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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 없는 목

2026. 7. 16. · 9,154자 · 약 11분

등급 없는 목 썸네일
17

우편함 바닥에 봉투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재생지로 만들어져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부풀어 오른, 정부 발송품 특유의 질감이었다. 서진은 그걸 집어 들고 현관문을 닫았다. 거실의 인공 식물이 설정된 시간에 맞춰 이파리를 천천히 펼치고 있었다. 집 안의 모든 것은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였다. 봉투는 그 순서에 없는 항목이었다.

국민건강예측부. 발신인 자리에 찍힌 글자는 명조체였다. 서진은 봉투를 열지 않고 식탁에 올려두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인공 식물의 수분 공급 장치가 낮은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고 나서야, 서진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얇은 종이 한 장이었다. 내용은 간결했다.

[제4차 양자 뇌 스캔 정기 판독 결과 통보]

성명: 이서진

판독 결과: 잠재적 악성 신호 감지 (갑상선)

위험 등급: 3

등급 3. 서진의 눈이 그 숫자 위에서 멈췄다. 서진은 그 숫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아래로 더 작은 글자들이 이어졌다.

권고 사항: 예방적 전절제술

이행 기한: 통보일로부터 90일

서진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만졌다. 피부는 매끄러웠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통증도, 부기도, 이물감도 없었다. 몸은 어제와 똑같았다. 하지만 책상 위의 종이가 몸은 어제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말기를 들어 건강예측부 민원 상담 채널에 접속했다. 대기열은 없었다. 바로 인공지능 상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서진 님?”

“정기 판독 결과에 대해 문의하고 싶습니다. 재검토를 요청할 수 있나요?”

“등급 3 판정에 대한 이의 제기 절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자 뇌 스캔의 예측 정확도는 99.8%로, 재검토의 실익이 없는 것으로 국가의료위원회에서 의결하였습니다.”

목소리는 낭랑했지만 온도가 없었다. 서진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몸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습니다. 건강합니다.”

“예방적 절제술은 증상 발현 전 위험 요소를 제거하여, 미래의 치료 비용과 사회적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진적 의료 조치입니다. 이서진 님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입니다.”

최선의 선택. 상담원은 그 말을 녹음된 안내 방송처럼 반복했다. 서진은 통화를 끊었다. 단말기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목도 그대로였다. 무엇이 변한 걸까. 몸인가, 아니면 몸에 대한 소유권인가.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예방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병을 위해 건강한 몸을 여는 것. 아직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예측하여 미리 가두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양자 스캔 도입 이후 평균 수명은 112세까지 늘었고, 암 사망률은 80% 이상 감소했다. 시스템은 성공적이었다. 성공적인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진은 낡은 보안망으로 우회 접속했다. 공공 네트워크에서는 검색되지 않는 정보들이 있었다. ‘QBS 등급 조정. ’ ‘3등급 거부. ’ 익명의 게시판과 폐쇄된 포럼을 여러 번 거치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나타났다.

‘조율사. ’

그들은 등급을 지우거나 낮춰주는 브로커였다. 접선 방법은 구식이었다. 암호화된 메시지 대신, 특정 장소의 특정 사물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 서진은 화면에 뜬 약도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을지로의 한 골목, 낡은 조명가게의 세 번째 마네킹. 그 마네킹의 왼손에 푸른색 실을 묶어두면, 24시간 안에 연락이 온다. 성공 보수. 선금 없음. 위험 부담은 의뢰인에게.

다음 날 오후, 서진은 그 골목에 서 있었다. 회색 먼지가 쌓인 쇼윈도 너머로 마네킹 세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모두 똑같은 플라스틱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진은 주머니 속 푸른색 실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망설였다. 이것은 법을 어기는 일이다. 국가 의료 시스템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발각되면 의료보험 자격이 영구 박탈되고, 사회 신용 등급이 최하로 떨어진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술대에 눕는 것은 어떤가. 건강한 목을 의사에게 내어주고, 몸의 일부를 영원히 잃는 것. 평생 호르몬 약을 먹고, 희미한 흉터를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합법적인 형벌처럼 느껴졌다.

서진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졸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세 번째 마네킹의 손목에 푸른 실을 단단히 묶었다. 매듭을 두 번 지었다. 돌아서 가게를 나올 때까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연락이 온 것은 18시간 만이었다. 발신자 표시가 없는 단문 메시지였다. 숫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좌표, 그리고 시간. ‘21: 00’.

약속 장소는 폐쇄된 지하철 승강장이었다. 지금은 순환선 보급 열차만 드나드는 곳. 서진은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축축하고 미지근한 공기 속에 곰팡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멀리서 열차가 지나가는 진동이 벽을 타고 희미하게 전해졌다. 승강장에는 벤치 하나와 고장 난 자판기뿐이었다. 희미한 안전등이 모든 것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서진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서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푸른 실.”

그는 질문하지 않았다.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다.

“네.”

“앉으시죠.”

남자가 벤치를 가리켰다. 서진이 앉자, 그도 옆에 간격을 두고 앉았다. 그는 손에 든 낡은 데이터패드를 켰다.

“이름은 필요 없습니다. 통보서에 적힌 판독 식별 번호만 알려주세요.”

서진은 종이에 적힌 16자리의 번호를 불렀다. 남자의 손가락이 패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후, 화면에 복잡한 파동 형태의 그래프가 떠올랐다. 서진의 양자 뇌 스캔 원본 데이터였다.

“등급 3. 갑상선. 특이 패턴이 강하게 잡혔군요. 5년 내 발현 확률 72%.”

남자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의사도, 공무원도 아닌, 그저 데이터를 읽는 기계 같았다. 그가 화면의 한 부분을 확대했다.

“이게 당신의 양자 서명입니다. 예측 시스템은 이 서명의 미세한 왜곡을 보고 등급을 매기죠. 우리는 이 왜곡을 지우는 게 아닙니다. 지우면 티가 나요. 우리는 여기에 노이즈를 섞습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당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배경 노이즈를.”

“그게… 가능한가요?”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모든 측정에는 오차가 있고, 모든 데이터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국가는 그걸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걸 이용합니다.”

남자는 패드를 서진에게 돌려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래프의 특정 영역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쓸자, 붉은빛이 옅어지며 주변의 배경 신호와 뒤섞였다. 서진은 숨을 죽였다.

“이렇게 하면 등급 1로 재조정됩니다. ‘이상 없음’. 평생 다시 검사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시스템은 한번 ‘정상’으로 분류한 데이터는 두 번 다시 심층 분석하지 않으니까.”

그가 패드를 다시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서진의 눈을 똑바로 봤다.

“비용은 당신 명의의 모든 부동산 자산, 그리고 향후 20년간 소득의 30%입니다.”

서진은 숨을 삼켰다. 전 재산과 미래의 일부. 몸의 소유권을 되찾는 대가였다.

“결정할 시간은 24시간입니다. 내일 이 시간, 같은 장소. 그때까지 결정하지 못하면 당신의 의뢰는 폐기됩니다. 서명이 한번 고착되면 우리가 손대기 더 어려워져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을 때처럼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다시 열차의 진동 소리만 남았다. 서진은 텅 빈 승강장에 홀로 앉아 있었다. 손을 들어 목을 만졌다. 차갑게 식은 피부 아래로 맥박이 뛰고 있었다. 아직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낯설었다. 늘 다니던 길, 늘 보던 풍경이었지만 모든 것이 필름 한 겹을 씌운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파트 단지 입구의 홀로그램 광고판은 새로운 항노화 시술을 홍보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전동 킥보드를 타고 웃으며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모두가 시스템이 보장하는 평온한 내일 속을 살고 있었다. 오직 서진만이 그 내일의 가격표를 받아 든 참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인공 식물이 설정된 조도에 맞춰 이파리를 살짝 오므리고 있었다.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이는 집. 어제까지만 해도 안락함의 상징이었던 이 공간은 이제 그녀가 지불해야 할 비용의 목록이 되었다. 저 소파, 저 음향기기, 창밖의 야경을 고스란히 담는 저 통유리창까지. 그녀는 지난 15년간 직장에서 일하며 얻은 모든 것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을 되찾기 위한 담보물이었다.

향후 20년간 소득의 30%. 그것은 더 아득한 족쇄였다. 20년. 그녀는 마흔여덟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 수입의 삼 할은 보이지 않는 주인에게 흘러 들어간다. 마치 몸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일부를 저당 잡히는 것과 같았다. 시스템은 목을 요구했고, 조율사는 인생을 요구했다. 어느 쪽도 온전한 자신으로 남는 길은 아니었다.

다음 날, 서진은 약속 장소로 향하기 전 오랜 친구인 해영을 만났다. 해영은 4년 전, ‘잠재적 악성 신호 감지 (췌장)’로 등급 3을 받고 예방적 부분 절제술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그녀라면 무언가 다른 말을 해줄지도 모른다고, 서진은 막연히 기대했다.

“그래서 고민이라고? 얘, 그게 고민할 일이니?”

카페의 소음 속에서 해영의 목소리는 명쾌하게 울렸다. 그녀는 라떼 잔을 들며 가느다란 목걸이를 매만졌다. 그 아래, 블라우스 깃에 가려진 희미한 흉터 자국이 있을 터였다.

“그냥 날짜 잡고 수술받으면 끝이야. 한 일주일 입원하고, 몇 달 약 먹으면 예전이랑 똑같아. 아니, 더 좋아졌지. 이제 췌장암 걱정은 평생 안 해도 되잖아. 난 오히려 고맙던데?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미래의 병을 없애준 거니까.”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몸을 여는 거잖아. 아직 병이 생긴 것도 아닌데.”

서진의 말에 해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서진을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대했다.

“서진아, 그건 낡은 생각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네 느낌일 뿐이지, 데이터는 아니라고 말하잖아. 99.8%의 데이터와 네 ‘느낌’ 중에 뭘 믿을래? 우리 할머니가 옛날 암으로 돌아가셨어. 그때 이 시스템이 있었으면 할머니는 지금도 정정하게 살아계실 거야. 이건 축복이야, 저주가 아니라.”

해영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의심의 그늘이 없었다. 오히려 서진의 망설임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 시선 앞에서 서진은 조율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불법적인 거래, 전 재산을 내놓는 대가 같은 것들은 해영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일 터였다.

“수술 무서워서 그러니? 흉터 거의 안 남아. 요즘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봐.”

해영은 블라우스 깃을 살짝 내려 목과 쇄골 사이의 피부를 보여주었다. 아주 얇고 하얀 선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있던 피부의 결 같았다. 해영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건강의 증표 같은 거지. 나는 이 시스템 덕분에 내 아이가 성인이 되는 걸 확실히 볼 수 있게 됐어. 그거면 된 거 아니야?”

서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영의 논리는 완벽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공동체의 안녕에 부합했다. 서진은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손에 든 물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단말기가 작게 울렸다. 국민건강예측부에서 보낸 알림이었다.

[이서진 님, 예방적 전절제술을 위한 수술 전 상담 일정이 예약되었습니다.]

일시: 3일 후 오전 10시

장소: 중앙의료원 7층 갑상선센터

그녀가 동의하지도 않은 일정이 잡혀 있었다. 시스템은 그녀의 결정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환자였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관리되는 대상이었다. 거부권은 처음부터 없었다. 서진은 알림창을 멍하니 바라봤다. 화면 아래에는 [일정 확인]과 [일정 연기 요청] 버튼만 있을 뿐, [취소] 버튼은 보이지 않았다.

밤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율사와의 약속 시간이었다. 서진은 텅 빈 거실에 서서 자신의 목을 다시 만져보았다. 매끄러운 피부 아래에서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 고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 고동의 일부를 시스템에 넘기고 모두가 사는 ‘안전한’ 세상에 남을 것인가. 그녀의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어둠이 내린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거대한 회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창밖의 불빛들을 등지고, 서진은 현관문을 열었다. 결정은 내려졌다. 시스템이 정해준 길을 따라 병원으로 가는 대신, 그녀는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젯밤과는 다른 걸음이었다. 어제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색이었다면, 오늘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망명자의 걸음이었다.

승강장은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공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약속한 장소에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어린 소녀와 그 아이의 손을 꼭 쥔 어머니가 서 있었다. 소녀는 10살 남짓 되어 보였다.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의 운동화 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별 번호.”

조율사가 말하자,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숫자를 읊었다. 패드 화면에 떠오른 것은 갑상선 신호보다 훨씬 복잡한 뇌파형 그래프였다.

“소뇌 발달 이상 예측. 15년 내 발현 확률 68%. 권고 사항, 예방적 신경 교정 시술.”

남자는 무감각하게 데이터를 읽어 내렸다. 아이의 뇌. 아직 아무 이상도 없는 아이의 머리를 열겠다는 통보. 여자는 품에서 작은 데이터 칩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의 증서일 터였다.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의 뇌는… 그대로 지켜주세요.”

남자는 말없이 칩을 받고, 패드를 조작했다. 소녀의 뇌파 그래프 위로 희미한 노이즈가 섞여 들어갔다. 위험 신호는 순식간에 배경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패드를 끄고 여자에게 말했다.

“가보시죠. 이제 당신 딸은 시스템의 관심 밖입니다.”

모녀는 여러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서둘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떠나기 전, 소녀는 잠시 서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 맑은 눈동자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자신이 방금 어떤 거래의 대상이었는지 모르는 눈이었다. 모녀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남자가 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당신의 차례입니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서진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눈앞의 남자는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는 시스템의 빈틈을 파고드는 또 다른 포식자일 뿐이었다. 국가는 그녀의 목을 원했고, 이 남자는 그녀의 삶을 원했다.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그녀의 미래를 담보로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조금 전, 겁에 질린 아이의 손을 잡고 모든 것을 내어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이의 뇌를 지키기 위해 아이의 미래를 팔았다. 그것은 과연 지켜낸 것일까.

“시간이 없습니다.”

조율사가 재촉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에게 서진은 고장 난 부품을 수리할지, 아니면 폐기할지 결정해야 하는 고객에 불과했다.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작고 미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안에는 지난 며칠간의 고뇌가 모두 담겨 있었다.

“하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조율사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가 본 수많은 의뢰인들과는 다른 반응이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했습니까? 당신의 전 재산과 미래 수입의 일부. 그게 전부입니다. 당신의 몸은 온전히 남습니다.”

“아니요. 온전히 남는 게 아니죠.”

서진이 말했다.

“내 목을 지키기 위해, 내 남은 인생을 저당 잡히는 거니까요. 그건 시스템이 내 목에 매어두려는 족쇄와 다른 게 뭔가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두려움은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자,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내 목을 팔지 않겠습니다. 국가에게도, 당신에게도.”

조율사는 잠시 서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균열이 스치는 듯했다. 흥미롭다는 것인지, 혹은 어리석다고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데이터패드를 껐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선택이군요.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겁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승강장에는 다시 적막과 열차의 낮은 진동음만이 남았다. 서진은 그곳에 잠시 더 서 있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의 전 재산을 지켰지만, 동시에 시스템이 보장하는 미래를 내던졌다. 어느 쪽이 더 큰 손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도시의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거대한 빌딩들은 변함없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사람들은 안전한 귀갓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았지만, 서진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신호등이 바뀌자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서진만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집에 돌아온 서진은 가장 먼저 식탁 위에 놓아두었던 통보서를 집어 들었다. [위험 등급: 3]. 그 붉은 숫자가 여전히 그녀의 운명을 규정하고 있었다. 90일. 그녀에게 남은 유예기간이었다. 그녀는 단말기를 켰다. 병원에서 보낸 수술 상담 일정 알림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정 확인] 버튼이 반짝이며 그녀의 선택을 종용했다.

서진은 그 알림창을 닫았다. 그리고 통보서를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저 불빛의 바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등급표를 목에 건 채 살아가고 있을까. 해영처럼 그것을 축복이라 여기며, 혹은 아까의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내주며 그 등급을 지우면서.

그녀는 더 이상 그들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통보서를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거실에 작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숫자가 적힌 부분을 여러 번 찢어 아주 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그녀를 규정할 수 없도록. 잘게 찢긴 종잇조각들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서진은 빈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매끄럽고 따뜻한 피부 아래, 규칙적인 맥박이 고동치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병의 공포도, 모든 것을 빼앗길 거라는 불안도 이제는 희미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것은 오직 살아있다는 명백한 감각뿐이었다. 이 목은 등급이 매겨지지 않은, 온전한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 감각에 집중하며,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완벽한 안전과 예측 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온전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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