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그를 뽑자 타인의 통증이 빠져나갔다. 마지막 파동은 왼쪽 신장이 있던 자리에서 희미하게 명멸하다 사라졌다. 텅 빈 공간의 감각. 서진은 12초간 눈을 감고 그 여운을 배웅했다. 계약된 고통은 언제나 흔적을 남겼다. 눈꺼풀 안쪽에서 점멸하는 인광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떠올랐다.
몸을 일으켜 소독실로 향했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타일의 감촉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녀의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감각의 경계를 다시 긋는 일. 방음 처리된 흰 벽, 무향의 공기, 22도의 항온. 통제된 환경 속에서 그녀는 타인의 몸으로부터 자신의 몸으로 귀환했다.
샤워 부스에서 미온수가 쏟아졌다. 서진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피부에 남은 전도성 젤을 닦아냈다. 의뢰인의 정보는 철저히 익명이었지만, 고통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폭로했다. 오늘 위탁된 것은 환상통이었다. 3년 전 사고로 사라진 왼쪽 다리, 그 자리에서 올라오는 통증. 의뢰인은 73세 남성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의 통증 프로파일에는 ‘저릿한’, ‘타는 듯한’, ‘칼로 베는 듯한’ 같은 표준 태그와 함께, 시스템이 분류하지 못하는 감각 데이터가 섞여 있었다. ‘오래된 목조 계단을 밟을 때 나는 소리 같은 통증. ’ 서진은 3시간 동안 존재하지 않는 그의 발목에서 삐걱이는 나무 소리를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감각 표준화 용액을 마셨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미네랄과 영양소로 구성된 액체. 혀의 미뢰를 초기화하고 위벽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녀의 몸은 타인의 고통을 수신하기 위한 정밀한 장비였고, 장비는 매번 영점을 맞춰야 했다.
개인실로 돌아오자 벽면 스크린에 알림이 떠 있었다. [신규 계약 배정 완료. 확인 요망.]
서진은 스크린 앞에 앉았다. 의자 표면의 질감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환상통의 잔재가 신경계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의자를 꾹 눌렀다. 인조 가죽의 저항감. 이것이 현실이었다. 그녀의 감각. 그녀의 몸.
파일을 열었다. 계약 ID, 보안 등급, 예상 기간, 지급될 보수.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예상 기간: 180일. 보수: 업계 최고 수준. 이런 장기 계약은 드물었다. 보통 말기 암 환자들이었다. 죽음의 마지막 단계를 온전히 위탁하는 사람들.
스크롤을 내렸다. ‘감각 프로파일 요약’이 나타났다.
[위탁자 진단명: 췌장암 4기, 다발성 전이.]
[주요 통증 유형: 내장성 통증 (심부, 둔통), 신경병증성 통증 (말초).]
[주요 동반 감각: 오심, 구토, 극심한 피로감, 화학요법 유발성 미각 변화 (금속성 맛).]
서진은 눈을 깜빡였다. 모니터의 글자들이 잠시 흐려졌다. 췌장암. 수감자들이 가장 기피하는 통증 프로파일이었다. 다른 암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면, 췌장암은 끝없는 저음으로 울부짖는 것에 가까웠다. 통증의 강도보다, 그 집요함이 사람을 무너뜨렸다. 신경계를 잠식하고 정신의 구조를 녹여내리는 통증.
파일을 거의 다 읽었을 때, 마지막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특약 사항. ’
[수신인은 7번 채널 경력 5년 이상으로 제한함.]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 7번 채널. 필터링되지 않은 원시 신호를 그대로 전송하는 채널이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안전장치가 여러 겹 적용된 3번이나 4번 채널을 사용했다. 7번 채널은 감각 데이터의 손실률이 0.1% 미만이었지만, 그 대가로 수신자의 신경계에 가해지는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비유하자면, 방음벽 없이 엔진실의 소음을 맨 귀로 듣는 것과 같았다. 이 회사에서 7번 채널을 5년 이상 다룬 수감자는 서진을 포함해 세 명뿐이었다.
의뢰인이 특정 채널의 특정 경력자를 지정하는 것은 규정 위반이었다. 익명성의 원칙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 계약은 관리부의 승인을 거쳐 그녀에게 배정되었다. 누군가 시스템에 압력을 행사한 것이 분명했다.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을 천천히 걸었다. 세 걸음 가서 벽을 짚고, 다시 세 걸음 돌아왔다. 불안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녀의 세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통제되어야 했다. 변수는 위험을 의미했고, 이 계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수투성이였다.
다시 스크린 앞에 앉았다.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관리자용 인터페이스가 아니었다. 그녀가 수년간 몰래 사용해 온,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드는 백도어였다. 몇 개의 명령어를 입력하자, 암호화된 계약 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창이 열렸다. 위탁자의 익명 코드를 원본의 신원 정보와 대조하는 스크립트를 실행했다.
진행률을 나타내는 막대가 화면을 가로질렀다. 10%. 35%. 78%. 서진은 숨을 참았다. 막대가 100%에 도달하고, 암호화된 이름이 한 줄의 텍스트로 풀려 나왔다.
[위탁자: 강우.]
손끝이 차가워졌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 시간의 감각이 사라졌다. 스크린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이름.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이름. 그녀가 이 지독한 직업을 선택하게 만든, 그녀의 과거 전부가 담긴 이름이었다.
서진은 기계적으로 그의 의료 기록을 열었다. 데이터가 화면을 채웠다. 3개월 전의 진단 기록, CT 이미지, 혈액 검사 결과. 숫자들이 강우의 몸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를 증언하고 있었다. 종양의 크기. 전이된 장기의 위치. 간수치와 백혈구 수. 서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 줄의 기록이 시선을 붙들었다. ‘체중: 58kg. ’
순간, 기억의 수문이 터졌다. 10년 전, 비 오는 여름날. 원룸의 작은 부엌에서 파스타를 만들던 강우의 뒷모습. 젖은 머리카락, 단단해 보였던 등. 그때 그는 75kg이었다. 서진은 그의 등에 업혀 장난을 치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기록은 ‘호흡 곤란 및 흉수’였다. 기억이 다시 그녀를 덮쳤다. 한강 변을 함께 달리던 새벽.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강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주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입김이 하얗게 엉키던 감촉. 그의 숨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데이터는 계속됐다. ‘불면. 섬망 증세. ’ ‘식욕 부진. 연하 곤란. ’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참사가 객관적인 단어와 숫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서진은 스크린을 보고 있었지만, 스크린 너머의 강우를 보고 있었다. 그의 고통을 읽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이 지워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보낸 신호였다. 수많은 수감자 중에, 하필 7번 채널의 경력자를 지정한 것. 그것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강우는 알고 있었다. 서진이 여기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림음과 함께 통신 창이 깜빡였다. 관리팀장 민희였다.
“서진 씨, 계약 파일 확인했죠? 이런 프리미엄 건은 정말 오랜만이야.”
민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밝고 명랑했다. 그 목소리로 가장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키보드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서진 씨? 듣고 있어요? 의뢰인이 아주 중요한 분이야. 회사에서도 각별히 신경 쓰고 있고. 이번 건만 잘 마무리하면, 내년 재계약 때 서진 씨 원하는 조건 전부 맞춰줄 수 있어요.”
“……왜 저죠?”
간신히 목소리가 나왔다. 갈라지고 잠긴 소리.
“응? 아, 특약 사항 때문에? 그건 의뢰인의 간곡한 요청이었어요. 최고의 전문가에게 맡기고 싶다는. 7번 채널 5년 이상이면 서진 씨가 제일 적임자잖아. 이건 서진 씨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라고요.”
신뢰. 민희는 그 단어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민희의 숨소리가 순간 멈칫했다. 목소리의 톤이 1도쯤 낮아졌다.
“농담이죠, 서진 씨? 계약 배정을 수감자가 거부할 수 없다는 건 기본 수칙이잖아. 특히 보안 등급이 이렇게 높은 계약은. 거부 시 발생하는 위약금이나 패널티는 말할 것도 없고, 업계에서 다시 일하기 힘들어질 거예요. 우리, 곤란한 상황 만들지 말자고요.”
부드러운 협박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회사는 그들을 ‘감각 전문가’, ‘소중한 자산’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은 부품일 뿐이었다. 언제든 교체 가능한.
“최종 동의서 보냈으니까, 1시간 내로 서명해서 제출해줘요. 첫 동기화는 내일 오전 9시 정각에 시작될 테니까 준비 잘 하고요.”
통신이 일방적으로 끊겼다. 화면에 ‘최종 동의서’ 창이 나타났다. 디지털 서명란이 공백으로 남아 깜빡이고 있었다. 저곳에 서명하는 순간, 서진은 앞으로 180일 동안 강우의 몸이 된다. 그의 통증, 그의 구역질, 그의 죽음을 자신의 신경계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마지막을 대신 살아내야 한다.
서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시 방 안을 걸었다. 이번에는 벽을 짚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은 무중력 상태처럼 위태로웠다. 10년 전, 그녀는 강우의 곁을 떠났다. 그의 사랑이 주는 감각의 홍수를 견딜 수 없어서. 모든 것이 너무 강렬해서. 그녀는 스스로 감각을 지우고 통제된 세계로 도망쳤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차라리 안전했다. 계약으로 묶인 고통에는 감정이 없으니까. 그냥 데이터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강우였다.
화면의 커서가 서명란 위에서 깜빡였다. 마치 심장박동 같았다.
서명란의 커서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정해진 시간 간격으로 점멸하며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일부였다. 감정도, 의지도 없는 코드의 나열. 하지만 지금 서진에게는 그 깜빡임이 강우의 마지막 심장박동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서명하는 순간 멎어버릴, 혹은 그녀의 몸으로 옮겨와 계속될 심장의 고동.
그녀는 통신기를 다시 켰다. 관리팀장이 아닌, 다른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야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늙고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지 선생님. 저 서진입니다.”
“알아. 이 시간에 나한테 연락할 사람은 너밖에 없지.”
서진이 처음 7번 채널에 배정받았을 때, 아무도 알려주지 않던 생존법을 일러준 사람이 지선생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이 회사에서 가장 오래 버틴 수감자라 했고, 누군가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또 누군가는 망령이라 불렀다.
“보안 등급 ‘알파’의 장기 계약이 배정되었습니다. 특약으로 수신인 경력을 지정했고요.”
서진은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전달했다. 지선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그가 마른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암 환자의 통증을 1년 넘게 수신한 후유증이었다.
“윗대가리들 장난질이 또 시작됐군. 익명성 원칙은 그놈들 필요할 때만 갖다 붙이는 장식 같은 거니까. 그래서, 거물 정치인이야, 아니면 재벌 총수야?”
“……모릅니다.”
“거짓말.”
지선생의 목소리는 칼날 같았다.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는 거짓이 통하지 않았다. 감각의 가장 깊은 곳을 다루는 이들은 타인의 미세한 음성 떨림만으로도 진실을 읽어냈다.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
“…….”
“서진아. 정신 차려. 그 계약, 미끼야.”
“무슨 말씀이세요?”
“감각 동기화에서 가장 위험한 게 뭔지 잊었어? ‘감정 오염’이야. 타인의 고통을 데이터로 받지 않고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순간, 네 신경계는 그걸 네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해. 필터 없는 7번 채널에서 아는 사람의 고통을 받는다? 그건 자살행위야. 뇌가 타버릴 거다.”
그가 하는 말은 서진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교본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경고문. 하지만 교본의 글자와 강우의 이름이 주는 무게는 전혀 달랐다.
“회사는 왜 이런 계약을 승인한 거죠? 규정 위반이잖습니까.”
“규정은 약자를 위해 있는 게 아니야. 우리 같은 부품들을 통제하기 위해 있는 거지. 의뢰인이 그 규정을 무시할 만큼의 대가를 치렀을 뿐이야. 회사는 돈이 되면 뭐든지 해. 네가 망가지면? 새 부품으로 갈아 끼우면 그만이지. 그게 이 바닥 생리야.”
차가운 진실이었다. 서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선생의 입을 통해 확인하자 절망의 무게가 몇 곱절은 무거워졌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
지선생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난 이미 늦었어. 너무 많은 고통을 오래도록 받아서, 이제 와 내 몸을 떠난다고 해도 돌아갈 내 감각 따윈 남아있지 않아. 하지만 넌 달라. 넌 아직 경계선 위에 서 있어. 이번 계약은 그 선을 넘게 될 거야. 한 번 넘어가면, 다신 돌아오지 못해.”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선택지를 주었다. 서진이 스스로 결정해야 할 몫이었다. 통신이 끊겼다. 방 안에는 다시 정적만이 남았다. 서진은 창가로 다가갔다. 특수 코팅된 창문은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대신, 방 안의 모습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낯설었다. 혈색 없는 피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 지난 5년간 만들어진, 통증 수신에 최적화된 얼굴.
강우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58kg의 몸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는. 그녀가 기억하는 10년 전의 얼굴일까, 아니면 고통에 잠식되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 어쩌면 그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서진만은 기억해주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가장 완전하게.
서진은 다시 스크린 앞으로 돌아왔다. 깜빡이는 커서는 여전했다. 그녀는 마우스를 쥐었다. 그리고 ‘최종 동의서’ 옆에 있는 다른 아이콘을 클릭했다. [위탁자에게 메시지 전송 (단문, 1회 제한)]. 이것은 계약 수락 전, 수신인이 위탁자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마련된 예외적인 기능이었다. 거의 사용되지 않는, 존재조차 잊힌 규정. 메시지는 시스템 관리자의 검열을 거치지만, 특정 키워드를 사용하면 암호화된 채로 전달된다는 것을 서진은 알고 있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10년의 침묵을 깨는 첫마디. 어떤 말을 보내야 할까. 수많은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나야. 어떻게 나인 줄 알았어. 원망과 그리움과 분노가 뒤섞인 질문들. 하지만 그녀가 타자기에 입력한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여전히, 비 오는 날을 좋아해?]
그들만이 아는 암호였다. 함께 살던 원룸의 낡은 창가에서 빗소리를 듣곤 했던 오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빗소리에 씻겨나가고 오직 둘만 남겨진 것 같았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강우가 속삭였던 말. ‘네가 있어서, 나는 비 오는 날이 좋아졌어. ’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발송되었습니다. 위탁자의 회신을 기다립니다.] 라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이제 공은 강우에게 넘어갔다. 그의 대답에 따라, 서진의 180일이 결정될 터였다. 만약 그가 그들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이 계약을 철회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깨닫는다면. 서진은 그것이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가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모순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최고의 전문가가 필요했을 뿐이기를. 그래서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착각이기를.
시간은 무한처럼 늘어졌다. 그녀의 방을 채운 정적 속에서 시스템 클럭의 초침 소리만이 유일한 리듬이었다. 1분, 5분, 10분. 서진은 스크린을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신경이 모니터의 한 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어쩌면 답장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의 침묵은 거절이거나, 혹은 망각의 증거일 테니까. 어느 쪽이든 그녀에게 도망칠 명분을 주었다.
그때였다.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 작은 봉투 아이콘이 나타났다. 심장이 갈비뼈를 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콘을 클릭했다. 짧은 문장이 담긴 팝업창이 떴다.
[비는 이제 그쳤어. 대신 네가 필요해.]
서진은 숨을 멈췄다. 희망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구조 신호가 아니었다. 그녀가 혹시나 기대했던, 과거에 대한 사과나 계약 철회의 요청이 아니었다. 이것은 마지막 초대였다.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절박하며,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강우는 그녀가 도망칠 모든 퇴로를 차단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서진이 자신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녀가 그의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지선생의 경고가 뇌리에서 울렸다. ‘넌 아직 경계선 위에 서 있어. 한 번 넘어가면, 다신 돌아오지 못해. ’
10년 전, 그녀는 강우가 주는 감각의 홍수에서 도망쳤다. 그의 사랑, 그의 기쁨, 그의 모든 것이 너무나 강렬해서 스스로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감각을 통제하고 데이터를 수신하는 이 차가운 세계를 선택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도달한 곳은, 그 모든 감각의 가장 잔인한 응축물이었다. 그의 죽음. 운명은 지독한 아이러니로 그녀의 도피를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었다.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더 이상 방 안을 서성이지 않았다. 불안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채우고 있었다. 결심이었다.
다시 스크린 앞에 앉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키보드 위를 움직였다. [최종 동의서] 창을 닫고, 그 아래 있던 [계약 거부] 아이콘을 클릭했다. 사유란에 짧게 적었다. ‘수신인 개인 사유로 계약을 거부합니다. ’ 제출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었다. [계약이 거부되었습니다. 배정이 철회됩니다.] 시스템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그녀의 결정을 확정했다.
***
다음 날 아침, 서진은 병원 앞에 서 있었다. 동기화실도, 흰 벽도, 22도의 항온도 아니었다. 우산 없는 어깨 위로 차가운 빗줄기가 떨어졌다.
지난밤 그녀는 [계약 거부]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걸려온 민희의 전화는 받지 않았다. 대신 회사 배지를 서랍에 넣고, 아침 첫차를 탔다.
자동문이 열리고 소독약 냄새가 밴 로비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이곳은 더 이상 타인의 고통을 잠시 보관하는 중립 지대가 아니었다. 전극도, 젤도, 채널도 없이 그녀는 이곳에 왔다.
병실 문을 열자 강우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58kg의 몸, 마른 손목, 링거 줄이 매달린 팔. 그가 젖은 그녀의 어깨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비가 왔네.”
갈라진 목소리였다.
“응.”
서진은 그의 곁에 앉으며 젖은 손으로 그의 마른 손을 잡았다.
“그쳤어. 대신 내가 왔어.”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데이터도, 승인도, 계약서도 거치지 않은 온기였다. 그의 통증은 여전히 그의 것으로 남았다. 서진은 그것을 자신의 신경계로 옮겨오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창밖의 빗소리를 함께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