단한 화음. 서진의 귀에 음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들렸다. 솔, 시, 레. 낮은 도의 베이스. 완벽한 기억이었다.
서진은 비틀거리며 피아노로 다가갔다. 울음으로 떨리는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방금 들은 화음을 눌렀다. 정확했다. 민준의 소리였다. 다음 마디, 그리고 그다음 마디. 기억의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고통과 함께. 아름다움과 함께.
하지만 1분도 버틸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화면이 눈물로 번져 보였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세 번 만에야 접속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위로망에 연결합니다. ’
강철 대들보가 다시 1그램의 먼지로 흩어지는 감각. 압력이 빠져나가고,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서진은 바닥에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직후, 더 큰 절망이 찾아왔다.
방금 전까지 생생했던 민준의 얼굴이 다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들리던 그의 목소리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멀어졌다. 피아노 건반 위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연주했던 세 번째 마디의 화음. 어떤 음들이었더라. 솔, 시… 다음이 뭐였지?
기억이 다시 옅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보고 온 참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민준을 되찾기 위해서는, 매번 그 지옥을 기꺼이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다음 날 아침, 서진은 악보를 펼쳤다. 어젯밤 고통 속에서 건져 올린 세 번째 마디의 화음이 연필로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어제의 격렬함이 거짓말처럼 머릿속은 다시 고요했고, 그 음들은 이제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기호의 나열일 뿐이었다. 솔, 시, 레, 그리고 낮은 도. 이 음들이 어째서 그토록 따뜻하고 단단하게 들렸었는지, 위로망의 필터를 거친 감정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일종의 의식처럼 피아노 앞에 앉았다. 태블릿을 옆에 두고, 펜과 오선지를 준비했다. 이것은 더 이상 추모가 아니었다. 기억을 인양하는 위험한 잠수 작업이었다. 심호흡을 했다. 공기가 폐를 채우는 감각이 낯설었다. 지난 3개월간 그녀의 호흡은 시스템이 조율해주는 안정적인 패턴에 불과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깊게 숨을 쉬는 행위 자체가 작은 반란처럼 느껴졌다.
다시, 접속 해제 버튼을 눌렀다.
두 번째 충격은 예측 가능했기에 더 끔찍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위액이 역류하는 감각에 속을 게워냈고, 손끝부터 혈액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차가워졌다.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와중에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들었다. 민준. 민준의 음악. 야상곡의 네 번째 마디.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흐르던 모습을 떠올려라. 떠올려.
기억의 댐에 또 다른 균열이 생겼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감정의 파편 속에서 선율 한 조각이 떠올랐다. 네 번째 마디에서 다섯 번째 마디로 넘어가는, 애틋하고 짧은 아르페지오. 민준이 그 부분을 연주하며 씩 웃던 얼굴이 보였다.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 꼭 네가 새벽에 잠결에 뒤척이는 소리 같아. ’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서진은 건반을 짚었다. 파#과 라, 그리고 한 옥타브 위의 레. 떨리는 손으로 오선지에 음표를 그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30초가 한계였다. 온몸의 신경이 과부하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태블릿의 접속 버튼을 눌렀다. 구원과도 같은 시스템의 개입이 시작되고, 거대한 슬픔은 다시 수백만 개의 먼지로 흩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귓가에 시스템의 인공적인 음성이 나직하게 울렸다.
‘경고: 불안정한 접속 패턴이 감지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24시간 동안 접속 해제 기능이 제한됩니다. 반복적인 이상 패턴 발생 시, 담당 상담사에게 관련 데이터가 전송될 수 있습니다. ’
24시간. 서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루에 한 마디. 이런 속도로는 넉 달 뒤의 연주회는커녕 곡의 도입부도 완성하지 못할 터였다. 시스템은 그녀를 보호하는 감옥이었다. 기억을 되찾으려는 그녀의 시도를 ‘불안정한 패턴’이자 ‘이상 신호’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때, 박인수 지휘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받지 않을까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서진 씨, 나 박인수일세. 몸은 좀 어떤가?”
노 지휘자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부드러웠다.
“네, 지휘자님.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다름이 아니라, 민준이 쓰던 작업실을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했네.”
잠시 서류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이가 학생 때부터 쓰던 작곡 노트인데, 마지막 페이지에 뭐라고 적어 놨더군. ‘첫 음의 무게. 서진에게. ’ 아마 자네에게 주려고 했던 모양이야.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을 테니, 시간 될 때 한번 들르게.”
첫 음의 무게. 서진은 숨을 멈췄다. 그것은 민준이 이 야상곡에 대해 이야기할 때 했던 말이었다. 모든 곡은 첫 음에 그 곡의 영혼이 담겨야 한다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면 다음 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그리고 이 야상곡의 첫 음은 서진, 바로 그녀 자신이라고 했다.
“네. 곧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서진은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민준의 노트. 그 안에 혹시 곡을 완성할 단서가 남아있을까. 희망 한 조각이 절망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동시에, 24시간의 접속 제한이라는 차가운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이틀 뒤, 서진은 약속 장소인 오래된 레코드 바(Bar)로 향했다. 박인수 지휘자가 민준과 함께 자주 찾던 곳이었다. 문을 열자 눅눅한 나무 냄새와 LP판의 먼지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창가 자리에 앉은 박인수가 그녀를 보고 손을 들었다.
“왔는가.”
그는 낡고 두꺼운 노트를 그녀에게 건넸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노트를 받아들었다. 민준의 손때가 묻은 표지가 느껴졌다. 치기 어린 시절의 악상부터 정교하게 발전해나가는 그의 음악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기록이었다.
“민준이는… 자네 이야기를 참 많이 했어.”
박인수가 위스키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자네를 만나고 나서 곡이 훨씬 깊어졌다고. 이전에는 기술적으로 완벽했지만 영혼이 없었는데, 자네가 그 아이의 음악에 영혼을 불어넣어 줬다고 말이야.”
서진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영혼을 불어넣어 주기는커녕, 이제는 그의 영혼이 담긴 곡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야상곡, 작업은 잘 되어가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서진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네… 조금씩… 하고 있어요.”
“어려울 게야.”
박인수는 그녀의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민준이의 모든 것이 담긴 곡이니까. 그 아이의 기쁨, 분노, 사랑, 그리고… 마지막의 그 절망까지도. 그 모든 감정을 감당해야만 연주할 수 있는 곡일세.”
절망. 그 단어가 서진의 가슴에 박혔다. 위로망이 앗아간 감정이었다. 그녀는 민준의 기쁨과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슬픔을 되찾으려 했지만, 그의 절망까지 마주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선율 속에,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민준의 마지막 감정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부담 갖지는 말게.”
박인수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해주고 싶군. 민준이는 자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 곡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했어. 그 곡은 민준이가 자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같은 걸세.”
바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서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민준의 노트를 펼쳤다. 수많은 악상과 메모들 사이를 헤매던 그녀의 손가락이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췄다.
‘첫 음의 무게. 서진에게. ’
그리고 그 아래, 악보 대신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나의 처음과 끝. 이 곡은 건반으로 시작하지 않아. 당신의 숨소리로 시작해.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는 첫 호흡, 그게 이 야상곡의 첫 음이야.」
서진은 망연자실했다. 악보에 없는 음. 오직 그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소리. 민준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의 떨림. 그것을 기억해내지 못하면, 그녀는 영원히 이 곡의 첫발을 뗄 수조차 없었다.
태블릿 화면에 알림이 떴다. ‘접속 해제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
이제 그녀는 다시 지옥으로 다이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야 할 것은 단순한 화음이나 멜로디가 아니었다. 그녀와 민준 사이에 존재했던 가장 내밀한 순간의 공기, 그 떨림 자체였다. 그것은 아마도 슬픔의 가장 깊은 핵에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그녀는 노트와 오선지를 앞에 두고, 다시 한번 접속 해제 버튼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이전보다 더 큰 두려움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서진은 눈을 감았다. 민준의 노트를 가슴에 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심장에서 울렸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는 첫 호흡, 그게 이 야상곡의 첫 음이야. ’ 이것은 단순한 기억의 인양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을, 그들의 시간을, 흩어지기 전의 온전한 형태로 다시 불러오는 의식이었다. 그녀는 태블릿을 들어, 망설임 없이 접속 해제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전의 두 번처럼 고통을 버텨내려 발버둥 치지 않았다. 대신, 온몸으로 슬픔의 급류를 맞았다. 강철 대들보가 아니라, 거대한 파도였다. 서진은 기꺼이 그 파도 속으로 몸을 던졌다. 숨이 막히고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 하지만 그 고통의 핵을 향해,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민준의 절망을 찾아. 박인수 지휘자가 말했던, 그녀가 외면해왔던 그의 마지막 감정을 찾아.
기억의 심연에서, 그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가 야상곡을 거의 완성해가던 비 오는 밤이었다. 그는 갑자기 연주를 멈추고 돌아섰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아니었다. 깊은 피로와 그림자 같은 불안이 어려 있었다.
“서진아.”
그의 목소리는 비에 젖은 나뭇잎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만약에 내가… 사라지면, 내 음악도 같이 사라질까?”
그 질문의 무게에 서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가운 손을 마주 잡을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절박하게 흔들렸다. 수많은 음표 뒤에 숨겨두었던,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아니. 내가 있잖아. 내가 전부 기억할 거야.”
그녀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 순간, 그녀가 내뱉은 짧은 숨결. 그의 이름을 부르기 직전의 그 미세한 호흡의 떨림. 그것이었다. 야상곡의 첫 음.
“민준.”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구원받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다시 건반에 손을 얹고, 마지막 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서진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날 밤 처음으로 완성된 선율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야상곡이 아니었다. 공포를 넘어선 사랑의 약속이었고, 소멸에 저항하는 간절한 기도였다.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하나의 선율 안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고 있었다. 완벽한 곡이었다.
서진은 눈을 떴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졌다. 머릿속에서는 민준의 야상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음도 빠짐없이 연주되고 있었다. 고통은 여전했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이제 그 아픔은 민준의 일부이자, 그녀 자신의 일부였다. 그녀는 더 이상 태블릿을 찾지 않았다. 위로망에 접속할 이유가 사라졌다. 분산시켜야 할 슬픔 같은 건 없었다. 이것은 온전히 그녀가 감당해야 할, 민준을 사랑했던 대가이자 증거였다.
넉 달 뒤, 추모 연주회장.
객석의 모든 조명이 꺼지고, 무대 위 피아노에만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정적 속에서 서진이 걸어 나왔다. 위로망 접속 장치를 제거한 귓바퀴는 허전했지만, 오히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관객에게 인사한 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검은 유광 표면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흐릿하지 않았다. 깊은 슬픔과 고요한 의지가 담긴, 낯설지만 분명한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건반 위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대신, 두 눈을 감고 아주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이크가 없었지만, 그 숨소리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홀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민준을 향한,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모두를 향한 첫 음이었다. 잠시의 정적. 그녀가 내뱉는 숨결과 함께, 첫 화음이 연주될 터였다.
서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차가운 건반을 향해,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