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서준 자신의 경련이 아니었다. 6개월 전, 혜진이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각의 잔향이었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조명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 그 눈을 감싸던 미세한 근육의 피로가 서준의 신경망에 희미한 데이터 패킷처럼 떠다녔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대기실의 회색 벽을 응시했다. 벽에 걸린 디지털 액자에서는 의미 없는 기하학적 무늬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해제 심리’ 대기실에는 그 혼자였다. 양자결속관리국의 17층, 창문 하나 없는 방. 공기청정기가 내는 소음만이 공간을 채웠다. 결속이 의무가 된 후 30년 동안, 자발적 해제를 신청한 사람은 서준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혼이나 사별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향을 안고 살아갔다. 익숙한 부재, 혹은 희미하게 남은 온기. 그들에게 결속의 흔적은 고통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연결의 증거였다. 서준에게는 아니었다. 혜진의 마지막 고통이 그의 감각에 무작위로 스며들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숨이 가빠지고, 밤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바래는 식이었다. 죽음의 메아리였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서류철을 들고 서 있었다.
“들어오시죠, 권서준 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진료실은 대기실보다 더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방의 절반을 차지한 의료 기기는 전원이 꺼진 채 침묵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금속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저는 해제 절차를 담당하는 임지연 박사입니다. 앉으세요.”
서준이 의자에 앉자, 임 박사는 맞은편에 앉아 서류철을 펼쳤다. 그녀는 서준을 보지 않고 서류의 글자들을 눈으로 좇았다.
“권서준 님.”
임 박사는 서류 첫 줄에서 손끝을 멈췄다.
“배우자분이 6개월 전 사고로 떠나셨고, 결속은 15년을 유지하셨더군요.”
그녀는 다음 줄로 시선을 옮기며 낮게 덧붙였다.
“해제 신청 사유는 ‘사별 후 잔존 감각으로 인한 일상생활 장애’ — 맞습니까?”
“네.”
“해제는 전례가 없는 시술입니다.”
임 박사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서준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메스처럼 날카롭고 건조했다.
“물론 기술적으로는 어렵지 않습니다. 결속 시 사용했던 양자 터널링 프로토콜을 역으로 진행하면 그만이죠. 문제는 신경계에 미칠 영향입니다. 15년입니다. 서준 님의 뇌는 혼자 기능했던 시간보다 두 개의 의식이 공존하는 상태에 더 오래 적응해 있었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부작용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들은 것 이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걸 ‘존재론적 이명(耳鳴)’이라고 부릅니다. 1쪽 청력을 잃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죠. 당신의 뇌는 사라진 타인의 신호를 계속해서 찾으려 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거나, 자아 경계에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임 박사의 목소리는 평탄했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무게를 갖고 서준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서준은 책상 위로 뻗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 혜진은 이 손을 좋아했다. 피아노를 치면 예쁠 손이라고 했다. 그 말이 떠오르는 순간, 손끝이 저릿해졌다. 혜진이 느끼던 감각이었다. 그녀는 손발이 자주 저렸다.
“지금도 느끼고 있습니다.”
서준이 말했다.
“혜진 씨의 감각이요. 이건 기억이 아닙니다. 그냥 불쑥 들어오는 데이터 찌꺼기 같은 겁니다. 고장 난 수신기가 잡음을 뱉어내는 것처럼요. 저는… 저는 이걸 멈추고 싶습니다.”
“그것이 혜진 님에게서 온 감각이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시죠?”
“네?”
“15년 동안 당신의 감각과 혜진 님의 감각은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경험은 중첩된 상태로 기록되었을 겁니다. 지금 느끼는 그 저릿함이 원래는 당신의 것이었을 가능성은 없나요? 혜진 님의 기억 때문에 그것이 타인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나의 감각과 너의 감각. 그 경계는 결속 이후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개념이었다. 부부싸움을 할 때조차 상대의 분노가 나의 불안과 뒤섞여 하나의 폭풍이 되었고, 기쁨을 나눌 때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행복감에 함께 취했다. 분리된 ‘나’라는 개념 자체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임 박사는 서준의 침묵을 긍정도 부정도 아닌 데이터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녀는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겼다.
“해제 절차 자체는 간단합니다. 30분 정도 소요될 겁니다. 하지만 법규상, 시술 전에 마지막 심리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드릴 겁니다. 이건 당신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그리고 해제 이후의 삶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의 빈칸을 가리켰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해제를 통해 당신이 되찾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한 단어로 답해주십시오.”
서준은 잠시 망설였다. 평온? 안정? 아니면 고요? 어떤 단어도 지금의 갈망을 정확히 담아내지 못했다. 그는 가장 원초적인 단어를 골랐다.
“혼자요.”
임 박사는 서류에 ‘고독(solitude)’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않은 채, 펜을 내려놓고 서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 무언가 다른 빛이 스쳤다. 분석이나 진단이 아닌, 순수한 지적 호기심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전보다 더 느리고, 명료한 발음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을 드리죠. 해제되고 나면, 당신 혼자 생각한다는 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이라도 나십니까?”
기억. 서준은 그 단어를 더듬었다. 혼자 생각하던 느낌. 그것은 기억의 영역에 있는 것인가? 마치 맹인이 빛을 기억하려 애쓰는 것과 같았다. 빛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따스함과 색채의 감각은 관념으로만 남았다. 혜진을 만나기 전의 ‘나’는 분명히 존재했다. 스무 살의 서준은 혼자 도서관에 앉아 법학 서적을 읽었고, 혼자 비 오는 거리를 걸으며 이어폰으로 오래된 팝송을 들었다. 그 기억들은 필름처럼 남아있었지만, 지금 그것을 재생하는 영사기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모든 과거의 프레임에는 혜진이라는 희미한 워터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녀를 알기 전의 고독조차, 그녀를 알고 난 후의 시점에서 재해석된 고독이었다.
“모르겠습니다.”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은 정직했다. 서준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무지가, 혹은 망각이 부끄러웠다. 혼자가 되고 싶다면서, 혼자가 무엇인지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모순. 임 박사는 그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서류의 빈칸에 ‘인지 불능’이라고 적을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준의 오른쪽 뺨에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스쳤다. 놀라 손을 들어 만져보았지만, 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감각은 생생했다. 겨울날, 언 손을 녹이려 혜진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던 그 손의 온기. 기억이 아니었다. 이것 역시 잔향이었다. 고통이 아닌, 사랑의 잔향. 서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왼쪽 눈꺼풀의 경련이나 손끝의 저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침입이었다. 이것은 그가 잊고 싶지 않았던,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감각이었다. 숨을 들이쉬자, 희미하게 그녀가 쓰던 샴푸의 프리지어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지금… 방금 그 감각은 무엇이었죠, 권서준 님?”
임 박사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서준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동공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는 연구자처럼, 그녀는 서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준은 거짓말을 했다. 이 감각을 그녀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이 온기를 ‘제거해야 할 데이터 찌꺼기’의 목록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혜진의 마지막 고통은 견딜 수 없었지만, 혜진의 마지막 온기는… 그것마저 사라진다면 자신에게 무엇이 남는가. 처음으로 의심의 균열이 생겼다.
“거짓말이시군요.”
임 박사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당신의 생체 신호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심박수가 급상승했고, 피부 전기 반응도 평소 수치를 벗어났습니다. 긍정적 감각 자극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그것도 ‘잡음’의 일부입니까?”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서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고통을 멈추고 싶었지, 혜진을 지우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양자 터널은 고통과 환희를 같은 통로로 실어 날랐다. 하나를 막으면, 다른 하나도 끊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는 이 간단한 사실을 외면해왔다.
“이런 순간들이 더 괴롭습니다.”
서준은 마침내 항변하듯 말했다.
“문득 떠오르는 행복했던 감각은, 지금 그녀가 없다는 현실을 더욱 잔인하게 후벼팝니다. 차라리 무감각한 고통이 나아요. 희망이 섞인 고문보다는. 그러니 제 대답은 같습니다. 이것 또한 제가 멈추고 싶은 것의 일부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임 박사는 한동안 서준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이전의 날카로움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것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었다. 거대한 미지의 현상을 마주한 과학자의 경외감에 가까웠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짧게 말하고는, 서류철의 마지막 장에 서명했다. 결재가 떨어지는 소리처럼, 만년필 심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는 서류철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리 검증 절차가 모두 끝났습니다. 해제를 진행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복도는 짧았다. 하지만 서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15년의 3월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혜진과 함께 웃고, 울고, 다투고,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이 보이지 않는 중력이 되어 그를 뒤로 끌어당겼다. 정말 이 길의 끝에서, 나는 온전한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혜진이라는 중요한 일부가 잘려나간, 불완전한 존재가 될 뿐일까.
시술실은 진료실보다 훨씬 넓고 어두웠다. 방 중앙에는 치과 진료 의자처럼 생긴 하얀색 유닛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를 거대한 링 형태의 기계가 둘러싸고 있었다. 링의 안쪽 표면에는 수백 개의 미세한 광섬유가 별처럼 박혀 있었다. 꺼져 있었지만, 그 자체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저곳에 누우시면 됩니다. ‘퀀텀 터널링 역전사 장치’입니다. 보통은 결속을 동기화하거나 안정화시키는 데 쓰이지만, 프로토콜을 역으로 돌리면 해제도 가능하죠.”
임 박사의 설명은 마치 잘 만들어진 기계의 사용법을 읊는 것처럼 건조했다. 서준은 천천히 유닛에 다가가 몸을 누였다. 차가운 인조 가죽이 등을 타고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그가 눕자, 안전장치가 자동으로 내려와 몸을 부드럽게 고정했다. 거대한 링이 소음 없이 움직이며 그의 머리 위로 자리를 잡았다.
“시술은 정확히 17분 소요됩니다. 과정 중에 약간의 이명과 시각적 노이즈가 발생할 수 있지만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의식을 잃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질 수 있습니다.”
임 박사는 제어판 앞에 서서 몇 개의 버튼을 눌렀다. 링 안쪽의 광섬유들이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위이잉, 하는 낮은 기계음이 공간을 채웠다. 서준은 눈을 감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혜진의 고통, 혜진의 온기, 혜진의 모든 것과의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을 비우기 위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때였다. 머릿속이 아니었다. 온몸의 신경세포를 직접 울리는 듯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 속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녹음된 음성도 아니었다. 지금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하고, 현재적인 목소리였다.
“서준 씨, 안 돼.”
서준은 번쩍 눈을 떴다. 푸른빛을 내뿜는 광섬유들이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목소리는 혜진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절박함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그의 두려움이 아니었다. 명백히 타인의 감정이었다. 기계음이 점점 커지며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한 번 더, 이번에는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거기서 나와! 그건…”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마치 송신이 갑자기 중단된 것처럼. 그리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서준이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감각이었다. 그것은 혜진의 고통도, 기쁨도 아니었다. 완전한 무(無). 거대한 우주에 홀로 던져진 듯한, 모든 연결이 끊어진 절대적인 공백의 감각이 그의 의식을 덮쳐오고 있었다.
“중단…!”
서준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거대한 기계음이 그의 목소리를 삼켜버렸고, 몸을 고정한 안전장치는 그의 미세한 발버둥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공포가 온몸을 잠식했다. 혜진의 목소리. 그것은 잔향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의 메아리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의지가 담긴, 절박한 경고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의식의 끈을 붙잡았다. 방금 전까지 지워버리고 싶었던 혜진과의 연결. 이제는 그것이 유일한 구명줄인 것처럼 매달렸다.
“혜진, 혜진! 방금 뭐라고 한 거야!”
하지만 그의 내면의 외침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연결은 이미 끊어지고 있었다.
제어판 앞에 선 임 박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스크린에 떠오른 서준의 뇌파 그래프가 폭풍우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예측된 ‘존재론적 이명’의 패턴과는 전혀 다른, 극도의 외부 위협에 반응하는 형태의 파동이었다. 통상적인 해제 과정에서 나타나는 안정적인 분리 곡선이 아니었다. 마치 잘 드는 칼로 정교하게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거대한 힘이 그의 신경망에서 혜진의 흔적을 난폭하게 찢어내는 듯한 데이터였다.
“피험자, 강한 저항 반응을 보입니다.”
임 박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스크린의 다른 창을 열었다. 양자 터널의 상태를 보여주는 그래프였다. 터널이 닫히는 것이 아니었다. 터널의 출구가 ‘김혜진’이라는 좌표에서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으로 강제 전환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은 해제가 아니었다. ‘대체’에 가까웠다.
그 순간, 서준을 덮치던 공백의 감각이 변질되었다. 텅 빈 우주가 아니었다. 그 텅 빈 공간을 채우는, 차갑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감정도, 기억도 아니었다. 순수한 논리와 기하학적 패턴으로 이루어진, 생명 없는 지성체 같은 것이었다. 혜진의 자리가 비워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 서준은 깨달았다. 혜진이 경고한 ‘그것’의 의미를. 자신이 원했던 ‘혼자’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고독이 아니었다. 침략이었다.
‘안 돼. ’
서준은 필사적으로 내면의 소용돌이에 저항했다. 혜진의 자리를 밀고 들어오는 것은 차가운 진공이었다. 모든 색과 온도가 빨려나간 순수한 공백. 그 공백 속에서, 기하학적인 패턴의 무언가가 그의 신경망에 자신을 새겨 넣으려 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된 수식처럼,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논리의 형태로 그의 자아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려 들었다. 이것이 ‘혼자’의 실체인가? 사랑과 고통, 그리움과 분노 같은 인간적인 모든 혼돈이 제거된 완전한 질서. 그것은 평온이 아니라 죽음과 닮아 있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지워버리고 싶었던 감각의 찌꺼기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왼쪽 눈꺼풀의 파르르한 경련. 손끝의 저릿함. 아침의 이유 없는 숨 가쁨. 혜진의 고통. 그것은 더 이상 잡음이 아니었다. 그녀가 존재했다는, 우리가 함께 존재했다는 마지막 증거였다. 서준은 기억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프리지어 샴푸 향기, 그의 뺨을 감싸던 따스한 손의 온기, 서툰 솜씨로 끓여주었던 김치찌개의 시큼하고 짠맛. 감각들이 희미한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침략자의 차가운 논리 앞에서 너무나 연약하고 비합리적인 것들이었지만, 유일한 무기이기도 했다.
‘이건 내 거야. 내 고통이고, 내 기쁨이야. 이건 우리 거야! ’
그의 의식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침략자의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시야가 하얗게 타들어 가고, 귀에서는 모든 소리가 지워졌다.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데이터 단위로 환원되어 삭제되기 직전이었다.
“프로토콜 강제 중단.”
제어판 앞에 서 있던 임지연 박사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스크린에 펼쳐지는 재앙과도 같은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 양자 터널의 좌표가 ‘김혜진’의 고유 시그니처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왜곡되고, 서준의 신경망에 기생하려는 외부 신호의 패턴은 관리국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것은 시술이 아니었다. 포식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붉은색 비상 정지 버튼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우우웅-! 고막을 찢을 듯하던 기계음이 단말마의 비명처럼 높아졌다가, 이내 툭, 하고 꺼졌다. 거대한 링을 밝히던 푸른빛이 사라지고, 시술실에는 비상등의 희미한 붉은빛과 서준의 거친 숨소리만이 남았다.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서준은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허공을 향해 몇 번이고 숨을 게걸스럽게 들이켰다. 진공 속에 있다가 갑자기 공기가 가득한 곳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임 박사가 조용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데이터’가 아닌 ‘표정’이 어려 있었다. 경계심과 미미한 충격이 뒤섞인.
“괜찮습니까, 권서준 님?”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자신의 감각을 더듬었다. 왼쪽 눈꺼풀. 미동도 없었다. 밤새 푹 잔 사람처럼 평온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피아노를 치면 예쁠 거라던, 길고 가는 손가락. 아무런 저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뺨을 만져보았다. 따스한 온기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차가운 손가락이 자신의 피부에 닿는 감촉뿐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혜진의 고통도, 혜진의 온기도. 잡음도, 사랑의 잔향도. 아무것도 없었다. 연결은 끊어졌다. 침략자는 격퇴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혜진에게로 향하던 양자 터널 자체가 영원히 붕괴해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이 원했던 것을 얻었다. 완벽하고, 순수한 고요. 신경을 긁던 모든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 어떤 메아리도 울리지 않았다. 텅 빈 방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절대적인 정적. 이것이 그가 되찾고 싶었던 ‘혼자’였다.
임 박사는 그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서준은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선명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흘렀다. 그 통증에는 다른 누구의 것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신만의 것이었다. 그는 그 감각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