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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화분

2026. 7. 10. · 9,671자 · 약 11분

네 번째 화분 썸네일
17

도시의 모든 흐름이 거대한 빛의 강물처럼 벽에 투사되고 있었다. 수십억 개의 벡터. 개인의 이동, 물류의 흐름, 정보의 교환이 녹색 선으로 표시되어 예측된 경로를 따라 부드럽게 흘렀다. 모든 것이 계산된 최적의 상태. 그 거대한 녹색의 강 한가운데서, 하나의 벡터가 붉게 깜박였다. 아주 작은 점이었다.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경고음은 소리가 아니었다. 한서진의 관자놀이 안쪽 신경 임플란트가 미세한 압력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는 마시던 영양액 튜브를 거치대에 내려놓고 주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붉은 점은 17구역, 주거 블록 4-베타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는 손을 허공에 올렸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데이터가 확대되고, 필터링되고, 재정렬되었다. 도시 전체를 보여주던 강물은 순식간에 17구역의 세부 격자로 바뀌었다.

오차. 시스템의 예측과 실제 발생한 사건 사이의 편차. 대부분의 오차는 통계적 잡음에 불과했다. 예측되지 않은 교통 체증,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 같은 외부 변수에 의해 발생했다가 수 초 내에 시스템이 새로운 최적 경로를 계산해내면 녹색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 붉은 점은 달랐다. 12시간 동안 소멸과 발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외부 변수와는 상관관계가 없었다. 원인은 단 하나의 식별 번호로 좁혀졌다. 개인 ID 734-88-1029.

한서진은 ‘오차 교정관’이었다. 그의 임무는 붉은 점들을 지우고 도시의 흐름을 다시 완벽한 녹색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개인 ID의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 이수아의 얼굴이 떴다. 고고도 수경 농장의 재배 일지에는 5년치 물주기 기록이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나란히 쌓여 있었다. 사회 기여도 점수 89.2. 심리 프로파일 칸에는 ‘순응적’이라는 태그 하나가 박혀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녀의 경로 이탈률은 0.001% 미만이었다. 시스템이 부여한 삶의 경로를 모범적으로 따라온 시민. 그런데 그녀의 파일에 새로운 경고 태그가 붙어 있었다. ‘비결정성 오차’.

한서진은 처음 보는 분류였다. 그는 이수아의 실시간 관찰 기록을 재생했다. 3시간 전의 영상. 그녀는 자신의 주거 모듈에 있었다. 작고 규격화된 공간. 시스템의 예측은 명확했다. ‘19: 00, 영양식 섭취. 19: 20, 지정된 휴식. 19: 37, 학습 모듈 접속. 22: 00, 수면. ’ 그러나 그녀는 19시 20분에 휴식을 취하는 대신 발코니로 나갔다. 발코니에는 자동 영양 공급 시스템에 연결된 수경 화분 세 개가 있었다. 시스템이 그녀의 건강과 심리 안정에 최적이라고 판단해 배정한 식물들이었다. 예측은 그녀가 식물들의 상태를 2분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예측대로 화분 세 개를 차례로 살폈다. 그리고 예측에 없는 행동을 했다. 구석에 놓인 작은 물뿌리개를 들었다. 화분 세 개 옆, 자동화 시스템에 연결되지 않은 낡은 토분. 금이 가고 이끼가 낀 화분이었다. 시스템의 자원 관리 목록에 존재하지 않는 개체. 그녀는 그 네 번째 화분에 물을 주었다. 앙상한 줄기 하나가 간신히 흙 위로 솟아 있었다. 시스템의 분석에 따르면 생존 확률이 5% 미만인 식물. 그녀가 물을 주는 행위는 어떤 최적화 계산에도 포함되지 않은, 완벽한 낭비였다. 확률 0.00001% 미만의 행동. 그러나 발생했다.

한서진은 영상을 정지했다. 화면 속에서 그녀가 네 번째 화분을 내려다보는 옆모습이 멈춰 있었다. 그 행동 자체는 사소했다. 도시의 흐름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계산기’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우주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입자가 관측된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계산기는 인간의 모든 선택을 예측했다. 유전 정보, 환경 데이터, 과거의 행동 패턴, 실시간 생체 신호를 종합해 다음 행동의 확률을 계산했다. 그 예측을 기반으로 사회 전체의 효율과 안정을 극대화하는 경로를 모든 개인에게 제시했다. 예측 불가능성은 곧 혼돈의 씨앗이었다. 시스템이 근절하려는 단 하나의 적.

다음 날에도 오차는 반복됐다. 시스템은 그녀가 출근길에 A-3 공중 보행로를 이용할 것이라 예측했다. 확률 99.8%. 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B-1 보행로로 걸었다. 47초의 비효율이 발생했다. 점심 식사로 단백질 보충식 C형을 선택할 확률은 98%였다. 그녀는 탄수화물 중심의 D형을 골랐다. 오후 작업 효율이 1.2% 저하될 것으로 예측됐다. 모든 선택이 사소했지만, 일관되게 예측을 벗어났다.

신경 임플란트를 통해 직속 관리 시스템 ‘중추’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차 734-88-1029, 비결정성으로 재분류. 24시간 내 자가 소멸 확률 0.1% 미만.”

차가운 합성 음성이었다.

“교정관 한서진, 2등급 개입 승인. 원인 규명 및 경로 재동기화 수행.”

한서진의 등이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졌다. 2등급 개입. 현장 접촉을 의미했다. 지난 3년간 그가 수행한 교정 작업은 모두 원격 데이터 수정으로 끝났다. 직접 개인을 만나는 것은 시스템이 중대한 변수로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수아와의 접촉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계산기가 그녀의 심리 프로파일을 기반으로 수천 개의 대화 시나리오를 생성했다. 그녀를 다시 예측 가능한 경로로 되돌릴 가장 효율적인 문장, 단어, 억양, 침묵의 길이까지 계산되었다. 한서진은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최적의 대화 경로를 자신의 단기 기억에 각인했다. 시나리오의 핵심은 그녀가 자신의 행동이 ‘비효율적’임을 인지하고, 시스템의 제안이 자신과 사회 모두에게 ‘이익’임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임무 시간은 다음 날 18: 00로 설정됐다. 그녀가 퇴근 후 자신의 주거 모듈로 돌아오는 시간. 한서진은 ‘건물 관리 시스템 점검 기술자’라는 위장 신분을 부여받았다. 복장과 장비, 예상 질문에 대한 최적의 답변까지 모두 데이터로 전송되었다. 모든 변수가 통제되었다. 단 하나, 목표물인 이수아 자신만 빼고.

다음 날 저녁, 한서진은 17구역, 주거 블록 4-베타 앞에 서 있었다. 회색 기술자 유니폼은 몸에 조금 컸다. 재활용된 공기는 오존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수많은 발코니 중 하나를 올려다봤다. 34층, 그녀의 모듈. 아주 작게 보이는 네 개의 화분. 네 번째 화분은 여기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신경 임플란트가 현재 시각과 심박수를 표시했다. 모든 것이 정상 범위. 그의 행동 경로는 완벽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 완벽하게 예측된 세계가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점과 충돌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손바닥에 축축한 감각이 번졌다. 그는 데이터를 확인했다. 자신의 신체 반응이었다. 시스템은 이것을 ‘경미한 스트레스 반응’으로 분류하고, 0.2초 안에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다.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서진은 건물의 공동 현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로비의 안내 로봇이 그를 스캔하고는 조용히 길을 비켜주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4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는 소독제 냄새와 희미한 기계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수아의 집 문 앞에 섰다. 금속으로 된 문에는 작은 식별 센서만 달려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 프로토콜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첫 문장. 시선 처리. 목소리 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폐로 들어온 공기가 차가웠다. 그리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거의 없었다. 압축 공기가 빠져나가는 희미한 소음과 함께, 문의 일부가 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빛이 복도의 그림자를 갈랐다. 그 빛 속에 이수아가 서 있었다. 시스템이 제공한 이미지 데이터와 정확히 일치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 평균적인 키, 무채색의 실내복. 그녀의 표정은 시뮬레이션이 예측한 ‘경계심 없는 수용’의 범주에 속했다. 그러나 데이터가 담지 못하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의 눈은 한서진의 얼굴이 아닌, 그의 어깨 너머 복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무슨 일이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예측된 톤과 정확히 일치했다.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중립적인 질문. 한서진은 각인된 시나리오의 첫 줄을 내보냈다.

“건물 관리 시스템에서 나왔습니다. 34층 전체 주거 모듈의 환경 제어 시스템에 대한 정기 점검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모든 단어, 모든 음절이 계산된 최적의 설득력을 갖도록 조율되었다. 이수아는 잠시 망설였다. 0.7초. 예측된 반응 시간보다 0.4초 길었다. 그녀의 시선이 비로소 한서진에게 닿았다. 그의 유니폼, 그가 들고 있는 진단용 태블릿, 그리고 그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네. 들어오세요.”

그녀는 몸을 비켜 길을 열었다. 한서진은 안으로 들어섰다. 모듈 내부는 그가 모니터로 수없이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규격화된 가구, 벽에 내장된 영양 공급 장치와 학습 모듈.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영상 데이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공기. 재활용된 공기 특유의 오존 냄새에 섞여, 아주 옅은 흙냄새가 났다. 시스템의 환경 센서는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입자. 한서진의 신경 임플란트가 이 비정상적인 후각 정보를 ‘분류되지 않은 데이터’로 태그했다.

그의 임무 프로토콜은 발코니의 자동화 시스템부터 점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가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수아가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녀의 존재는 소리가 없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데이터로 변환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발코니는 투명한 나노-멤브레인으로 도시의 오염된 대기와 차단되어 있었다. 세 개의 수경 화분은 최적의 조명과 영양액 속에서 싱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옆, 한서진의 시선이 네 번째 화분에 닿았다. 가까이서 본 화분은 영상으로 볼 때보다 더 낡고 초라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검붉은 흙이 보였고, 가느다란 줄기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줄기 끝에는 아주 작은 잎사귀 두 개가 달려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었다.

한서진은 태블릿을 들어 자동화 시스템을 점검하는 척했다. 화면에는 그의 임무 지침이 떠 있었다. ‘2단계: 비효율적 자원 낭비 요인에 대한 인지 유도. ’ 그는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네 번째 화분을 가리켰다.

“이것은 관리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개체입니다. 자동 영양 공급 라인에 연결되어 있지도 않군요.”

그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통제된 기술자의 것이었다. 우려와 전문성이 적절히 배합된 톤. 이수아의 심리 프로파일에 따르면, 그녀는 이 지적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 혹은 ‘실수였다’는 식의 순응적인 반응을 보일 확률이 87%였다.

“알아요.”

그녀의 대답은 단 한 마디였다. 예측된 반응 목록 어디에도 없는, 너무나도 간결한 긍정. 한서진의 대화 알고리즘이 순간적인 공백에 빠졌다. 그는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미등록된 유기체는 구역 전체의 자원 분배 효율에 미세한 오차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통제되지 않은 토양은 외부 오염 물질을 유입시킬…”

“이 아이의 이름은 ‘오늘’이에요.”

이수아가 그의 말을 잘랐다. 한서진은 말을 멈췄다. ‘오늘’. 시스템의 언어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명명법이었다. 그의 신경 임플란트가 경고 신호를 보냈다. ‘목표의 반응 패턴, 예측 경로에서 12.8% 이탈. 대화 전략 재조정 필요. ’

“이름 말입니까?”

한서진은 간신히 되물었다. 계산된 대사가 아니라, 그의 입에서 나온 순수한 질문이었다.

“네. 어제는 죽은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저 작은 잎이 새로 났어요. 그래서 이름이 오늘이에요. 내일이 되면 또 다른 이름이 생길지도 모르죠.”

그녀는 화분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시스템이 분석한 수백만 개의 감정 표현 데이터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끝이 갈라진 화분 가장자리를 가만히 쓸었다.

‘중추’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흘러 들어왔다. ‘대화 프로토콜 델타-9으로 전환. 감성적 접근을 통한 논리적 설득 시도. ’

한서진은 새로운 지시에 따라 목소리를 더 부드럽게 조절했다.

“식물을 기르는 즐거움은 시스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적의 종 세 가지를 배정한 것입니다. 저 화분들은 당신의 심리 안정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확률이 99.3%로 계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네 번째 화분은… 생존 확률이 희박합니다. 그것이 죽었을 때, 당신의 심리 상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확률이 73%에 달합니다. 당신을 위한 최선의 경로는 이 비효율적인 노력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그는 완벽한 문장을 말했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논리와 배려가 공존하는 가장 효과적인 설득. 그러나 이수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한서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발코니 너머 도시의 거대한 빛의 강물이 비쳤다. 수십억 개의 예측된 녹색 벡터들.

“확률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 한마디가 한서진의 모든 방어 체계를 무너뜨렸다. 그의 임플란트는 이 문장에 대한 최적의 반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확률이 전부가 아니다. ’ 그것은 이 세계의 근간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의 손끝이 태블릿 모서리를 눌렀다 뗐다.

“모든 것이 예측대로라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녀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오늘, 이 아이가 새 잎을 내놓을 거라고는 계산기도 몰랐을걸요.”

한서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다시 축축한 감각이 번졌다. 시스템은 여전히 그것을 ‘경미한 스트레스 반응’으로 분류했지만, 그는 그것이 다른 무언가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의 완벽했던 세계에 가느다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화면 속 붉은 점이 아니라, 바로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와 그녀의 죽어가는 화분이, 그 균열의 진원지였다. 그의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멈췄다.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는 버튼을 찾지 못했다.

한서진의 신경 임플란트가 비명을 질렀다. 논리 회로에 과부하가 걸린 듯, 수백 개의 오류 메시지가 그의 의식 표면을 스쳐 지나갔다. ‘반박 데이터 검색 실패. ’ ‘심리 프로파일과의 불일치율 34.7%. ’ ‘미확인 개념: 의미. ’ 중추는 즉각적인 대응을 요구했다. ‘목표의 저항 확인. 3등급 개입 프로토콜로 전환. 대상의 비합리적 애착을 논파하고 개체의 즉각적인 폐기를 지시하라. ’

그의 입이 기계적으로 열렸다. 시스템이 그의 혀와 성대에 가장 효율적인 명령을 전송했다. 그러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수아의 눈동자에 비친 도시의 빛에서 벗어나, 그녀의 뒤, 네 번째 화분에 고정되어 있었다. 앙상한 줄기 끝에 매달린, 그 작고 연약한 잎사귀. 시스템의 계산에 따르면 존재해서는 안 될 생명. 확률 0.00001% 미만의 현실. 그것은 오류가 아니었다. 기적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당신의… ID는 734-88-1029.”

한서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시스템이 조율한 톤이 아니었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고고도 수경 농장 기술자. 사회 기여도 89.2. 당신은 시스템이 인정한 모범 시민입니다.”

“그 숫자들이 나를 설명해주나요?”

이수아가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한, 순수한 질문이었다.

한서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을 숫자를 다루며 살아왔다. 모든 인간, 모든 사물, 모든 흐름은 데이터와 확률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도시의 평화와 효율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가 서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비효율적이고, 그녀의 논리는 비합리적이며, 그녀의 미소는 데이터로 변환되지 않았다. 그의 임플란트가 같은 프레임을 되감았다. 열두 번째였다.

‘경고. 교정관의 생체 신호, 허용 범위 이탈. 즉시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하라. ’

중추의 차가운 명령이 관자놀이를 찔렀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 붉은 점을 지시대로 지울 것인가, 아니면… 그는 자신의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임무 결과 보고’ 양식이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키보드 위를 맴돌았다. ‘오차 원인: 대상의 고집적 비합리성. 교정 실패. 강제 동기화 요청. ’ 이것이 정답이었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유일한 답. 그렇게 입력하면 모든 것이 원래의 완벽한 녹색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작은 혼돈은 사라지고, 그는 다시 효율적인 도시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네 번째 화분으로 향했다. ‘오늘’이라고 불리는 존재. 내일은 또 다른 이름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그 예측 불가능한 희망. 만약 저 화분이 내일 또 다른 잎을 피워낸다면? 만약 언젠가 꽃을 피워낸다면? 시스템의 예측을 비웃으며 기어이 살아남는다면? 그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확률이 전부는 아니었다.

한서진은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은 시뮬레이션으로 각인된 움직임이 아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보고서: 오차 734-88-1029 점검 결과. ’

‘원인: 예측 모델에 미반영된 심리적 변수 발생. 대상은 시스템이 제공한 표준적 안정화 자극(수경 화분 3개) 외에, ‘극복’과 ‘성장’이라는 개념을 체화할 수 있는 추가 변수를 자발적으로 생성함. ’

‘분석: 해당 행위는 자원 비효율을 발생시키나, 동시에 대상의 장기적 심리 안정성 및 시스템 순응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설적 효과를 가짐. 이는 새로운 형태의 ‘자가 교정’ 메커니즘일 가능성이 있음. ’

‘조치: 3등급 개입 보류. 해당 개체(네 번째 화분)를 ‘통제된 비결정성 변수’로 지정. 추가 데이터 수집을 위해 장기 관찰 대상으로 재분류할 것을 건의함. ’

그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데이터가 중앙 시스템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시스템을 속였다. 아니, 그는 시스템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했을 뿐이다. ‘희망’을 ‘장기적 심리 안정성’으로, ‘사랑’을 ‘자가 교정 메커니즘’으로, ‘오늘’이라는 이름을 ‘통제된 비결정성 변수’로.

잠시 후, 그의 임플란트로 답신이 도착했다. ‘건의 수락. 오차 734-88-1029, 관찰 등급으로 전환. 임무 완료. 복귀하라. ’

붉은 점이 깜박임을 멈췄다. 하지만 녹색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제 시스템의 지도 위에서 희미한 주황색 점으로 빛나고 있었다. 관리 대상. 그러나 제거 대상은 아닌.

“점검 끝났습니다.”

한서진이 태블릿을 내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평온을 되찾아 있었다.

“시스템에 이상은 없습니다.”

이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감사의 표현도, 안도의 한숨도 없었다. 그저 조용한 이해만이 담겨 있었다. 마치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한서진은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가 현관을 나설 때, 등 뒤로 흙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따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그를 맞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방금 나온 건물을 올려다봤다. 수백 개의 똑같은 창문들. 그중 하나가 이수아의 집이었다. 수억 개의 창문에서 새어 나온 빛들은 더 이상 하나의 강으로 합쳐지지 않고, 저마다의 색으로 깜박였다.

그의 임플란트는 아무런 경고도 보내오지 않았다. 그의 심박수는 안정적이었고, 스트레스 지수도 정상 범위였다. 시스템의 눈에 그는 오류 없는 벡터, 완벽한 녹색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의 관자놀이 안쪽, 경고가 울리던 바로 그 자리가 주황색의 희미한 온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꺼냈다. 손가락 끝에서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보이지 않는 흙 속으로 스며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완벽하게 예측되고 통제되는 안정된 세상과, 예측할 수 없는 비효율과 가능성이 공존하는 세상 중, 진정한 인간성은 어디에 깃들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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